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6화>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사람
‘이폴리토 이 새끼, 여자한테 손대려다가 처맞고 도망쳤어!’
쌍코피는 덤인가 보다. 아리아드네는 웃지 않으려고 정말이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레오 3세 앞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표정 관리를 했던 적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입꼬리만 실룩거리는 데 마레 백작을 보며 비앙카가 불안하게 재촉했다.
“말해봐라, 내가 감옥에 끌려갈까 봐 불쌍해서 말을 못 해주는 것이냐?”
비앙카는 정말로 겁먹은 듯이 보였다. 가엾은 공녀님이 엉뚱한 상상으로 스스로를 괴롭힐까 봐 아리아드네는 얼른 답해 주었다.
“공녀님께서는 타란토 영지의 군주이시기 때문에, 타란토 영지민이라면 그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있으십니다.”
“생사여탈권⋯⋯?”
비앙카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자기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그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리아드네는 설명을 계속했다. 중앙대륙의 관습법을 기초로 발달한,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법에 기반한 설명이었다.
“이폴리토는 타란토에서 태어나 어릴 적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가 타란토의 신민이라고 주장해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죽이더라도 처벌이 없어요. 공녀님의 정당한 권한을 행사한 거니까요.”
그렇지만 이폴리토는 어린 시절 이후로 내내 산 카를로에서 살았으니 저 주장은 논박당할 가능성이 50대 50이었다.
“설령 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바로 처벌당하시는 게 아니라, 이폴리토의 현재 영주가 국왕 폐하께 자기 영지민을 상하게 한 데에 대한 처벌을 요구해야 재판이 열립니다.”
그 재판에서는 이폴리토가 무슨 짓을 했고 비앙카가 정당방위를 하였고 이런 것들이 논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주가 처벌을 요구할 때의 이야기이다.
“앗차, 그런데 이폴리토는 수도에 살고 있으니 그의 현재 영주는 국왕 폐하로군요.”
아리아드네는 과외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양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타란토의 영주님, 공녀님의 오촌 아저씨께서 공녀님이 사람을 죽였다고 큰 처벌을 내리실 것 같습니까?”
비앙카는 잠시 머뭇대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마 아닐 것 같다⋯⋯.”
아리아드네는 문득 자기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폴리토는 최근 아리아드네가 작위를 받음으로 인해 귀족이 되었다.
평민이 아니라 귀족끼리의 싸움이라면 피해자 가문의 가주—작위를 가진 자—가 정식으로 비앙카의 처벌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냥 넘기기로 했다.
‘내가 비앙카의 처벌을 요구해? 한 대 더 때려달라고 청원해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이 있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마 죽지도 않았을 거예요. 안 그래도 유모님께 잘못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폴리토를 찾으려고 집안 온갖 군데를 다 뒤졌는데, 어디에도 없답니다.”
아리아드네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죽었으면 그 정원에 그대로 사지를 펼치고 뻗어 있어야죠. 안 그래요?”
비앙카는 그만 따라서 푸흡, 웃어 버렸다. 아리아드네의 태도가 너무 상큼했던 탓이다.
꼬장꼬장한 지아넬리 남작부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유모가 보기에 저 둘은 너무나 철없는 어린아이들로 보였다.
“공녀님께서 그놈을 무찌른 건 천만다행입니다만!”
‘무찔렀다’는 단어 선택에 비앙카가 킬킬 웃다가 지아넬리 남작부인의 번뜩이는 눈빛에 거북이처럼 목을 어깨 사이로 접어 넣었다.
“그놈을 빨리 잡아야지요! 제아무리 미수에 그쳤다지만 우리 공녀님께 손을 대려고 했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폴리토를 그냥 보내주면 안 된다는 건 백번 맞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도 백번 동감했다.
어린애에게 부당하게 손을 대서 신세를 고쳐보려는 그놈의 속이 뻔히 보였다.
죄질이 더러웠다. 그러나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이폴리토 대신 이 자리에 있는 아리아드네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오라버니라고 해서 감싸려고 들다간 천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아리아드네는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이폴리토 좀 잡아가라.
“제 아버지, 그러니까 데 마레 추기경께 이폴리토가 시도했던 짓을 고발하시고, 타란토 영주의 이름으로 그의 신병을 요구하시지요.”
이폴리토가 타란토 공녀를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고발은 엄청난 것이었다. 일단 레오 3세부터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범죄혐의가 이토록 파렴치하고 국왕의 분노가 타오르는 앞에서는 제아무리 데 마레 추기경이라도 이폴리토를 비호해 주기는 힘들었다.
이폴리토는 ‘그저 인사를 하려고 했을 뿐’ 같은 말도 안 되는 변명거리를 주워섬길 테지만 비앙카 공녀쯤 되는 상대에게 예를 취하지 않고 다짜고짜 어깨에 손부터 얹었으면서 그런 말에 설득력이 있기는 어려웠다.
가해자의 평판과 피해자의 신분을 고려했을 때, 이폴리토가 타란토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지아넬리 남작부인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겁탈 시도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공녀님의 명성이 흠이 됩니다!”
