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알폰소가 내민 손
“힘들고 어려운 길일 거야.”
아리아드네의 신분은 벼락 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평민과 다름없는 처지에서 나아진 게 그랬다.
어느 모로 보아도 데 카를로 왕가처럼 고대 라탄 제국 언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계도의 왕실과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는 혈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날 택해 준다면.”
그녀가 그를 택해 준다면. 그를 믿고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져 준다면.
그는 두툼한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준다면.”
한때는 그녀를 위해 놔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한 번 놓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알폰소가 5년여를 빙빙 돌며 느낀 것은 자신은 그녀 없이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사실, 그것 하나뿐이었다.
“내가 먼저 네 손을 놓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손을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크고, 두껍고, 마디마디가 튀어나왔고, 굳은살과 흉터로 뒤덮인 손이었다.
곱고 하얀 소년 왕자였던 시절로부터 그가 걸어온 세월이 그 오른손 하나에 모두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오기 위해 싸우고 다친 손이었다.
“⋯⋯.”
아리아드네의 눈에 눈물이 글썽대며 차올랐다. 복잡한 감정으로 차오르는 눈물이었다.
그의 다친 손을 보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던 과거의 자기가 생각나서 가슴이 아리기도 했다.
알폰소가 라리에사 대공녀와 타란토의 여름 궁전으로 떠나던 날, 자신을 데리러 올 마차를 한없이 기다리던 그 늦가을의 오후를 기억한다.
그가 갈리코 왕국으로 떠난 이후, 답장 없는 편지를 쓰고 또 쓰며 그는 자기를 어떻게 잊은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수많은 밤을 기억한다.
분수에 넘치게 ‘황금의 왕자님’, 알폰소 데 카를로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의 가슴이 찢어지던 그 수많은 날을 기억한다.
“⋯⋯바보, 바보같이.”
그녀는 알폰소가 내민 손을 외면했다. 대신 바로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알폰소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받아 안았다. 여자의 향기가 훅 끼쳤다.
밤새 뛰어다니느라 땀이 날 법도 했는데 아리아드네의 체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콤했다.
알폰소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아리아드네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는 한동안 훌쩍임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중얼거렸다.
“물어보긴 뭘 물어봐, 바보⋯⋯.”
그냥 내가 눈 감은 상태에서 네가 끌고 가면 오죽 좋아. 선택권이 주어지면 양심 앞에서 갈등해야 하잖아. 이 바보.
그녀는 알폰소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었다.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신분뿐만이 아니라 품성에서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욕심을 내 보고 싶었다. 두 번의 인생에서 단 한 번쯤은 양보하지 않고, 가성비와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원하는 것을 덥석 쥐고 싶었다.
그녀는 이제는 알폰소의 신분과 부귀영화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순간만큼은 왕자비가 되어 이사벨라 앞에서 으스대는 것 따위는 그녀의 인생 소망 목록에서 저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저 이 따듯한 남자의 손을 잡고 눈치 보지 않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품 안에 안긴 채 생각했다.
만일 내가 한 이 선택이, 이 이기적인 선택이 황금률에 의해 그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아리.”
아리아드네의 대답을 듣고 나자 알폰소의 얼굴에 아주 큰 미소가 걸렸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안은 팔에 꽉 힘을 주었다.
큰 키의 아리아드네였지만 알폰소의 품 안에서는 그의 반토막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고는 두 손으로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꺅!”
아리아드네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느라 훌쩍임을 멈췄고 알폰소는 그녀를 허공에 들어 올린 채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예전, 치보 후작가의 수국 정원을 생각했다. 어린 소년이 소녀를 들으려면 있는 힘을 다해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 아리아드네의 허리는 너무 가냘파 그의 두 손안에 쏙 들어왔고 전장에서 휘두르던 이민족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대검에 비하면 그녀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때는 원할 때 그녀를 껴안고 내킬 때 사랑하는 마음을 자유로이 고백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이제는 가능하다.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네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줄게.”
그는 그녀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쓰시던 왕비의 관, 너에게 잘 어울릴 거야.”
“그만 돌려!”
아리아드네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왕관까지 가기도 전에 지금 당장 한 머리 장식이 다 날아가겠어!”
알폰소는 명료한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모든 것이 기꺼웠다. 그녀가 내리라면 내리고 들으라면 들고 죽으라면 죽어줄 수도 있었다.
그가 그녀를 끌어내려 다시 품 안에 안으려던 차에—순순히 땅에 내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들을 멈췄다.
“저기⋯⋯. 방해 죄송합니다. 데 마레 백작님께 중요한 전갈이 있어서요.”
그들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베르나르디노 경이었다.
“궁전 밖에서 백작님을 찾으시는 분이 계셨는데 급한 일 같아서 제가 우선 출입명부에 기재 안 하고 쪽문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디노 경은 자기 망토를 덮어씌워서 데리고 들어온 사람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아 비척댔는데, 디노 경이 그 사람을 잡아 살뜰히 망토를 벗겨 주었다.
디노 경의 망토 아래에서 나온 사람은 산차였다.
“아가씨!”
디노 경과 산차의 출현 덕에 간신히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아리아드네는 황급히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산차!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산차도 디노 경의 망토 때문에 머리가 엉망이었다. 그렇지만 산차는 자기 주인과는 달리 머리 따위에는 신경조차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가씨, 큰일 났어요!”
