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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31화 (331/733)

<제331화> 알폰소의 판단

“엘코.”

알폰소는 집무실 바닥에 수분이 다 빠져나가 오그라든 나무뿌리처럼 달라붙은 엘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사크에 있는 내내 내 판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목적으로 내 서신에 손을 댄 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라파엘의 편지 한 통뿐이다.

나머지 서신은 갈리코 왕국 측에서 대부분 손을 댔고 엘코가 조력한 부분은 약 2할 남짓에 불과했지만 그는 굳이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

엘코 경의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갈리코 왕국의 첩자와 내통해 국가 기밀을 반출한 죄.”

전쟁터에서 왕자의 동향을 누설했다면 군사 기밀이고, 수도로 돌아온 후에 그랬다면 안보 기밀이다.

“털어놓고 싶은 내용이 더 있나?”

“⋯⋯저하, 이것 좀 보시죠.”

데실리오 경이 조심스레 알폰소의 주의를 환기했다.

만프레디 경이 주머니와 허리춤과 배낭에 마구잡이로 쑤셔넣고 온 종이뭉치를 꺼내 일일이 살펴보다가 뭔가를 찾은 참이었다.

“살인미수⋯⋯도 추가 같은데요.”

알폰소는 데실리오 경에게서 수첩 하나를 받았다. 그것은 갈리코인 수사가 본국에 보고한 편지를 날짜별로 요약‧정리해 놓은 노트였다.

데실리오 경이 펴서 알폰소 왕자에게 올린 페이지의 기술은 다음과 같았다.

「1027년 4월 12일. 데 마레 대저택의 하인을 매수해 시도한 ‘에트루스칸 여자’의 암살은 실패. 현지인이 사정에 더 밝으리라 생각, ‘꼬리’에게 후속 조치를 맡김.

⋯⋯(중략)⋯⋯

1027년 5월 18일. ‘꼬리’도 실패. 마차 축을 잘랐으나 대상이 조금 다치고 말았다 함. 당분간 몸을 사릴 예정.」

알폰소의 표정이 무시무시해졌다. 알폰소로부터 그 종이를 건네받아 읽은 라파엘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엘코, 본인 호칭이 ‘꼬리’인 건 알고 갈리코에 협조한 거지?”

엘코의 망자 같은 낯빛에도 미세한 수치심이 넘실거렸다. 그 말을 들은 만프레디 경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쓰고 버릴 취급인데.”

알폰소가 물었다.

“이 문서 작성한 수사는 어디로 갔어.”

만프레디 경이 보고했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내뺀 후였습니다. 엘코⋯⋯도 그쪽이 도주한 줄 몰랐던 것 같은 게, 잠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계속 문을 두드렸어요.”

그는 자랑스레 덧붙였다.

“물론 저는 그냥 문을 부수고 들어갔죠.”

라파엘이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한 2할 정도는 만프레디 경에게, 나머지는 공범이 도주하는데 사전 언질조차 받지 못한 엘코 경에게 하는 소리였다.

라파엘은 별말 안 하고도 듣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 줄 알았다. 타고난 재능이었다.

그러나 알폰소는 엘코가 아리아드네를 건드렸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올라 엘코에게 비아냥댈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원래의 알폰소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엘코, 자네의 나에 대한 이제까지의 헌신이 전부 다 거짓이라고는 생각 안 해.”

왜냐하면 엘코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알폰소를 위해 충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엘코는 알폰소의 명이 ‘남의 일’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에서 한끝 더 가지 않고 ‘에이, 이만큼만 하자’고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엘코보다 더 능력 있는 기사와 수하는 많았지만 이것은 아주 드문 장점이었다.

알폰소는—아리아드네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을 포함해서—엘코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런 조력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설령 그 전적인 투신에 사심이 들어가 있어도 알폰소의 고마워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냐하면 결과는 같으니까.

예전의 그였다면 이렇게 보내주었을 것이다.

- “떠나.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은 여기까지일세.”

하지만 알폰소는 엘코를 추동한 개인적인 욕심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더는 그 너그러움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감히⋯⋯. 감히⋯⋯!’

