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친구의 귀띔
제 손에 쥔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 초대장은 자기 여동생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제 남편의 지위 때문이라는 이사벨라의 말에도 일견 일리가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이사벨라가 예뻐서 초대장을 보낸 건 절대 아니었다.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는 국왕이 친히 참석하는 드문 무도회였고, 그 주인공은 타란토의 비앙카 공녀였다.
그 후견인으로 알폰소 왕자까지 있었으니, 수도의 주요 귀빈이 모두 참석하는 것이 순리였다.
아리아드네는 애초에 비앙카 공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귀한 신분의 소수만 참여하는 스몰 파티로 개최하는 방안을 밀었으나, 공녀의 유모인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결국엔 성대한 무도회를 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되니, 콘타리니 백작가에 초대장이 안 갈 도리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오타비오는 국왕의 3인 내각 중 일인방이었고 이사벨라는 그 적법한 배우자였다.
“그런데, 레오나티 남작가에는 아직 초대가 안 갔다고?”
레티시아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사벨라는 시혜를 내리듯이 말했다.
“괜찮아. 좀 더 기다려 봐. 초대장은 급을 나눠서 여러 번에 걸쳐서 뿌리잖아. 다음 초대에는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어.”
그러나 이건 여러모로 미묘한 말이었다.
이미 상인인 카루소 비텔리가 초대된 사실을 아는데 하급 귀족이지만 어쨌든 귀족인 멀쩡한 자작 가문이 그거보다 초대장을 후순위로 받는 건 민망한 일이다.
이사벨라는 다시 한번 으스대듯이 말했다.
“아니면 내가 우리 오빠한테 널 파트너로 데리고 가라고 할게. 데 마레 가문은 당연히 초대장을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레티시아의 얼굴이 조금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이폴리토 본인이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 종류의 홍조였다.
그러나 이렇게 본인이 사교계의 핵심인사인 척하는 이사벨라는 꿈에도 몰랐다.
자기가 초대되지 않은 애프터 파티의 초대장이 은밀하게 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애프터 파티의 초대장은 다름 아닌 그녀의 시누 형님,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를 주축으로 해서 유통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좀 더 주의 깊게 클레멘테를 살폈어야 했다.
며칠 전, 이사벨라가 요구했던 돈을 가지고 왔을 때 클레멘테의 태도는 평소의 미니핀과는 달랐었기 때문이다.
* * *
약 열흘 전.
루비나 공작부인을 알현한 바로 다음 날 늦은 오후에 바톨리니 백작부인은 친정에 나타났다.
그녀는 남동생 부부를 응접실에 앉혀놓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오, 오타비오, 어, 어음과 서류⋯⋯ 받, 받아서 서, 서명해.”
“누나, 이게 무슨 소리야? 어음?”
봉투 안을 들여다본 오타비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4천 두카토? 누구한테서? 루비나 공작부인?!”
며칠 전에 왕궁 법정의 법관 임명에 힘을 써 달라는 부탁조차도 문전박대당해서 쫓겨났거늘, 누나는 무슨 수로 루비나 공작부인에게서 돈을 받아온 걸까?
“아니, 이게 어떻게 가능해?!”
클레멘테는 본능적으로 환희에 찬 남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네 마누라를 팔아먹고 왔다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녀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어려운 결심을 한 것처럼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실은. ⋯⋯내, 내가 여, 연대보증을 섰어.”
“누나가?”
큰 결심은 맞는데⋯⋯. 오타비오는 납득이 되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갸웃, 기울였다.
‘연대보증인’이란 돈을 빌린 사람이 갚지 못하게 되었을 때, 책임지고 그 돈을 대신 갚아주는 자다. 즉 능력 있는 사람만 시키는 자리였다.
그런데 자기 명의의 재산이 있는 귀족인 매형도 아니고 그저 백작부인일 따름인 누나를 연대보증인으로 받아줬다고?
오타비오는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서 클레멘테가 들고 온 서류를 재차 확인했다.
거기에는 확실히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가주로 있는 콘타리니 가문에 4000 두카토를 대여한다.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가 이를 연대하여 보증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클레멘테의 말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바톨리니 백작부인은 남동생이 더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홱, 어음과 서류를 봉투째 낚아챘다.
오타비오는 어음이 찢어질까 봐 대경실색했다.
결국 그는 누나 앞에서 손아귀에 힘을 줄 생각도 못 했고 어음과 서류는 나비 날개처럼 날아 오타비오의 손아귀를 빠져나왔다.
“⋯⋯어, 얼른 가서. 가, 가주의 이, 인장.”
“아.”
“⋯⋯고, 공작부인 마음 바뀌시기 전에!”
“그, 그렇지!”
오타비오가 서재 금고에 둔 가주의 인장을 챙겨오기 위해 응접실을 허둥지둥 뛰쳐나가자, 클레멘테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사벨라와 단둘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이윽고 한마디를 던졌다.
“⋯⋯야, 약속은 지켜.”
그러나 이사벨라는 빼쭉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가져오기로 한 건 1만 2천 두카토 아니었어요? 고작 4천 두카토따위로⋯⋯.”
