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라파엘의 고백
“일으켜 줄게요, 아리.”
라파엘은 주저앉은 아리아드네에게 곧장 손을 내밀었다. 다소 급한 행동이었다.
그는 원래 이렇게 성마른 사람이 아니었다. 성격이 급한 것과 별개로, 최소한 숙녀가 힘들어할 때 잠자코 기다려 줄 정도의 매너는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이 라파엘답지 않은 행동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과연, 그의 얼굴에는 결연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아리. 저와 잠시 대화 좀 해요.”
그는 빠르게 덧붙였다.
“⋯⋯할 말이 있어요.”
이쯤 되자 아리아드네뿐만이 아니라 그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분위기가 뭔가 예사롭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만프레디 경이었다.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는 슬금슬금 알폰소의 책상 쪽으로 가서 왕자의 의자 옆 작은 스툴에 엉덩이를 걸쳤다.
왕자가 후작을 터는 것도 못 봤고 무도회도 못 갔는데 이것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알폰소는 만프레디 경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자리에 굳건히 섰다. 그는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저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것 같은데 고지를 점유하고 계속 째려봐줘야 말을 못 꺼낼 것이다.
왕자가 눈에 힘을 주는데도 대범하게 상황을 정리할 양식과 배려가 있었던 건 역시 원숙한 베르나르디노 경뿐이었다.
- “나와.”
그는 만프레디 경의 귀를 잡아당기면서 속삭였다.
- “아야!”
만프레디 경은 숨죽인 채로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불만을 표시했다.
- “왜 잡아당겨요!”
- “이럴 땐 나가는 게 예의야.”
만프레디 경을 물리적으로 제압해서 집무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던 베르나르디노 경은 중간에서 알폰소 왕자도 잡았다.
- “나가시죠, 저하.”
베르나르디노 경은 알폰소 왕자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왕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력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함을 깨달은 디노 경은 알폰소를 을렀다.
- “아, 신세 졌으면 갚아야죠! 오늘 라파엘 아니었으면 엘코는 지금 여전히 우리랑 같이 서 있었을걸요?”
알폰소는 끄응, 신음을 냈지만 여전히 디노 경의 손길에 무거운 발뒤꿈치로 저항하고 있었다.
디노 경은 전략을 바꿨다. 중년의 기사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알폰소 왕자를 쳐다보았다.
- “왕자님. 이게 될 일이면.”
그는 라파엘과 아리아드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 “온 산 카를로 백성들이 와서 구경하고 있어도 될 거고요.”
알폰소의 머릿속에서 축하의 종이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에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앞 광장에서 껴안고 키스하는 라파엘과 아리아드네가 스쳐 지나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디노 경은 알폰소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말을 마저 이었다.
- “안 될 일이면 반딧불이 만 마리가 날아다니는 로맨틱한 정원에서 장미꽃으로 휘감아놔도 안 될 겁니다!”
디노 경은 다시 한번 꿈쩍도 안 하는 알폰소 왕자를 잡아끌었다.
- “여기 서서 구경하면 모양이나 빠지지!”
그 말에 비로소 알폰소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리아드네 앞에서 모양이 빠지다니, 안 될 말이다.
- “염치까진 바라지도 않을 테니 체면 좀 챙기세요!”
염치와 체면 소리까지 나오자 알폰소 왕자는 마지못해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몸을 맡겼다.
알폰소 왕자와 만프레디 경은 나란히 함께 끌려나갔다.
가장 큰 장애물 둘을 처리하는 데에 성공한 디노 경은 나머지 기사들은 손쉽게 제압했다.
부라리는 눈짓과 뻥뻥 차는 발길질 몇 번이면 끝이었다.
- “눈치 없는 놈들, 나가, 나가자고! 그리고 저것도 치워!”
디노 경이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엘코의 시신과 수급이었다. 기사들이 우르르 달려가 죽은 사람을 수습해 천으로 덮어 들고 나갔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주변에 있는 천으로 피도 닦아냈다. 그들에게 죽음은 일상이었다.
코앞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건, 전쟁터를 겪은 자들은 웃고 떠들고 식사할 수 있었다.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귀를 잡혀 끌려나가면서 만프레디 경이 깐족거렸다.
- “그런데 디노 경, 이렇게 빠삭하게 잘 알면서 왜 본인 장가는 못 갔어요?”
디노 경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만프레디 경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아야, 아야, 아야야야야 내 귀야!”
이렇게 그에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 장내를 비워준 베르나르디노 경 덕분에 라파엘은 드디어 아리아드네와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
라파엘의 눈에 미처 깔끔히는 지우지 못한, 사방에 튄 피가 보였다. 거슬렸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돌려세워 그녀가 그나마 깨끗한 쪽 실내를 보도록 했다.
그리고 그게 제일 먼저 한 것은 사과였다.
“⋯⋯아리. 아까 선 넘어서 미안해요.”
아리아드네는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어안이 벙벙하게 되물었다.
“네? 무슨?”
“⋯⋯무도회장에서. 제가 지나치게 참견한 것 같아서요.”
“⋯⋯아.”
그제야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비앙카 공녀의 무도회장을 떠난 이후로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무도회장을 떠날 때의 난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담담히 이야기했다.