음심도 괘씸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 여자는, 살아 숨쉬는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알폰소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 아끼던 수하를 갈리코에 내줬고 결국 그 뒷수습을 하기 위해 갈리코 왕국에 제 발로 걸어갔다.

예사크에 끌려가 전쟁터에서 복무하면서도 그는 아리아드네의 원망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남자, 그것도 그의 철천지원수와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옆에서 돌봐주지 못한 스스로를 탓했을 뿐이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 행복에는 안전이 당연히 포함이다.

자기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매몰되어 그녀에게 해코지할 생각 따위는 꿈에서라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킨 그녀의 안위가 자신의 수하 손에 위협당했다고? 그때 봤던 그 상처가 엘코가 입힌 상처라고?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이 세상에 없을 뻔 했다고?

그것도 그녀가 엘코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알폰소는 저벅저벅 걸어가 엘코의 멱살을 잡았다.

“그 마차, 네가 한 짓이냐?”

엘코는 고통에 겨워 끅끅댔다. 숨이 막혀서 괴로운 건지 알폰소가 자신에 대한 혐오를 온전히 드러내 괴로운 건지 본인도 분간하지 못했다.

“나를 건드리는 건 용서할 수 있어.”

악문 잇새로 짐승의 그르릉댐 같은 분노가 새어나왔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를 건드려?”

그것도 마차에 손을 대다니 최악의 겁쟁이 같은 방식이다. 알폰소가 혐오하는 일이었다.

“난 널 가족같이 여겼다.”

알폰소는 형제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체자레는 같은 부친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점 외에는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니다.

서로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관계, 사랑이 기반이 되어 돌보고 감싸는 관계.

알폰소는 그게 자신과 자신의 기사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엘코가 가끔 드러내던 선을 넘는 간섭도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선해해서 넘어갈 수 있었다. 가족은 남보다 가까우니까.

그는 집무실 바닥에 쓰러진 엘코 경을 경멸의 눈으로 쏘아보았다.

“내 사람 보는 눈은 발바닥 밑에 있구나.”

알폰소는 집무실 벽에 걸려 있던 장검을 검집째 꺼내 들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양손 대검이었다.

그 검은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지만 너무 큰 나머지 실전용이 아닌 장식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알폰소는 그 검을 한 손으로 가뿐하게 집어들었다.

“!”

알폰소 왕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일행의 표정이 변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라파엘 데 발데사르 정도를 제외하면 기사들은 대부분 다 조금씩은 동요하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어찌 되었건 전쟁터에서 엘코 경과 고락을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적죄를 저지른 군인을 즉결처형한다는데 거기에 이견을 제시할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알폰소를 멈춘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잠시, 잠시만요⋯⋯.”

알폰소를 멈춰 세운 건 아리아드네였다.

알폰소는 그녀가 사람이 죽는 모양을 보는 게 겁이 나서 그러는 줄 알고 만프레디 경에게 턱짓을 했다. 모시고 나가라는 신호였다.

만프레디 경이 아리아드네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서자 아리아드네는 손으로 그를 막았다.

“우윽.”

아리아드네는 밀려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았다. 코앞에서 사람 목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울렁이는 것도 일부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가 토기를 느끼는 주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엘코는 지난 생의 그녀와 사물과 그 그림자처럼 똑 닮았다.

아무도 바라지 않은 헌신. 돌려받았으면 하는 마음. 헛된 기대. 돌아오지 않는 대가. 날려버린 나의 투자. 배신감, 열패감, 분노, 증오.

아리아드네는 엘코의 심리를 파헤치며 역겨움을 느꼈다.

그래서 엘코와 자기가 같은 원리로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머리통을 둔기로 맞은 것 같았다. 체자레는 당시의 내가 얼마나 미웠을까.

- “인간은 원래 죄를 지으면서 살아요. 그래서 인간이야.”

아리아드네가 가장 힘들었을 적, 라파엘이 해 주었던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기가 퍼트린 흑사병 때문에 갈리코 왕국의 국민들이 수수깡처럼 죽어 넘어갈 때에도 그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 “나는 타인을 단죄하고 싶을 때 항상 나의 죄를 떠올려요. 나는 과연 깨끗한 자인가, 나는 저 사람에게 당당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 엘코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는 양심의 질문에 대한 아리아드네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녀는 행동의 동기에서도, 행동의 결과에서도 엘코보다 깨끗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일반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리아드네 본인이 저지른 짓은 엘코가 하려던 짓보다 더 어마어마하다.