미니핀의 눈가가 곧장 매서워졌다.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판사판이었다.
“⋯⋯그, 그럼⋯⋯.”
이사벨라는 미니핀이 울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웃었다. 그러나 코너에 몰린 소형견은 의외의 반응을 했다.
“이 돈은⋯⋯. 없던 거로⋯⋯.”
클레멘테는 어음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벨라는 ‘어머, 이것 봐라’라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시누 형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클레멘테는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어깨에 걸칠 숄을 챙겼다.
‘어라?’
하지만 먼저 티를 내는 사람이 지는 거였다.
이사벨라가 험악한 얼굴로 클레멘테를 노려보는 가운데, 클레멘테는 착착 짐을 싸기 시작했고, 어음과 서류가 든 봉투를 겨드랑이에 꼈다.
이사벨라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야!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시누 형님 본인이 아닌 그녀의 남편이었다.
가주의 인장을 들고 헐레벌떡 돌아온 그는 짐을 다 챙겨서 일어서 있는 누나와, 그런 누나의 이름을 막 부르는 와이프를 발견했다.
“누, 누나? 어디 가?”
클레멘테는 남동생과 눈도 안 마주치고는 대답했다.
“⋯⋯나, 나는 보증 못 서니까⋯⋯. ⋯⋯고, 공작부인께 대출은 없던 일로 하시라고 말씀드려야겠⋯⋯.”
오타비오는 무슨 일인지 몰랐지만 무슨 일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이―사—벨—라—!”
어디서 많이 듣던 톤에 이사벨라는 깜짝 놀라서 기선 제압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아니,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와 톤만 같았지 내용은 아예 달랐다.
아버지는 자초지종이 확인된 후에야 호통을 치셨지만 이 남의 편이라는 놈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댁 편만 든다!
그러나 어음이 도망간다는 말에 기절초풍한 오타비오는 이사벨라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우리 누나한테 무슨 짓이야!”
미니핀은 자신의 동그란 눈을 놀랍도록 샐쭉하게 뜨면서 오타비오를 바라보았다.
“⋯⋯오, 오타비오. 원, 원금은 잘 있지?”
오타비오는 누나가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라고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돈 빌려오신 분이 하문하시는 것이니 고분고분 답했다.
“8천 두카토 이야기하는 거지? 원금은 당연히 잘 있어. 레무교도 상인한테 다 회수해서 가지고 돌아오라고 지시해 놨어. 이번 달 말까지는 올 거야.”
8천 두카토의 원금은 콘타리니 가문이 고리대금업에 쓰던 돈이었다.
갑자기 시장에서 돈을 거둬가니 지금 그 돈을 빌려 쓰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곡소리가 나고 있을 게 뻔했다.
“그, 그거랑 합치면 네 전 약혼녀에게 1만 2천 두카토⋯⋯. 다 갚을 수 있지?”
“왕궁 법정에서 결론이 뭐라고 날지 기다려야 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될 거야! 집행관이 와서 빨간 딱지 붙이는 건 면했어!”
클레멘테는 흥분한 오타비오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도도하게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자, 봐라. 내가 빌려온 게 1만 2천 두카토는 아니지만 콘타리니 백작가에 빨간 딱지가 안 붙게는 해 줄 구명줄 아니냐’라는 표정이었다.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와이프와 누나 사이의 긴장감을 눈치채지 못한 오타비오는 신나서 어음을 앞뒤로 뒤집어 보았다.
“잘하면 약간 남지 않을까? 설마 이자가 4천 두카토 꽉 채워 붙었겠어?”
클레멘테는 천천히 말했다.
“⋯⋯4, 4천 두카토는 루비나 공작부인께 10년 동안 갚으면 되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갚으면 좋⋯⋯. 그때그때 나한테 갚을 수 있는 만큼 가져와⋯⋯.”
사실 루비나 공작부인은 자신이 하는 걸 봐서 탕감해주시겠다고 했으니, 오타비오가 갚을 돈 만큼을 자기한테 넘기면 탕감받은 액수만큼은 꿀꺽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한테 불륜 꼬리가 잡힌 게 결국에는 돈이 모자라서 가정 생활비에 손을 대다가였는데, 이런 식의 쌈짓돈이 생긴다면 운신의 폭도 넓어진다.
기분이 좋아진 클레멘테는 특히 이사벨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그때까지 나랑 좋은 사이로 남았으면 좋겠어⋯⋯. 내, 내가 보증 안 선다고 하, 하면⋯⋯.”
클레멘테는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계, 계약서에⋯⋯. 공, 공작부인께선 10년의 기한을 무, 무시하고 바로 전액을 갚으라고 할 수 있다고⋯⋯.”
“아이고, 무슨 소리야 누나! 당연하지! 가족밖에 없다 진짜!”
오타비오는 이 난리통에서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은 이사벨라를 흘긋 째려보았다.
