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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29화 (329/733)

<제329화> 붙잡다

데 마레 가의 마차는 팔라지오 카를로를 향해 날듯이 달렸다. 왕궁의 검문은 알폰소가 얼굴을 보임으로써 무사통과였다.

“왕자궁으로!”

겹겹이 쌓인 철문들이 마법처럼 열렸다. 평소 궁전 경호의 엄중함을 아는 아리아드네는 혀를 내둘렀다.

처소에 도착한 알폰소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곧장 당직 중인 기사를 찾았다.

“오늘 감시 당번은 누구지?”

무도회에 가지 못하고 당직을 선 또 하나의 불우한 남자는 베르나르디노 경의 부관, 데실리오 경이었다.

그는 그래도 사무실에는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데실리오 경은 넙죽, 자기가 유일하게 아는 자기보다 더 불우한 남자의 이름을 댔다.

“만프레디 경입니다, 저하.”

그러나 왕자는 농담따먹기 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알폰소는 짧게 지시했다.

“당장 불러와.”

데실리오 경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집무실에서 달려나갔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신속함과 달리, 그는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본인의 집무실에 자리 잡은 알폰소는 불편한 기색이 그득했다.

집무실에는 알현용 소파 외에는 아리아드네가 편하게 있을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방향을 흘끔거리며 기색을 살피는데 아리아드네는 엘코의 신병을 확보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남자는 눈치를 있는 대로 보는데 여자는 남자의 기분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약 20여 분 정도 흐른 후, 데실리오 경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알폰소는 대뜸 물었다.

“만프레디는 어디 있지?”

“그것이⋯⋯.”

데실리오 경은 난처한 표정으로 알폰소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알폰소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 “만프레디 경이 초소를 이탈했습니다. 주변을 다 찾아봤는데도 자리에 없어서⋯⋯.”

아름다운 레이디 앞에서 만프레디 경을 창피 주지 않으려는 데실리오 경의 사소한 배려였다.

알폰소는 만프레디 경이 자리에 없다는 소식에 화가 났지만, 본질은 만프레디 경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앞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네가 가서 엘코 경을 데려와.”

알폰소는 혹시나 데실리오 경이 실수할까 봐 덧붙였다.

“도주하지 못하게 엄중하게 감시해.”

왕자의 기색에서 뭔가 잘못된 것을 읽은 데실리오 경은 토를 달지 않고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그는 10여 분이 채 안 되어 사색이 되어 뛰쳐 들어왔다.

“저, 저하.”

이건 뭔가 잘못된 거였다.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엘코 경의 처소가 비어 있습니다.”

왕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욕설이었다. 일이 꼬였다.

그러나 알폰소는 거기서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바로 후속 조치를 지시했다. 야전 지휘관 출신의 노련함이었다.

“왕궁에 남은 인원을 당장 전부 내보내. 무도회에 나가 있는 놈들한테도 당장 복귀하라고 전달하고! 왕궁 내부 수색은 근위대에 협조 요청해! 꾸물대는 놈 있으면 내 이름 대고!”

데실리오 경이 정신없이 받아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 문밖에 대기하던 왕자궁의 시종이 무도회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알폰소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전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코를 찾아!”

사람들이 집무실에서 흩어져 바깥으로 달렸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요, 저하!”

헐떡이는, 하지만 경쾌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 쿵!

만프레디 경이었다. 그의 양손이 꽉 차 있던 관계로, 그는 발로 차서 집무실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지금 손에 든 게 있어서요.”

그가 손에 든 건 사람이었다. 정확하게는, 만프레디 경은 갈색 후드를 뒤집어 쓴 외팔이 남자, 그러니까 엘코 경을 두 손으로 질질 끌고 돌아왔다.

만프레디 경은 짐짝을 던지는 것처럼 엘코 경을 집무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엘코 경은 이를 악물고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은 채 충격을 참았다.

“야음을 틈타 외출하는 걸 잡아 왔습니다, 저하! 우리 친애하는 엘코 경께서 재미있는 곳에 들르셨더라고요?”

