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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21화 (321/733)

<제321화> 악당들의 동상이몽

개평을 넉넉하게 챙긴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루비나 공작부인과의 담판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해, 해냈어!’

그 몸짓이 숙녀치곤 너무 컸는지, 그녀를 왕비궁에 딸린 옆문으로 안내하던 젊은 근위병이 그녀를 흘긋 의식했다.

그 시선을 알아챈 클레멘테는 근위병 보란 듯이 입술을 핥았다.

‘구, 군침이 싹 도네⋯⋯?’

근위병이 깜짝 놀라 다시 앞을 보는 사이에 바톨리니 백작부인은 조금 전에 있었던 사건을 복기했다.

- “내 주마.”

루비나 공작부인이 뚝 떨어지는 단문으로 답했다. 클레멘테는 감격에 차서 부르짖었다.

- “⋯⋯저, 정말로 감사, 감사합니다!”

- “물론, 맨입은 아니야.”

공작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를 쳐다보았다. 뱀처럼, 코앞의 먹잇감을 위아래로 훑으며 평가하는 눈이었다.

- “네가 파티를 하나 열어줘야겠다.”

- “파, 파티요⋯⋯?”

난데없이 웬 파티? 루비나 공작부인은 어리둥절해 하는 바톨리니 백작부인에게 입을 열었다.

- “타란토 공녀가 조만간 데뷔탕트 무도회를 열어.”

- “⋯⋯아, 그날⋯⋯!”

미니핀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 “⋯⋯다, 다른 무도회를⋯⋯!”

답답해서 복장이 터지는 데보라와는 달랐다, 데보라와는. 이게 혈통의 힘인가?

한마디만 던져도 바로바로 알아듣는 미니핀을 본 루비나의 만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 “그래. 내가 직접 열려니 서방 눈치가 좀 보이더구나.”

그녀는 손에 든 핑크 사파이어 티아라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 “네가 나 대신 아주 화려하고 큰 파티를 열어줘야겠다.”

루비나는 호적상 비앙카 공녀의 집안 어른이었다.

레오 3세의 파트너로서 주빈으로 참석하게 될 것이 유력하므로, 그녀가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아예 얼굴을 안 내미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타란토 공작가와 싸우자는 이야기를 넘어 레오 3세를 거스르는 꼴이 되어서 그렇다.

하지만 그녀가 그날 무도회를 몇 탕 뛰는지는 어디까지나 루비나의 자유였다.

- “어차피 국왕 폐하께서는 요새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즐기시지 않아. 금방 나오실 거다.”

루비나는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 “그 이후에 내가 빠져나와서 그쪽 파티에 얼굴을 보일 테니, 내 이름 있는 대로 팔면서 그쪽에 사람 모아 놔.”

공작부인은 국왕이 떠나자마자 썰물처럼 사람이 싹 빠져나가 버릴 타란토 공작가의 무도회장을 상상했다. 입꼬리가 절로 귀 끝까지 올라갔다.

클레멘테의 눈도 반짝였다. 이건 완벽한 계획이었다. 일단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파티 주선자에 대한 예의는 다 차린 것이 된다.

손님들도 타란토 공작가와 척을 질 생각까진 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을 거였다.

일찍 떠난 건 그저, 그 파티가 재미없었을 뿐이니 주인의 손님 대접 문제로 넘어간다.

- “⋯⋯무, 무슨 말씀이신지 아, 알아들었습니다⋯⋯!”

- “영리한 것.”

루비나 공작부인은 재차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네가 원하던 돈은 내가 10년간 콘타리니 가문에게 빌려준 것으로 하지. 너를 연대보증인으로 삼아서.”

루비나 공작부인은 자신이 아주 너그러운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그 제안의 각박함에 잠시 굳었다.

콘타리니 가문 단독 명의가 아니라, 자신을 연대보증인으로 끼워서였다.

연대보증인은 주채무자가 돈을 안 갚으면 언제든지 자기가 그 돈 전액을 대신 갚아야 한다. 자기는 구경도 못 해본 돈인데 말이다.

4천 두카토나 되는 거금을 자기 명의를 끼워서 빚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하지만 클레멘테는 도리질을 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의 결혼생활이 걸렸다. 클레멘테에게 바톨리니 백작가의 안주인 자리는 결혼생활일 뿐만이 아니라 신분이고 직업이었으며 자신의 계층에 속할 수 있는 열쇠였다.

4천 두카토는 오타비오한테서 천천히 옭아내면 된다. 어쨌건 콘타리니 가의 저택은 남아 있을 것 아닌가.

게다가, 루비나의 다음 말이 클레멘테를 기쁘게 했다.

- “그리고 이번 일을 잘 치러내게 되면, 다음 달부터는 내 시녀로 들어와서 일해라.”

- “⋯⋯예⋯⋯?”

- “수석 시녀 자리가 공석이었어.”