장인어른께 도움이라도 청해보러 가자고 했을 때 아내가 야멸차게 거절했던 것도, 아무리 딸이 먼저 안 굽히고 들어온다손 쳐도 그렇지 안부 연락 한번 먼저 안 하는 장인어른도 다 야속했다.
결국에 도움이 된 것도 클레멘테였지 이사벨라가 아니지 않은가.
오타비오는 누나의 손을 잡으며 못 박듯이 말했다.
“피 섞인 내 가족!”
* * *
“데 마레 백작님!”
아리아드네는 요새 성난 지아넬리 남작부인의 호출을 받는 게 일이었다.
피해 다니는 것도 정도껏이지 다 숨을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짜증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또 무슨 일이시죠.”
“RSVP율이 형편없어요!”
RSVP는 초대장을 받은 자들이 참석을 확약하는 절차였다.
참가 의사가 있는 사람은 초대장에 동봉된 꽃을 자신의 답장에 꽂아 초대해 준 호스트에게 다시 보냈고, 올 생각이 없는 사람은 무응답을 하거나 꽃 없이 사죄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가급적 꽃이 시들기 전에 답장하는 것이 예의였다. 이번 비앙카 공녀의 초대장에 동봉된 꽃은 노란 튤립이었다.
‘또야⋯⋯.’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RSVP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초대장이 발송되었던 첫날부터 난리를 쳐댔다.
치보 후작부인은 초반에 참석이 어렵겠다는 정중한 뜻을 밝혀왔는데, 그걸 가지고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한 시간에 가깝게 난리를 쳐 댔다.
치보 후작가가 타란토 공작가를 무시하는 거라는 둥, 남부 사람과 어울리기 싫다고 콧대를 세우는 거라는 둥, 초대장을 받고 나서 3일은 고민을 해야지 바로 거절의 답신을 보내는 건 예의가 없다는 둥.
그녀는 아리아드네가 끼어들 틈도 주지 않고 펄펄 뛰다가 아리아드네로부터 ‘치보 노후작부인이 돌아가신 지 며칠 안 되셨다, 그 집은 지금 상중이라 파티에 참가할 상황이 아니다’, ‘초대장을 아예 보내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예우의 차원에서 초대장 발송 리스트에 올렸지만 참석을 기대하고 보낸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듣자 민망했는지 입을 꼭 다물더니 조용히 떠나갔었다.
그렇지만 그 민망함은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비슷한 일이 계속 있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사람만 바꿔가며 난리를 쳐 댔고 아리아드네는 나중에는 남작부인에게서 도망다니느라 바빴다.
타란토에서는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티파티라도 연다고 하면 다들 하던 뜨개질 거리도 내던지고 허겁지겁 달려왔기 때문에 수도 상황에 안 익숙할 거라고 좋게 생각해주려고 했지만, 매번 터지는 호들갑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몹시 피곤한 일이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씩씩대며 외쳤다.
“이제는 말해야 하겠습니다. 이거 혹시 백작님께서 비텔리 부부를 초대했기 때문 아닙니까?”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내쉬며 재차 설명을 시작했다.
“수도 무도회의 RSVP율은 원래 낮아요. 타란토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 돼요, 지아넬리 남작부인. 한 5할 정도가 참석을 확정하면 평타고, 7할이면 큰 성공⋯⋯.”
“5할이 안 되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손님 명단을 아리아드네에게 불쑥 내밀었다.
초대장은 타란토 공녀 비앙카의 이름으로 나갔고 답장도 타란토 공녀에게로 보냈으므로, 아리아드네가 이 목록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님 명단을 넘기던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파리해졌다.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채 명단을 넘기고, 또 넘겼다.
“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요? 그 잘난 언변으로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세요, 백작!”
일단 제일 먼저 할 말은 ‘이걸 진작에 알려주셨어야지 왜 지금에 와서야 저한테 공유하시냐’였지만 그건 싸우자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비앙카 공녀의 무도회는 이틀 남았다.
지금 급한 건 지아넬리 남작부인과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비앙카 공녀의 무도회가 차질 없게 개최되도록 하는 거였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정말로 비텔리 부부 때문인가?’
아리아드네는 참석을 확약한 가문과 불참을 통보한 가문, 그리고 아직까지 참석 여부를 밝히지 않은 가문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을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 똑똑.
그때 방문에 노크와 함께 산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산차, 손님과 함께 있잖니.”
“급하신 일이라고⋯⋯. 시간이 많이 없는데 꼭 만나셔야 한다고⋯⋯.”
아리아드네는 곤란한 얼굴로 지아넬리 남작부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정말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흥!”
서재에 있는 지아넬리 남작부인을 뒤로 하고 나와 응접실로 들어간 아리아드네는 의외의 인물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크림색 후드 아래로 모래색 머리카락이 엿보이는 젊은 부인은 아리아드네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보자 비로소 후드를 벗었다.
“아리!”
“가브리엘레! 여기는 갑자기 웬일이야?”
몬테펠트로 후작가에 시집간 아리아드네의 친구, 가브리엘레 델라토레 백작 영애.
이제는 가브리엘레 데 몬테펠트로 소후작부인이 된 그녀가 거기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