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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25화 (325/733)

<제325화>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 (2)

알폰소는 느릿한 걸음으로 곧장 비앙카와 아리아드네가 기다리고 있는 2층까지 당도했다.

그는 대기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육촌 여동생을 찾아 그녀의 헤드 드레스 아래로 드러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늦어서 미안. 많이 걱정했지?”

무도회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서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었던 비앙카는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에? 예?”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파우더룸 안쪽으로 뛰쳐 들어갔다.

“왕자님! 지금이라도 오셔서 참말로 다행입니다! 머리카락 만지시면 안 됩니다! 흐트러져요!”

“아, 미안해요.”

알폰소 왕자는 두툼한 손을 무도회의 파트너인 비앙카에게 내밀었다.

“이젠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자, 갈까?”

아리아드네는 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이 자기한테 하는 것처럼 들렸다.

동시에, 비앙카에게 내미는 알폰소의 손을 보며 순간적으로 가슴을 저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걸 자각한 그녀는 당황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아리아드네가 느꼈던 감정은 강렬한 질투심이었다.

알폰소와 비앙카는 그저 사이좋은 육촌남매에 불과하다는 팩트도, 더는 알폰소를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본능적인 북받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사이에 비앙카를 에스코트한 알폰소는 이 층을 유유히 가르고 지나갔다.

그는 일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참에서 멈췄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큰 왕자의 옆에는 턱 끝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 풍성한 깃털로 공작새를 연상케 하는 분장을 해 얼굴도 체형도 전혀 드러나지 않는 오늘의 데뷔탕트, 비앙카 공녀가 서 있었다.

우뚝 서서 아래를 굽어 내려다보는 왕자와 그 옆에 선 공녀의 모습에 일 층 무도회장은 일순 고요해지더니, 일제히 예를 갖췄다.

- “왕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예복과 드레스를 갖춰 입은 수십, 수백 명의 하객이 한꺼번에 무릎을 굽히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이 층의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혹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아예 무릎까지 꿇는 정식 예를 올렸고, 아리아드네 역시 살짝 무릎을 굽히며 예를 올렸다.

알폰소와 비앙카의 뒤편에서 예만 올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오늘 이 자리에 아리아드네의 파트너로 참석한 라파엘이 다가와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시뇨라, 우리도 갈까요?”

짐짓 장난스레 말을 걸어주는 라파엘 덕에 아리아드네는 비로소 얼굴에 억지 미소나마 띨 수 있었다.

“고마워요, 라파엘. 우리도 가요.”

라파엘은 은색 가면 아래로 부드러운 미소를 매단 채 아리아드네를 에스코트하며 앞으로 걸음을 뗐다.

하지만 조금 전에 보았던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그의 눈앞에 선연했다. 알폰소의 뒷모습을 좇는, 애달픈 그녀의 시선.

* * *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 백작부인은 발조 백작부인의 자선 파티장에 자신만만하게 서서 두 시간 전부터 손님들을 기다렸다. 집주인보다도 일찍 나온 거였다.

“바톨리니 백작부인, 좋은 일 하시는군요.”

그녀의 소싯적 정부(情夫)였던 디파스칼 백작이 디파스칼 백작부인과 함께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도 아는 체를 했다.

“바톨리니 노백작님, 훌륭한 부인 두셨습니다.”

백발의 노백작은 인자하게 웃으며 아내의 전 내연남에게 답례했다.

“천만의 말씀을요.”

디파스칼 백작은 승리의 기운이 서린 느끼한 웃음을 남긴 채 파티장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클레멘테! 오랜만이야.”

그 다음은 그녀의 소싯적 정부 2였던 바네데토 소자작이었다.

옆에는 어디에서 거리의 창부라도 끼고 왔는지 자선 파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젊은 여자가 웃통을 반 넘게 깐 채 매달려 있었다.

자작도 아니고 자작의 아들 주제에 스스럼없이 어엿한 백작부인의 이름을 불러대는 꼴을 본 바톨리니 노백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바네데토 소자작은 바톨리니 노백작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옆에 안은 여자와 낄낄대며 안으로 홀라당 들어가 버렸다.

“클레멘테, 많이 친한 사람이요?”

“⋯⋯아, 아니요!”

일단 부정하고 본 클레멘테는 친하지도 않은데 이름을 부르는 건 더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어릴 때, 친, 친구예요.”

그녀는 황급히 덧붙였다.

“⋯⋯교, 교회에서⋯⋯.”

바톨리니 노백작은 더는 추궁하지 않고 손님맞이에 열중하려고 했다.

기분 나쁜 일을 계속 생각해봤자 기분만 더 나빠진다. 문제는 손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다음 손님도 자기 아내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불손한 녀석이었고—노백작은 몰랐지만 그놈도 클레멘테의 불륜남 3이었다—그다음부터는 손님이 없었다.

“어머, 바톨리니 백작부인. 손님들이 좀 늦나 봐요?”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은십자 부녀회 멤버인 로레단 남작 부인이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홀이 애잔했다.

“⋯⋯그, 그러게요⋯⋯.”

“살바티 후작부인은요?”

“⋯⋯온다고 했는데⋯⋯.”

살바티 후작부인은 이 시간 현재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파티에서 알폰소 왕자에게 예를 올리는 중이었다.

“체자레 공작님은 안 오셔요?! 저는 그분 보러 왔는데!”

“⋯⋯하하하, 글쎄요⋯⋯.”

클레멘테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자선 파티장의 홀에는 클레멘테의 불륜남들과 은십자 부녀회 멤버들뿐이 없었다.

거기에 손님맞이는 끝났다고 판단한 그녀의 남편이 술잔을 들고 섞여 들어갔다.

‘맙소사!’