만프레디 경은 허리춤에서 대충 쑤셔 넣고 온 서류뭉치를 꺼내 바닥에 뿌렸다. 양피지가 화려하게 날렸다. 알폰소는 그중 한 장을 낚아채 살폈다.

종이에는 빼곡하게 에트루스칸 왕국의 동향과 정세, 식량 비축과 군대의 움직임이 적혀 있었다.

“갈리코인 평수사가 기거하는 집이라고 하던데, 집 안이 온통 외교 기밀문서로 가득했습니다.”

알폰소 왕자의 얼굴이 소름 끼치는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건 단지 왕자가 만프레디 경의 보고를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프레디 경은 바닥에 흩어진 양피지를 발로 찼다.

“저는 엘코 경과 오래 같이 지내 정이 깊은 사이입니다만.”

그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엘코 경 쪽을 바라보았다.

“이건 누가 봐도⋯⋯. 적과 내통하는 첩자 같지 않습니까?”

만프레디 경의 그 말에, 엘코 경은 민물에 해감하는 조개처럼 꽉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억울합니다!”

그는 하나 남은 눈을 크게 뜨며 토로했다.

“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제가 갈리코의 첩자일 리 있겠습니까!”

이 논리는 무적의 방패였다. 엘코 경 만큼 갈리코 왕국에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엘코 경은 걸출한 검사라는, 자신이 꿈꾸던 미래 그 자체를 잃은 것이다.

“그 수사는 제가 갈리코에 감금되어 있을 적 제 고해성사를 받아주었던 성직자입니다.”

왕자의 행정관으로 변신했다고 하더라도 엘코 경이 새로 얻은 장애와 함께 그의 소소한 행복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결혼도, 가정도, 자식도, 그가 은근히 드러내고는 하던 귀족의 여식을 배우자로 맞아 상류사회에 합류코자 하던 욕심도 모두 한낱 꿈으로 사그라졌다.

몸이 안 좋아진 이후로 엘코 경이 그전보다 더 열심히 성황당에 다녔던 것도 사실이었다.

“마침 그분께서 산 카를로에서 지내고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종종 만나던 것에 불과합니다. 배신이라니요.”

엘코 경의 볼을 타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는 눈물로 호소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충심만은, 충심만은 믿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집에 쌓여 있던 기밀문서를 제 눈으로 봤던 만프레디 경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우연히 친해진 사람이 우연히 이런 문서를 생성, 수집하고 있었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십쇼!”

알폰소는 차가운 눈으로 엘코를 바라보았다. 주군의 눈에 서린 냉기를 엘코 경 역시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재주가 없는 자는 모시는 사람의 심기를 살펴서 살아남는 법이다.

그는 재빠르게 바닥에 오체투지를 해 알폰소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평소였다면 이 정도에서 알폰소 왕자는 상대방을 만류하며 자리에서 일으켰을 것이다. 믿는다거나,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알폰소는 엘코를 얼싸안거나 부축해서 일으키는 대신 느린 말투로 이야기했다.

“난 이 필체를 본 적이 있어.”

엘코 경은 영문을 몰라 알폰소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알폰소 왕자가 지금 그를 믿지 않는다는 것.

“⋯⋯그대가 나에게 주었던 장부 중 하나가 이것과 꼭 같은 종이, 꼭 같은 글씨체로 쓰여 있었지.”

왕자는 양피지를 내밀었다.

“알파벳 a를 쓰는 버릇이 특이해서 기억에 남는군. 숫자 9와 분간이 가지 않게 적어서 맥락으로만 알아봐야 했거든.”

알폰소는 맹수가 으르렁대듯 이 사이로 숨을 내뱉었다.

“이건 내가 받은 군자금의 출처가 외드 대공이라고 자네가 주장하면서 나에게 줬던 장부와 똑같은 사람이 쓴 문서야.”