아리아드네가 갈리코의 미레이유 공작에게 당할 뻔했을 때와 같은 논리였다. 물론 사건의 디테일은 달랐다.
그때 아리아드네는 목이 졸린 자국을 비롯해 온몸이 멍투성이였고 가족조차도 자기편이 아닌 상황에서 이를 숨길 방법이 없었다.
비앙카는⋯⋯. 털끝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상대방의 부상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나 유모의 단호한 태도와 명성에 흠이 간다는 말에 비앙카의 표정이 다시금 침울해졌다.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그 명성입니다!”
지아넬리 남작 부인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또 아니었다.
비앙카는 아마 외국의 군주에게 시집가게 될 테니 산 카를로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그 자체로는 별 타격이 없었지만, 알폰소의 사례에서 보았든 군주 가문 간의 혼인은 철저한 정략혼이었다.
협상 중 ‘그런데 신부 되실 분이 순결하지 못하시다는 소문이 돕니다?’라면서 조건을 조정하려고 드는 시도는 충분히 있음직했다. 아리아드네는 물었다.
“그럼 이대로 사건을 묻으시겠습니까?”
“그건 안 되죠!”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뾰족하게 소리 질렀다.
“어떻게든 대가는 치르게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어떻게’에 대한 청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아리아드네의 뒷골이 슬슬 당겨오기 시작했다.
“이폴리토를 처리하는 것도 싫고, 그냥 두는 것도 싫고, 그럼 어떻게 하시자는 소리입니까?”
“그건!”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아리아드네를 쏘아보며 외쳤다.
“그쪽이 알아서 해야죠! 우리는 피해자인데! 가해자 측에서 알아서 하셔야지!”
졸지에 이폴리토와 한패로 몰려버린 데다가 난데없이 까다로운 상대방—심지어 돈도 안 낸—을 만족시키라는 요구를 받은 아리아드네는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그러다 상대방은 당당했다.
“집주인이 책임지세요!”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아리아드네를 가리키며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 했다는 둥, 어떻게 심야에 정원에 사용인이 한 명도 없을 수 있냐는 둥, 그러다가 갑자기 딱 그때 화장실이 급해서 공녀님을 혼자 두고 간 자기가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유모라며 한탄을 하는 둥 배경음을 잔뜩 넣었다. 소음 때문에 두개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비앙카 공녀는 두 손으로 양 귀를 막은 채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비앙카도 저 잔소리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음성 그 자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게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나가시죠.”
“네?”
어안이 벙벙한 지아넬리 남작부인에게, 아리아드네가 재차 요구했다.
“잠시 나가 주세요. 공녀님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허!”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부르르 떨었다. 큰 체구가 아니었는데 존재감이 대단했다. 물리적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어찌 감히―!”
유모가 노호를 지르려던 참이었다.
“⋯⋯나가 있어 줘.”
비앙카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비는 것 같이 덧붙였다.
“잠깐이면 돼.”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머리에 맞은 듯한 표정으로 비앙카 공녀를 바라보았다.
자기 품의 작은 아기새가—아기새 치고는 너무 컸지만—날아가려고 하는 순간을 목도한 어미새 같았다.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려던 차에 아리아드네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들으셨죠, 남작부인?”
아리아드네는 유모를 방 밖으로 밀어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남작 부인을 일층 응접실로 모셔서 최고의 다과를 대접해라!”
밖에서 귀를 쫑긋 곤두세우고 있던 산차가 다람쥐처럼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지아넬리 남작부인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끌어냈다.
산차의 체구는 몹시 작았지만 알토란처럼 단단한 몸이었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은 젊은 친구의 힘에 짐짝처럼 방에서 억지로 딸려 나가고 말았다.
지아넬리 남작부인이 사라지고 없는 응접실은 급작스레 고요해서 되레 어색했다. 그 적막을 비앙카가 깼다.
“⋯⋯아무도 나에게 내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았소.”
아까는 급해서 집안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제는 정신이 좀 돌아왔는지 예에 맞는 하오체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건 좋지 않습니다. 별로예요, 어려워요, 하지 마세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내가 진짜로 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유모와 가신들이 생각하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느니.”
아리아드네는 오락가락하는 비앙카를 보며 조금 웃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비앙카는 반색했다. 아주 희미한 표정이었지만 아리아드네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나한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백작이 처음이오.”
편하게 말하라는 것도, 명확한 기준을 알려준 것도 둘 다 아리아드네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한 비앙카는 얼굴을 붉혔다.
“⋯⋯말투는 마음의 준비가 되면 바꾸겠소.”
아리아드네는 환히 웃었다. 일부는 부러 웃은 것도 있었다. 이 공녀님의 마음을 좀 더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공녀님께서 원하실 때로, 언제든지.”
이 아이는 따듯한 대접과 환영을 좀 더 받아봐야 했다. 여기까지 한 아리아드네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공녀님, 공녀님은 이폴리토를 어떻게 하고 싶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