“큰일?”
아리아드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산차는 숨도 못 쉬고 외쳤다.
“이폴리토 도련님께서 엄청난 사고를 치셨어요!”
“뭐?”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치면 이 야밤에 왕궁까지 와서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이폴리토의 간수는 사실 데 마레 추기경의 일이었다.
추기경 혼자서는 커버가 불가능할 정도의 사고를 친 건가?
“아버지께서 널 보내신 거야?”
산차는 알폰소 왕자와 베르나르디노 경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지금 꼭 가봐야 해?”
야간에 궁에 들어오는 것도 큰일이지만 다시 나가는 것도 큰일이다.
아리아드네는 인적사항을 적고 어째서 사전 약속 없이 왕궁에 들어오게 됐는지 해명할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파 왔다.
산차는 여주인의 눈치를 보아하니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상 그녀를 데리고 나가기 어려울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리아드네에게 딱 붙어서 귓속말을 했다.
- “⋯⋯해서⋯⋯. 추기경께서는 아직 모르시고⋯⋯. 빨리 아가씨께서 가보셔야⋯⋯.”
아리아드네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그녀가 물었다.
“⋯⋯이 일에는⋯⋯. 알폰소, 아니 왕자님께서 함께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산차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리아드네도 수긍했다.
“⋯⋯그럴 수 있지. 본인이 원한다면 그래야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알폰소를 보았다.
“나,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알폰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까다로운 종류의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여자친구를 그런 곳에 보내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가족사라니 안 보내 줄 재간이 없었다.
“내가 같이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알폰소가 제의했다.
“아무래도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아리아드네가 가장 먼저 ‘알폰소를 데려가는 게 어떠냐’고 물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는 그녀의 판단을 믿었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도움이 필요해지면 내가 꼭 얘기할게.”
이렇게 나온다는데야 방법이 없었다.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조심하고.”
“응.”
이 한 쌍의 딱 붙어 있는 모양새에 베르나르디노 경이 혀를 찼다.
“아주, 숨기지도 않아요 이제.”
산차도 물었다.
“어, 저분들 언제부터 저러신 거예요?”
주인의 연애를 까맣게 몰랐다는 데에 자존심이 적잖이 상한 눈치였다. 디노 경이 대답해 주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도리가 없습니다만 약 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니까, 한 삼십 분 전부터 사귀신 분들 주제에 지금 저러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그렇죠. 참 스스럼도 없지. 보는 노총각 슬프게.”
어이없어하는 디노 경과 배신감에 떠는 산차에는 아랑곳없이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껴안았다.
“진짜, 몸조심해야 해?”
도리어 질색을 하는 것은 아리아드네였다.
“우리 집인데 몸조심은 무슨!”
그녀는 알폰소를 밀어냈다.
“금방 다녀올게!”
그러나 그 빈틈을 놓칠 디노 경이 아니었다.
“허, ‘다녀온다’니, 여기가 집이고 저택은 일터인가요? 이거 벌써 신접살림은 왕궁에 차리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아가씨의 명예라면 눈에 불을 켜고 지키는 산차는 평소라면 베르나르디노 경에게 한소리 하고도 남았겠지만,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아리아드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아가씨 마음이 떴나 봐요⋯⋯.”
아리아드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외쳤다.
“말이 헛나온 거야! 가자!”
이 모든 상황을 보며 알폰소만 속없는 표정으로 싱글싱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 * *
아리아드네가 왕자궁의 쪽문을 통해 왕궁 밖으로 나가 데 마레 대저택을 향해서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을 때, 이제는 파티의 주인공도 떠나고 손님들도 대부분 사라진 타란토 공녀 비앙카의 파티에 퇴폐적인 분위기의 젊은 남자 하나가 음산한 표정을 지은 채 등장했다.
무도회장에 남은 손님은 대개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자라도 그 남자를 확인하고는 제 눈을 의심했다.
술이 번쩍 깬 사람도 있었고, 자기가 술에 취해 헛것을 본 건가 눈을 비빈 사람도 있었으며, 이 남자를 본 것이야말로 이번 달 최고의 소식이라며 내적 비명을 지른 사람도 있었다.
젊은 남자는 술이 강물처럼 흐르는 무도회 장식을 쓱 훑어보고는 꼿꼿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모두가 취해 있는 무도회장에서 그만이 맨정신인 경우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는 계속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았다.
무도회장 가장 안쪽까지 가면서도 목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는 무도회장 중앙에서 가장 술에 덜 취한 것 같은 사람의 멱살을 붙들고 물었다.
“어이.”
“예, 에에?”
수도의 하급 귀족인 상대방은 말을 더듬었다. 남자로서는 상대방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상대방은 남자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무도회의 ‘구이다타’는 어디 갔나.”
하지만 남자의 질문은 상대방의 비명에 묻혀 버렸다. 멱살을 잡힌 하급 귀족은 알싸하게 취한 김에 신이 나서 외쳤다.
“체자레 공작이다!”
드문드문 비어 있던 무도회장이 흥분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은 다시 한번 목청을 돋워 외쳤다.
“체자레 공작이 수도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