미니핀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 “일 빠릿빠릿하게 하면 그 4천 두카토도 차차 탕감해 줄 테니 날 실망시키지 말아라.”

- “감사⋯⋯. 감사합니다! ⋯⋯기.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

⋯⋯이렇게 루비나와의 면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클레멘테는 재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좀 전에 그녀의 혀 놀림을 보고 기겁했던 근위병이 마음을 정했는지 성문에 거의 다 다다르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백작부인. 도착하셨습니다만⋯⋯.”

경례 한 번이면 됐지, 굳이 걸 필요 없었던 말이었다. 클레멘테는 근위병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이, 이크,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톨리니 가문의 마차에 올라탔다.

그 와중에 여주인이 젊은 남자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바톨리니 노백작이 붙인 마부가 주의 깊게 관찰했다.

마차에 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클레멘테는 자기가 할 일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그녀는 일단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 날짜부터 알아내야 했다.

그 뒤는 파티의 구실을 정하고, 초대할 손님들을 모으는 일이 남는다. 클레멘테는 이번에도 역시 발조 백작부인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선사업이 무도회 명분으로는⋯⋯. 제일⋯⋯. 무난하지⋯⋯. 루, 루비나 공작부인의 명이라는 사실을 미리 좀 흘리면⋯⋯.’

발조 백작부인은 사교계에서 발이 넓었다.

발조 백작가가 원체 명문가이기도 했고 그녀 개인이 그간 꾸준히 자선사업을 해 오기도 했다. 여러모로 안성맞춤인 주최자 감이었다.

그녀가 약간의 위험부담이 있을 주최자의 역할을 맡을 실익도 충분했다.

최근에 발조 백작부인의 친정은 영지에 새로 직물 생산 시설을 설치하고자 했는데, 거기서 일할 사람을 차출하는 일 때문에 근처 직물 길드와 부딪히고 있다고 들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호의가 필요할 거야⋯⋯.’

영주와 길드 사이의 갈등 조정은 작은 동네의 사소한 일이라면 근처의 대영주가, 큰 문제라면 국왕이 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모아야 할 가문들의 목록이 착착 쌓여갔다.

명망 높은 가문이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에 아예 나타나지 않거나, 오더라도 아주 짧은 시간만 자리를 지키고 바로 다음 무도회로 넘어가 데뷔탕트 무도회장이 민망할 정도로 휑해진다면 이쪽의 승리다.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루비나 공작부인을 따라 장소를 옮길 사람을 섭외하기는 쉬울 테지만, 처음부터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보이콧할 사람을 구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러나 클레멘테는 반드시 이번 무도회를 성공시켜야 했다. 그녀는 절대로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사람들부터 세 보았다.

자신과 절친한 부인들 목록은 물론이요, 예전의 불륜 상대들까지 뽑아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수, 수석 시녀⋯⋯.’

이사벨라 데 마레를—클레멘테는 이사벨라를 자신의 처녀적 성으로 부르는 일에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묻어버리는 것 따위보다 더 큰 미래가 있었다.

왕비의 시녀는 왕궁에서 궁정 귀족과 자유연애를 하고, 때로는 왕의 정부가 되어 권력을 움켜쥐기도 했다.

미니핀은 지금의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떠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 * *

아리아드네의 파티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무도회 준비는 그녀의 주 전공이자 아주 익숙한 일상이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 “실내장식 쪽에서 컨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악단과 광대 섭외가 완료되었습니다!”

- “식음료 쪽도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당일에 도착해야 할 도축한 고기만 제외하면 준비 끝이에요.”

- “완벽합니다.”

완벽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쪼들리던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행사를 치러냈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번에는 예산도 넉넉했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주빈(主賓)인 레오 3세의 참석은 미리 확정 지은 바였다.

국왕은 저녁 이른 시간, 파티가 열릴 때 도착해 축사를 해 주기로 했다. 뭐 어떻게 잘못될만한 부분이 없었다.

이 와중에 아리아드네는 약간의 개인적 이익도 챙겼다.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는 국왕이 친히 참석하는 파티였다.

그런데, 왕궁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열리는 파티였다.

그 말인즉슨,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는 왕궁 정문의 공식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는 사람, 그러니까 귀족이 아닌 자도 참석이 가능한 국왕 참석 파티라는 소리였다.

물론 추기경의 서출이었던 시절의 아리아드네와 이사벨라처럼 왕궁 정문의 공식 검문소가 무의미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극소수였고, 성직을 통해 한 번 세탁이 된 특권자들만이 탈 수 있는 루트였다.

평범한 방식을 통해 부를 쌓고 존경을 받게 된 자들, 그러니까 평민 출신의 상인이나 학자들은 자신이 국왕이 참석하는 무도회에 초대될 수 있으리라는 상상 자체를 해보지 않고 살았다.

