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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23화 (323/733)

<제323화> 해결사

“아리⋯⋯. 난 빨리 돌아가 봐야 해.”

가브리엘레는 데 마레 가문의 응접실에 들어온 이후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이야, 가비.”

“미안해⋯⋯.”

가브리엘레는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 초대장을 받자마자 기쁘게 노란 튤립을 보냈다.

그녀는 가장 빠르게 참석하겠다고 회신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비앙카 공녀님의 무도회에는 참석을 못 할 것 같아.”

아리아드네는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브리엘레 데 몬테펠트로마저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빠진다니.

아까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건네주었던 목록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수의 나이든 부인들이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었다.

그런데 가브리엘레가 빠지면 이것으로 젊은 부인들의 이탈도 가시화되는 거였다.

가브리엘레가 빠지면 오지 않겠다고 할 젊은 부인들이 예닐곱 명도 넘었다. 아리아드네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인지 물어봐도 돼?”

그 질문에 가브리엘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질문이었다.

그녀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이곳에 왔다. 가브리엘레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같은 날짜에 파티가 하나 더 열리는 것, 알고 있어?”

아리아드네도 같은 날짜에 열리는 모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초대장을 보낸 노부인 한 분이 ‘그날 열리는 자선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라며 불참석 의사를 통보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펄펄 뛰었었는데,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들 같은 경우는 사실 오래 서 있어야 하는 데뷔탕트 무도회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답장을 보내온 분의 연세를 생각하면 보통 소규모로 앉아서 진행하는 티파티인 자선 모임을 데뷔탕트 무도회 대신 선택한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선 모임 아니야? 파티까지는 아니고.”

물론 약간의 위화감이 들기는 했었다.

그럴 땐 자칫 무도회 주최자와 티파티 주최자 사이에 싸움이 날까 배려하는 지혜로, ‘노령과 건강 악화’를 이유로 거절하고 낮에 소리소문없이 티파티를 해치워 버리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이다.

“낮에 하는 티파티 정도.”

“아니야.”

가브리엘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누가 들을까 봐 무서운 듯이 계속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재빠르게 속삭였다.

“발조 백작 부인이 여는 저녁 파티야. 처음에는 저녁에 여는 자선 파티라고 해서 아무도 안 간다고 했었는데, 그 뒤로 소문이 쫙 퍼졌어. 루비나 공작부인이 그 뒷배라는.”

“⋯⋯하!”

갑자기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 들어갔다.

노부인들 위주로 불참 의사를 밝히는 것, 초대장이 돌았던 초반에 참석 의사를 밝혔던 사람들이 이를 번복하는 것, 모두 루비나가 끼어 있다면 말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가브리엘레는 말을 이었다.

“이게 처음에는,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얼굴도장만 찍고 발조 백작부인의 파티로 옮겨 달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초대했었는데.”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방해용 파티를 연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설계했을 거였다.

제아무리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어도 타란토 공작가와 척을 지고 싶어 할 최초의 특공대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체자레 공작이 발조 백작부인의 파티에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막판에 돌면서 미혼의 딸이 있는 가문들이 발조 파티 쪽으로 확 돌았어.”

“하⋯⋯.”

“체자레 공작은 초반에만 잠깐 들렀다 갈 거라고. 머리 잘 썼지.”

백만 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들을 때마다 척추에 좋은 쪽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전율을 일으켰다.

‘이 만고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 같으니⋯⋯!’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혼처인 알폰소 왕자는 타란토 공녀의 파티에 참석하지만 딸을 둔 부모 입장에서 체자레 공작 쪽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을 단순비교하자면 정량적으로나 정성적으로나—특히 정성적으로, 왜냐하면 알폰소 왕자의 평판은 체자레 공작의 악명에 가져다 댈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당연히 왕자 쪽이 훨씬 훌륭하지만 접근 가능성이 문제였다.