불륜남들 중 한 놈이라도 혀를 잘못 놀린다면 자기는 파멸, 또 파멸이다!

‘천신이시여 절 굽어살펴주시옵소서!’

남편한테 술을 잔뜩 먹일까? 음주대만취시켜서 필름을 끊어버리면 바로 집으로 실려 가지 않을까?

클레멘테가 잔뜩 머리를 굴리던 그때, 오늘 파티에 명의와 장소를 빌려준 발조 백작부인이 나타났다. 그녀 역시 텅 빈 홀을 보고 사색이 된 차였다.

“바톨리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발조 백작부인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추궁했다.

“흥행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자기가 그랬잖아! 체자레 공작은 도대체 어디 갔어!”

“⋯⋯그, 그게⋯⋯. 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면⋯⋯.”

클레멘테는 알고 있었다. 체자레 공작은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루비나는 단지 ‘체자레가 올지도 몰라’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녀는 확답을 준 적이 없었다. 루비나가 더 했던 이야기라고는 ‘네가 잘 소문을 퍼트려서 흥행에 기여해 봐라’ 정도가 끝이었다.

클레멘테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다만 클레멘테가 몰랐던 건 체자레 공작 대신에 나타날 남자가 누구인지였다.

“클레멘테!”

파티장 입구에 나타난 남자를 본 발조 백작부인의 눈이 둥그레졌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앞을 쳐다본 클레멘테는 눈이 커지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칠 뻔했다.

“⋯⋯카, 캄파 후작⋯⋯!”

그사이에 더 뒤룩뒤룩 살이 찌고 피부 가득히 화농성 여드름이 돋아난 캄파 후작이 그 자리에 있었다.

공단 예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캄파 후작은 어떻게 다른 놈들은 다 초대했으면서 나는 빼놓을 수 있냐고 따지러 왔다.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가 왕년의 불륜남들을 다 한자리에 모은다는 소문은 질 나쁜 신사들의 도박 클럽에서 단번에 퍼졌다.

다들 ‘한 번 더⋯⋯?’라던가, ‘여러 명이 모이는 광란의 파티?’ 같은 것을 기대하며 킬킬댔다. 그런데 캄파 후작 본인만 초대장을 못 받은 것이다.

심지어 그 파티에 남편도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캄파 후작은 다른 의미로 흥분했다. 이 막 나가는 여자가 드디어 엄청난 것을 준비하는구나!

거기에 파티 제목도 ‘자선 파티’라니 산 카를로에서 가장 미친 여자,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다웠다.

산 카를로의 모든 악덕이란 악덕을 다 섭렵하는 캄파 후작이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수도에서 제일가는 못된 놈’이라는 악명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문전박대당할 것을 각오하고 두꺼비 같은 실루엣을 실룩대며 달려왔는데⋯⋯. 캄파 후작은 파티장의 입구부터 당황했다.

분위기부터 진짜 선하고 신성했고, 파티장 사방에는 예사크의 곤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정갈하고 밝은 조명 아래에는 정숙한 드레스를 입은 나이든 부인네들이 맛없는 건강식을 씹으며 천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간간이 똥 씹은 표정을 한 클레멘테의 전 불륜남들이 끼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캄파 후작은 제대로 따질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크, 클레멘테?”

바톨리니 백작부인이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입가에 문 거품은 덤이었다.

* * *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는 대성황이었다. 알폰소 왕자가 산 카를로 사교계 전체를 몰고 들어온 지 삼십 분도 안 되어 레오 3세가 도착했다.

그는 무도회장을 굽이쳐 흐르는 과실주 수로를 보고 껄껄 웃으며 크게 만족했다.

외국 귀족과 상인계급이 대거 참석해 무도회에 새 얼굴들이 많았던 것도 국왕의 만족도에 일조했다.

레오 3세에게 그간의 산 카를로 사교계는 지나치게 심심했다.

유일한 난관은 데뷔탕트의 과실주 건배 때 엎드려서 수로에서 술을 마셔보려는 국왕을 말리는 일이었다.

그 부분을 무사히 넘어가자 그 이후로는 모든 게 술술 풀렸다.

레오 3세가 간만의 가면무도회를 매우 흡족해하며 자리를 떠나지 않자 루비나 역시 강제로 무도회 붙박이가 되었다.

처음 보는 치마폭들의 향연에 사방으로 돌아가고 있는 국왕의 눈을 감시하느라 지금 루비나는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알폰소 왕자가 몰이꾼을 자처해 잡아 왔으니 그럴 수도 없었겠지만, 만에 하나 루비나 공작부인이 자기 휘하의 귀족 부인들을 이끌고 무도회를 옮겨가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다.

소심한 비앙카는 적당히 모습을 드러낸 후에는 빠르게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엄격한 유모의 감시도 감시거니와 굳이 처음 마셔보는 술에 취한 채 파티장을 떠돌다가 애써 감춘, 예쁘지 않은 외모를 들키고 싶지 않았던 연유다.

모든 게 대충 정리되고 나서야 아리아드네는 칼날처럼 팽팽했던 긴장을 놓았다.

그녀는 구석 자리 의자를 찾아 들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손에는 과실주를 든 채였다.

그녀는 탄산이 있는 과실주를 단번에 털어 넣었다.

“아오, 쓰다.”

사전 테이스팅 때는 분명히 달콤한 술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 씁쓸한지 알 도리가 없었다.

순간 탑 같은 것이 시야를 가리며 그늘이 졌다.

“그만.”

두툼한 손이 쓱 들어와 그녀가 쥔 술잔을 빼앗았다. 아리아드네는 반사적으로 위를 바라보았다.

“술이 쓰면 그만 마셔. 오늘은 안 받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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