엘코 경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이 꿇어앉은 자리와 집무실 출입구까지의 거리를 속으로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도망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왕자한테 한 번 더 매달려보는 게 나을까?

“말해 봐, 엘코. 도대체 왜 갈리코 왕국과 내통한 거지?”

알폰소는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난 그대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호의를 다 베풀었어!”

그 말에 엘코의 얼굴이 우물우물 구겨졌다. ‘내가 베풀 수 있는 모든 호의’라는 말이 도망치려던 마음을 삽시간에 녹여버린 것이다.

알폰소 왕자가 그를 살뜰하게 챙겼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왕자가 오로지 그를 구하러 사지인 몽펠리에 궁으로 들어왔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안도감, 안타까움, 고마움, 다시 안도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경멸.

엘코 경은 울부짖었다.

“제가, 이 제가 왕자님을 배신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의 단어들이 흐느낌에 섞여 발음이 뭉개졌다.

“배신할 이유도 없고 배신해서 얻을 이득도 없습니다! 저는 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왕자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다 잃는 하찮은 미물인 것을요.”

엘코는 무릎으로 기어와 알폰소의 발에 매달렸다.

“솔직하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엘코 경의 진한 잿빛 눈동자가 맹목적으로 알폰소 왕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어 꺼낸 말은 눈으로 전달코자 했던 진실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도 속았습니다!”

엘코 경은 고해성사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폭풍처럼 쏟아냈다.

“갈리코인 수사가 간혹 저를 도와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연락책이 되어주기도 했고 제가 모르는 정보를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

그는 알폰소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처절하게 우짖었다.

“왕자님을 잘 보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기력으로 친다면 에트루스칸 왕국 제일이었다. 날고 긴다는 궁정 귀족들도 엘코 경만큼 진실한 척을 하지는 못하리라.

“다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손에 익지 않았습니다. 전 평생 검만 잡던 놈입니다, 왕자님. 궁정의 복잡함 같은 건 아무것도 모릅니다! 간신히 읽고 쓰고 덧셈 뺄셈만 하는 놈이 보급도 행정도 처리해야 하니 힘이 달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호베르 수사한테 물어봤을 뿐입니다!”

엘코 경은 도리질을 치며 왕자에게 매달렸다.

“그런 놈인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었다.

“한 번만,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왕자님! 저야말로 왕자님께 모든 것을 다 바친 놈입니다! 왕자님께서 잘못되시는 것을 추호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 제 모자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공격하기 어려운 사람은 약한 사람, 또는 약한 척을 하는 사람이다.

동정의 분위기가 방을 장악하고 있었다.

경험이 일천한 데실리오 경은 물론이요, 만프레디 경마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결정권자는 알폰소 한 명이었지만 대세 분위기를 거슬러 반대 의견을 관철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라도 어려운 일이다.

알폰소는 특히 타인의 의견을 두루두루 경청하고 결정을 내리는 덕장 스타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자기라도 나서서 그를 심문할까 했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엘코 경이 아예 자기 약점을 전면에 내놓고 동정심에 호소하니 분명한 증거 없이는 더 몰아붙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이는 알폰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그녀의 마음의 문제였다.

분위기가 자기에게 우호적으로 반전된 틈을 타 엘코는 탓을 할 상대방을 찾아냈다.

“제가 간악한 갈리코 놈들에게 속았습니다! 그래요, 저는 속은 겁니다! 그놈들이 또 우리를 속였다고요!”

그 말에 순진한 데실리오 경이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감히! 타국 왕족 근처에 성직자로 위장한 첩자를 붙여 놓다니!”

만프레디 경도 말은 하진 않았지만 은근히 설득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로서는 오늘같이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명확한 증거 같은 건 없었지만 어떻게든 알폰소를 설득해서 저 엘코 경이란 사람을 쳐내야 했다.

아리아드네는 저자가 금괴의 출처를 위조했을 뿐 아니라, 오가던 편지를 건드린 게 아닌지도 의심스러웠다.