알폰소 왕자는 십중팔구 군주 가문의 딸과 결혼할 테니 평범한 귀족 가문의 딸이 감히 범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체자레 공작이라면? 그의 난봉꾼적 명성에 비추어 볼 때, 여자만 마음에 든다면 하급 귀족이라도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었다.

자연히 결혼적령기의 여식이 있는 가문은 딸을 최대치로 치장시켜 체자레 공작이 몇 년 만에 나타난다는 그 희귀한 파티에 들이밀려고 했다.

“⋯⋯그게 충성 경쟁으로 번졌나 봐. 체자레 공작을 만나려면 이른 시간에 발조 파티에 가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타란토 파티에 안 간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니까, 루비나 공작부인 측에서 압박을 넣더라고.”

가브리엘레의 시어머니인 몬테펠트로 노후작부인은 원리원칙주의자인 남편과 달리 대세에 휩쓸리는 사람이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붙은 사교계 인사들이 ‘몬테펠트로 후작가는 타란토와 친하게 지내고 싶나 봐?’, ‘노후작부인, 제가 충심으로 말씀드리건대 저와 함께 발조 파티에 가요. 튈 필요 없잖아요? 남들 다 하는 대로 하는 게 최고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자 노후작부인은 금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타란토 파티에 가겠다고 회신한 새 며늘아기에게 타란토 파티 참석을 취소하고 자기와 함께 발조 파티로 가자고 명령했다.

“⋯⋯미안해, 아리.”

가브리엘레는 약간의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타란토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는 의사의 전달이었다.

사실 가브리엘레가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할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행사를 몬테펠트로 노후작에게 이르면 타란토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몬테펠트로 노후작은 대쪽같은 성정을 지닌 자이며, 루비나 공작부인의 입김에 레오 3세가 흔들리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노후작은 아내를 크게 혼내고, 며느리가 선약을 지키도록 해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브리엘레는 지금 새 며느리로서 몬테펠트로 가문에서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참이었다.

나이 많은 남편은 점잖고 그녀에게 다정했지만 확실히 사랑에 빠진 20대와는 달랐다.

그는 집안에 평화를 가져다줄 아내를 원했다.

죽은 그의 전처가 남기고 간 아이들은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새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했고, 시어머니는 젊은 새 며느리가 손주들을 괴롭힐까 봐 매처럼 눈을 부릅뜨고 살폈다.

이런 상황에서 가브리엘레는 아리아드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망칠 위험을 감수할 수가 없었다.

“⋯⋯미안. 난 이만 가봐야겠어.”

가브리엘레는 아리아드네를 볼 낯이 없었다. 그녀는 데 마레 대저택을 얼른 뜨고 싶었다. 직접 아리아드네를 만나러 온 것은 마지막 남은 양심 한 조각이다.

하지만 어떨 때는 본인의 참석보다 정보 한 줄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되는 법이다.

“가비. 이렇게 직접 이야기해주러 와서 고마워.”

“⋯⋯아리. 넌 너무 착한 것 같아.”

가브리엘레는 고개를 떨궜다. 아리아드네는 가브리엘레를 꼭 안아주었다.

“황달 걸린 사람 눈에는 세상이 다 노랗게 보인다더니. 착한 건 너야.”

* * *

아리아드네가 가브리엘레를 배웅하고 서재로 돌아가는 데에는 20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을 때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좀 많이⋯⋯. 화가 나셔서 돌아가셨어요.”

산차가 주눅이 들어 보고했다.

“말리려고 했지만 말릴 수가 없어서⋯⋯.”

“⋯⋯고생했어.”

산차 선에서 말리기는 어차피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지아넬리 남작부인과 같은 방에 있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달래는 데에 시간과 기력을 잔뜩 써야 했겠지만 달랜다고 뾰족한 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제 발로 돌아가 주면 오히려 좋은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뭐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겠지만, 비즈니스로 만난 사이는 비즈니스만 잘 풀리면 결국 다 좋은 사이가 되는 법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방법이 없을까⋯⋯. 타개할 방법⋯⋯.’