“당신이 누구와 이야기하든, 누구와 단둘이 있건, 내가 참견할 내용은 아닌데.”
남자친구도 아닌 그냥 친구는 그런 발언권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라파엘은 그렇다고 씁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놀랍도록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뭐라도 되는 양 굴어서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라파엘의 이 각 잡힌 사과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도리어 거기서 제가 라파엘을 전혀 챙기지 못했는데도⋯⋯.”
좋아하는 여자가 자기 눈앞에서 자신을 버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와 손을 잡고 떠났다.
“⋯⋯그랬는데도 도와주러 오셔서 고마워요.”
지금 막 엘코의 일을 겪은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이 어떤 감정적 혼란을 겪고 그녀와 알폰소를 도와주러 온 건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면 그렇게 못 했을 텐데. 대단하고, 또 고마워요.”
이건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그러나 되레 라파엘은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아리아드네였다면 애초에 선을 넘지도 않았을 거고, 그 자리에서 싸움 없이 더 훌륭하게 조율해냈으리라 확신해요. 당신은 욕심 없고 현명하니까.”
그 말에 아리아드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라파엘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리.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정의롭고, 용감하고,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말에 아리아드네의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기뻐서가 아니었다. 말도 못 하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라파엘은 상관없이 말을 이어갔다.
“아리. 진지하게 이야기할게요. 저는 사실 살면서 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싶은 사람을 거의 못 만나봤어요.”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여자로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의도치 않게 엄마와 여동생의 험담을 해버린 라파엘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주 진지하게 말을 마저 이었다.
“당신의 의견이 궁금하고 당신과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요. 당신이 그려낼 그림이 알고 싶고 당신과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완벽한 항해가 가능할 것 같아요.”
그는 잠시간의 침묵을 가졌다가 물었다.
“⋯⋯나와, 함께해줄 수 없나요?”
거기에 대한 아리아드네의 대답은 아주 쓴 너털웃음이었다.
“세상에 ‘완벽’이 어디 있을까요?”
완벽한 사람이라니, 그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다. 라파엘 데 발데사르는 심지어 인간의 한계를 아주 좁게 설정해 놓은 남자다.
그는 타인에게, 아니, 인간이라는 종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인간이 아주 연약하고 불완전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기 형인 펠리시아노와의 일화에서 고백한 내용에서 유추해보자면, 그는 본인 자신조차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이런 극찬을 그녀에게?
“라파엘. 좋게 보아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그리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결코 아니에요.”
라파엘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변했다. 이건 그가 용납할 수 없는 겸양이었다.
“난 당신의 넓은 시야과 사려 깊음을 계속 보아 왔어요. 게다가 그 번득이는 천재성! 어떻게 그렇게 굽이굽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지혜롭고 기발한 해결책을 찾아낼까요! 당신이 훌륭하지 않다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아리아드네는 고소(苦笑)를 짓는 것 외엔 할 말이 없었다.
라파엘이 본 그녀의 모습은 두 생애를 살면서 단련된, 닳고 닳은 베테랑의 모습이다.
같은 게임을 여러 번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초심자보다 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리아드네가 아슬아슬하게나마 점유하는 현재의 위치는 타고난 천재성이 아니라 두 번 산다면 누구나 도달하게 될 숙달의 경지에 불과하다.
최소한 그녀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난 일생토록 내 원래 모습을 숨기려고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질하며 살겠군요.’
그녀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환상을 사랑하는 남자와는 평생을 함께할 수 없었다.
자기 스스로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서 사랑받으려고 몸부림치는 삶은 두 번은 사양이었다.
불편한 옷—이사벨라처럼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옷—에서 천재 소녀라는 좀 덜 불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뿐이지, 그게 맨몸이 아닌 것은 매한가지였다.
아리아드네는 오랜 침묵 끝에 말했다.
“⋯⋯미안해요.”
라파엘은 가볍게, 최대한 가벼우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예상하였던 답이었다.
라파엘 역시 엘코를 보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의 추악한 속내에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자신과 엘코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비교조차 할 생각이 없었다. 질적으로 달랐으니까. 그
러나 여자가 원하지 않는 호의를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남자로 봐 달라고 주변을 맴돈다는 핵심은 라파엘 본인 역시 엘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언제나 고고한 라파엘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는 아주 오래 망설이던 그가 행동할 결심을 하게 해 주었다.
그가 엘코와 다르게 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의사를, 그녀의 결정을 존중해 주기. 그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받아들이기.
라파엘은 아리아드네의 장갑 낀 손을 잡아 올렸다. 그가 아리아드네의 붉은 흉터를 보고 모르는 척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그녀를 부정했었던, 완벽한 그녀만을 인식 속에 넣고자 했었던 그가 저지른 오류 아니었을까.
모든 걸 망친 시초가 그 손에 있다는 걸 라파엘은 알 듯 말 듯했지만 끝내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이 손을 진작에 있는 그대로 잡았다면 오늘의 이 결론은 다르게 나지 않았을까, 하는 직감 정도만 느꼈을 뿐이다.
그는 그 손에 키스했다.
“당신이 밟는 모든 디딤돌 위에 천신의 영광 있으리.”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