편지만 없어졌다면 통신선에만 손을 썼다고 생각하는 편이 상식적이겠지만 10만 두카토의 지원금마저 출처를 세탁한다?

이건 상당한 규모의 세력이 있는 사람이 왕자의 곁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는 측근을 박아넣지 않으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결국 자기가 나서기로 했다. 왜 야밤에 도망쳤는지부터 추궁하면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알폰소의 눈에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 자신의 측근과 총애 경쟁을 벌이는 여자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여쁘게 앉아 있는 동안 옆 사람이 본인을 위해 손에 피를 다 묻혀줄 만큼의 복을 타고나지 못했다.

다 자기 손으로 해내야 하는 팔자가 그녀가 받은 운명이었다.

“잠깐만요.”

아리아드네가 반걸음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낭랑한 목소리가 좌중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저 ‘잠깐만요’ 소리는 그녀가 한 말이 아니었다.

“제가 뭐 하나만 좀 묻겠습니다.”

왕자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베르나르디노 경을 필두로 왕자의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알폰소 왕자가 보낸 소집령을 받고, 비앙카의 무도회에서 서둘러서 돌아온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서 있었다. 질문을 던진 것은 이 은발에 빨간 눈을 한 호리호리한 미남자였다.

“엘코.”

라파엘은 사람의 벽을 지나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엘코를 보게 되자마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슬프지도 않으면서 그만 좀 울부짖어. 자네 우는 소리가 집무실 바깥 100 피에디까지 울려.”

간단한 통박 이후에는 본격적인 취조였다. 라파엘은 냉소하며 물었다.

“갈리코에 속았다고 쳐. 너는 예전부터 머리가 나빴으니 그 무식하기 짝이 없는 놈들에게 속았을 수도 있겠지.”

이제껏 엘코는 ‘자신은 속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엘코가 했다고 확인된 일은 기껏 해봤자 갈리코 수사와 친하게 지내고, 갈리코 수사가 준 정보를 알폰소에게 전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니까 밝혀진 바로는 엘코 경이 한 일은 모두 수동적으로 ‘당한’ 것이었지, 자신이 능동적으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라파엘의 고변은 달랐다.

“갈리코에 속았으면 속은 거지, 내가 가져다준 편지는 왜 알폰소한테 전달 안 했어?”

아리아드네와 알폰소의 얼굴이 굳었다. 동시에 엘코 경의 안색도 시퍼레졌다.

그는 그 말을 듣고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시도했다.

“잡아!”

누구랄 것 없이 소리쳤다. 만프레디 경을 필두로 왕자의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를 붙드는 것은 간단했다. 엘코 경은 몸 양측의 균형이 맞지 않았고, 일단 엎드린 상태에서 일어나 달려야 했다.

선 채로 쫓아가면 충분했던 기사들은 손쉽게 엘코 경을 잡아 눌렀다.

엘코 경은 채 두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기사 대여섯 명에게 두 다리와 하나 남은 팔을 잡힌 채 벌레처럼 바닥에 결박당해 엎어졌다.

집무실 바닥에 납작하게 눌린 엘코 경을 내려다보며, 라파엘은 고고하게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편지에는 금괴의 유래가 적혀 있었을 거야.”

집무실에 모인 인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최대한 디테일을 빼고 전달하기 위해 고른 단어들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의 두루뭉술한 말을 듣자마자 그가 왜 저런 워딩을 선택했는지 알아들었다. 라파엘은 마침 옆에 있는 아리아드네에게도 확인했다.

“제 말이 맞지요, 데 마레 백작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습니다, 발데사르 소후작님. 제가 보낸 편지에는 금괴의 유래와 왜 그런 전달방법을 선택했는지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어요.”

라파엘은 자신의 추측이 맞아 기쁜 기색조차 없이 엘코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생각해 봤는데, 너밖에 없더라고.”

이쯤 되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알폰소가 모두를 대표해 물었다.

“⋯⋯도대체 왜, 갈리코 왕국을 도와 내 눈을 가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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