고민하던 아리아드네는 일단 비텔리 부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 * *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매일이 생일 같았다.

‘진작에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찰싹 붙었어야 했어!’

발조 백작부인을 위장막으로 내세워 연 자선 파티는 대성황이었다.

평소라면 클레멘테가 교류하기 힘들었을 내놓으라 하는 인물들이 초대장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먼저 연락해 왔다. 몬테펠트로 노후작부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착한 척 하며 갑질하는 맛은 정말 짜릿했다.

클레멘테는 본디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 1부가 끝날 때까지는 자기 남편과 불륜남들로만 홀을 채운 채 버텨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오금이 저리던 참이었는데, 지금 같아서는 도리어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가 레오 3세를 불러다 앉혀놓고 홀이 텅텅 비게 생겼다.

이것 역시 상상할 때마다 뇌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좋았다. 자기 기분만 좋은 게 아니었다. 그녀가 모시는 분의 기분도 좋았다.

- “폐하께서 격노하시지 않겠느냐! 호호호호!”

그 얘기를 들은 루비나 공작부인은 자지러지게 기뻐했다.

루비나는 옆에서 당황하는 척하며 국왕의 분노를 부채질할 생각을 하니 신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손님 대접이 소홀하다는 둥, 폐하께서 오실 걸 알면서도 하객을 이따위로 모아둔 걸 보니 폐하를 얕잡아보는 것이 틀림없다는 둥, 헐뜯을 말이 미리 준비할 필요도 없게 입에서 줄줄 나왔다.

- “클레멘테, 넌 다음 달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월요일부터 출근하도록 해라.”

그리고 바톨리니 백작부인에게는 이렇게, 루비나 공작부인의 수석 시녀 자리가 굴러들어왔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눈에 드니 떨어지는 떡고물이 장난 없었다. 괜히 수도 귀부인들이 루비나 공작부인 뒤에 줄을 서려고 난리를 치는 게 아니었다.

- “⋯⋯가, 감사합니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체면에 흠을 낸 데 마레 백작 아리아드네와 타란토 공작가가 혼쭐이 나고 나면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정상이 아니라 전보다 더 좋아질 것이다.

콘타리니 백작가가 진 빚도 탕감받을 것이고, 그래, 꼴 보기 싫은 이사벨라 역시 조만간 집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아주 재미있는 일을 준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 올해는⋯⋯. 일진이 좋아⋯⋯.”

방에 혼자 남은 클레멘테는 무해한 강아지처럼 밝게 웃었다.

일 좀 했다고 수석 시녀 자리에 4천 두카토라니, 정말이지 노동의 대가를 잘 쳐주는 일자리였다. 충성, 충성이다.

* * *

분노에 차 작별 인사도 없이 데 마레 대저택을 박차고 뛰쳐나온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향한 곳은 팔라지오 카를로였다.

정확하게는, 그녀는 알폰소 왕자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트루스칸 왕국에 단 한 명 있는 왕자는 만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비앙카 공녀의 유모에게도 그러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왕자를 당일에 알현하는 것에 실패하고, 연락을 남기고 집에 돌아와 공녀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한 다음에야 알폰소 왕자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왕자를 알현할 수 있었던 시간은 이미 타란토 공녀의 무도회 직전날이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 오랜만입니다.”

알폰소는 남작부인의 급한 알현 신청에도 화난 기색 없이 그녀를 맞이했다.

“무도회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요?”

“저하!”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예를 취하기가 무섭게 외쳤다.

“우리 공녀님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텅텅 비게 생겼습니다!”

의외의 말에 알폰소는 적지않이 놀랐다. 그는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재차 소리쳤다.

“저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녀는 텅 빈 무도회장과 상심한 타란토 공녀를 상상하자 너무 격앙되어 버렸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알폰소는 곧장 자리에서 뛰쳐나가 낙담한 중년의 유모가 쓰러지기 전에 그녀를 부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남작부인을 안심시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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