본인조차 살아 숨 쉬고 있는데, 그녀 같은 사람도 살아 있을 자격이 있다면 실제로 노린 사람을 죽이지도 못한 엘코 정도면 충분히 두 번째 기회를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어떠한 악인이라도 갱생의 가능성이 있다면 속죄의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리아드네는 원체 동정심이 특출나게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기의 일과 데칼코마니 같은 상황이 펼쳐지자 평소보다 공감이 깊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런 그녀조차도 ‘엘코 경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줘보자’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이 알았다. 왕자의 최측근으로 예사크 부대의 행정을 담당했었다.

에트루스칸 왕국 최정예 부대—실질적으로 유일하게 멀쩡한 중앙군—인 왕자의 기사단을 속속들이 파악했고 알폰소 왕자의 개인적인 버릇, 속내와 관심사, 습관과 루틴까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왕궁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위인인 것이다.

“재판은⋯⋯. 재판이라도⋯⋯. 속죄의 기회를⋯⋯.”

그녀는 자신 없게 중얼거렸다. 재판을 가더라도 엘코는 아마 사형선고를 당할 것이다.

엘코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게 레오 3세나 루비나 측에 의해 정쟁으로 발전할 경우뿐이다. 알폰소 입장에서는 끔찍한 시나리오다.

“⋯⋯미안해요.”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못 들은 걸로 하세요.”

“⋯⋯아리.”

알폰소가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러는지는 알고 있어.”

그는 차분한 청회색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마 엘코 경에 대한 죄책감이 드는 것일 테였다. 자기 때문에 인생을 날린 남자니까.

여기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무르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는 참 착해서 문제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네가 원해도 이건 어쩔 수 없어. 이건 내 판단이다.”

알폰소는 지금 도리어 머리가 맑게 깨어나고 있었다.

분노가 한 꺼풀 가시고 나자 엘코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인지 실감한 것이다.

“반성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

투박하지만 핵심을 꿰뚫은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어. ⋯⋯그리고 난 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야.”

국가의 최종 사법권은 국왕에게 있었다. 알폰소는 미래의 에트루스칸 국왕이다. 또한 기사의 생명여탈권은 그 주군에게 있었다.

알폰소가 아직 왕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충성의 맹세를 받은 기사의 주인으로서 엘코의 목숨을 거둘 권한이 있었다.

“내 판단을 믿어.”

엘코가 훔친 것은 알폰소의 사적인 편지였다.

그의 주군의 귀에 속삭인 것은 연인관계의 이간질이었을 뿐이고 그가 훔쳐서 반출한 기밀은 밝혀진 바로는 알폰소의 개인적인 사안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엘코가 훔친 것이 군사문서였다면? 적군의 규모는 얼마이고 어디로 행군하고 있다, 귀관의 부대는 어디에서 응전해라, 본대는 이러저러한 규모로 언제 지원할 것이다 같은 내용에 손을 댔다면? 알폰소와 그의 부대는 몰살이었다.

부대만 몰살인가? 침략전쟁이 아니라 방어전쟁이었다면 그 지역에 사는 백성들도 다 함께 참담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약탈과 방화는 승자의 권리였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 엘코를 풀어놨을 때, 그가 선량하게 사회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알폰소는 칼자루를 꽉 쥐었다.

“내 판단은, 아니야.”

- 스릉!

검집에서 칼이 나오는 소리였다. 그리고 엘코의 목이 떨어지는 소리는 그와 거의 동시에 들렸다.

- 툭!

엘코의 수급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피가 분수처럼 사방에 튀겼고 깨끗하게 잘린 목의 단면에서 혈관이 수축하며 빠져나가는 생명의 기운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몸부림쳤다.

다 허망한 발버둥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 투둑.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자신이 왜 우는지 그녀 자신도 몰랐다. 어딘가 홀가분했다. 한 챕터의 끝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희고 가는 손이었다. 그녀는 위를 바라보았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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