아리아드네는 데뷔탕트 무도회의 초대객 리스트에 카루소 대표와 그 아내인 카멜리아 비텔리를 올렸다.

이 초대장을 받은 카루소 대표는 감격해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노동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계층으로 태어난 남자의 인간 승리였다.

남편 손을 꼭 붙들고 있던 카멜리아도 함께 울먹거렸다. 카멜리아에게는 내쳐졌던 세계로의 복귀라는 의미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초대장은 그저 카루소 대표 개인에 대한 긍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산 카를로의 신흥 계급, 상인들에게 새로운 목표와 희망이 된 것이다.

- “보카네그로 상회의 카루소 대표가 국왕 폐하께서 참석하시는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았다고?”

- “⋯⋯이건⋯⋯. 전무후무한 일일세.”

- “태어나서 국왕 폐하를 지근거리에서 단 한 번이라도 뵌 적이 있나?”

- “개선식? 광장? 교회에서도 못 뵀지. 귀족은 실내에 들어갈 수 있지만 평민은 대성황당 광장에서 설교를 들어야 하니.”

- “그런데 같은 파티에 참석이라니!”

‘우리도 된다‘는 희망이 상인 계급 사이에서 일제히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회를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에 주목했다.

중앙정계와의 끈을 잡고 있는, 교계와의 연결고리도 있는, 그리고 상인 사회에 아주 넓은 영향력을 가진 젊은 데 마레 백작이 핵심이었다.

이제 그들이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누군지 나왔다.

파티가 열리기도 전에 아리아드네의 집은 예전에 터 뒀던 안면으로 새로운 사업 기회를 들고 방문하는, 혹은 얼굴도장을 찍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산 카를로의 내놓으라 하는 자수성가한 사람들로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건 기존 기득권층이 가장 불편해하는 종류의 일이기도 했다.

- “상인 놈들과 같은 파티에 참석이라니!”

가장 극렬히 거부한 건 지방 영지에 거점을 둔 대영주들이었다.

그들의 부는 땅에서 나왔다. 상업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이었다.

자연히 생산활동을 하지도 않는 주제에 중간에서 돈을 떼어가는 자들을 비도덕적이라 여겨 천시했고, 그저 자신들에게 사치품을 대주는 불쾌하지만 없앨 수는 없는 생활 일부로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그놈들이 흑사병을 통해 목소리를 키우더니 이제는 자신들과 같은 사교 이벤트에 참석한다.

- “타란토의 비앙카는 도대체 왜 그 끔찍한 상인에게 초대장을 보낸 거지요?”

- “콘타리니 백작가를 곤란에 처하게 한 집안이라면서요?”

- “새 콘타리니 백작부인이 기품 없는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요. 그렇지만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그저 투기가 심할 뿐이고⋯⋯.”

- “맞습니다. 일개 상인이 백작가를 왕궁 법정에 고발한 건 선을 넘은 일이예요. 하극상이지요.”

콘타리니 백작가를 고발한 건 엄밀히 따지자면 같은 귀족 가문인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이기는 했지만 호사가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산 카를로의 번화가에서 느꼈던 불편, 최고급 상점을 상인들과 나누어 써야 했던 불쾌감이 카루소 대표와 카멜리아 부부와의 동석을 매개로 해서 터져 나올 뿐이었다.

- “콘타리니 백작부인에 대한 도덕적 질타 아닐까요? 불쌍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고 파티에 시혜적으로 초대해주는 거지요.”

- “뭘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요? 타란토 촌부들이 뭘 알겠어요? 다 가운데서 장난질을 치는 데 마레 여백작이 하는 짓이겠죠! 자기랑 친하니까!”

사교계의 근황을 듣는 이사벨라는 이렇게 흘러가는 여론이 몹시 기꺼웠다.

본인은 가만히 집에 앉아만 있었는데도 피해자가 되다니, 고맙기도 하지!

“그래, 타란토 촌부들이 뭘 알겠어! 다 데 마레 여백작이 하는 짓이지!”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자기 친구, 레오나티 자작 영애를 옆에 앉혀놓고 열변을 토했다.

“어떻게 카멜리아 같은 상인 나부랭이한테 비앙카 공녀님의 초대장을 줄 수가 있니? 그 못된 계집애의 실체를 모두가 알게 되는 거야!”

“⋯⋯그런데 있잖아 이사벨라.”

레티시아는 매우 합리적인 지적을 했다.

“너 그 대공녀 무도회 초대장, 네 여동생 덕에 얻은 거잖아. 그렇게 욕해도 돼?”

“흥!”

백작부인에게는 그 어떤 핑계를 대도 어울리지 않을 데시벨로 코웃음을 친 이사벨라는 그래도 분이 덜 풀렸는지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어딜 봐서 걔 때문에 얻은 거니? 내 남편이 지위가 있으니 합당하게 들어올 초대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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