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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38화 (338/733)

<제338화> 무슨 손님?

“저희 어머니께서는 5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비앙카는 척수반사로 조의를 표하려다가, 그 어머니가 ‘데 마레 추기경 모르게 추기경의 아들이 아닌 애를 데려온 사람’과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은 옳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시더군요.”

아리아드네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라버니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찾아가라고, 네 뿌리는 거기에 있다는 말을 반드시 전해달라고.”

이쯤 되면 다 얘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멍청이 이폴리토라도 이만큼 들었으면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 줄 아리아드네가 아니었다. 꼭 전해달라는 루크레치아의 전언은 깨끗하게 씹었다. 아리아드네 혼자 잘 듣고 치웠다.

문제는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가 좋아하는 꽃이 뭔지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그 말을 원래 들었어야 했을 아들놈에게 집안 살림을 빙자해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그놈도 몰랐다. 참으로 쓸모없는 놈이었다.

“뉘앙스 상 그 꽃이 친부 가문의 문장인 것 같더라고요. 사람을 풀어 수소문했지만 루크레치아가 젊어서 배가 부른 상태로 추기경에게 시집갔다는 소문만 파다했지, 애 아빠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자세한 내막까지 아는 사람은 루크레치아 및 데 로시 가문과 가까운 사이였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런데⋯⋯. 입을 열 만한 사람이 딱 한 명 있더군요.”

“그, 그게 도대체 누구요?”

타이밍 좋게 뜸을 들이는 아리아드네에게 완전히 낚인 비앙카는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사람은 타란토 공작가에 있다고 합니다.”

“헤에에에에?!”

내 수중에 있었다니! 비앙카는 영문 모를 전능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리아드네는 덧붙였다.

“죽은 루크레치아의 유모예요. 공작가에 의탁해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리아드네는 흑사병 사태 때 데 로시 가가 루크레치아의 유모를 박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주었다. 비앙카 공녀는 분개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평생을 자기 가문에 바친 사람을 그렇게 박대한단 말이오?”

자기 유모한테 잠깐 나가 있으라는 말도 미안해서 벌벌 떨면서 한 공녀가 듣기에 로시 가는 정말로 인성을 바다 한가운데에 내다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 유모분은 공녀님의 여름 별장에 계시다고 하는데, 그 내부까지는 외부인 출입이 안 돼서 더 자세히 수소문해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내가 당장 찾아오겠소!”

비앙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직접 여름 별장에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데⋯⋯. 찾고 나면 어떻게 되오?”

아리아드네는 미소를 지었다.

“그 뒤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비앙카의 표정에 여전히 궁금증이 남아 있자, 그녀는 약간의 실마리를 더 얹어 주었다.

“이폴리토를 가문에서 제명할 수만 있으면 그 뒤는 일사천리예요.”

비앙카는 기본적으로 또렷한 아이였다. 이 이야기까지 듣자 아리아드네가 뭘 의도하는지 얼추 추론할 수 있었다.

데 마레 가문에서 제적된다면 이폴리토는 타란토 영지에서 태어난 평민이 된다.

타란토 사람이 산 카를로로 거주지를 옮기는 일은 이동의 명분이 있는 데 마레 추기경을 따라온 덕에 허가되었다.

가문에서 축출된다면 이폴리토는 더는 산 카를로 도시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 생사여탈권.”

비앙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단어는 무서웠지만⋯⋯. 매혹적이었다. 꼭 눈앞에 있는 이 언니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내, 내가. 그런 힘을 사용해도 될는지 잘 모르겠소.”

비앙카는 이제껏 어린 공작 내지는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니라 시골 남작 영애처럼 살았다.

아무도 비앙카에게 그녀의 권한이 어떤 것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얼떨떨한 상태였다.

“다들 내 말을 순순히 들을까? 안 된다고 만류하지 않을까?”

“안 된다고 하면.”

아리아드네는 진하게 웃었다.

“저한테 데려오세요.”

아리아드네는 말 안 듣는 집안 식솔들을 단속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데 마레 가문의 서출 신분으로도 루크레치아가 버티고 앉은 집안을 휘어잡았는데 타란토 가문에서 비앙카의 입지 다지기 정도는 눈감고도 가능했다.

“좋, 좋소!”

비앙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타란토로 돌아가자마자 여름 별장을 싹 뒤져서 그 사람을 데 마레 백작에게 보내겠소!”

“말 안 듣는 가솔도 함께요.”

아리아드네는 덧붙였다. 비앙카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녀는 오늘 일어난 크게 안 좋은 일에도 불구하고 무도회가 끝난 후 아리아드네를 보기 위해 그녀의 집에 찾아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인생이 바뀌는 날이었다.

* * *

“장군님. 혹시나 듣고 싶어 하실지도 몰라서⋯⋯.”

“음?”

잿빛 머리의 날카롭게 생긴 50대 남자가 고급스러운 가죽 의자에서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았다.

물리적으로는 수평적인 눈높이였지만 어느 모로 보나 내려다보는 눈초리였다.

그들이 있는 방은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임시 거처처럼 어딘가 어수선한 태를 가릴 수가 없었다.

“아드님께서⋯⋯.”

“내가 아들이 있어?”

정말로 모른다는 투였다. 부하는 당황했다.

“아, 저기 그⋯⋯. 엘코 님⋯⋯.”

“아아. 그놈.”

남자는 그제야 기억이 난 듯했다. 그는 성가신 손짓으로 부하를 내쫓았다.

“중요하지 않아. 됐어.”

“아 그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에, 중년 남자는 아주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미간을 움츠렸다가, 입 끝을 조금 내밀었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세한 보고를 드릴까요?”

중년남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라.”

부하는 들어온 첩보를 읊었다.

“그간 에트루스칸 왕국의 후계자 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의 측근으로 일하다가, 최근 갈리코 왕국의 첩자인 것이 밝혀져 즉결처형당했다고 합니다.”

“뭐? 첩자?”

“예⋯⋯. 그 부분은 확실하다고⋯⋯.”

“할 짓이 없어서 갈리코의 첩자질을 해?”

“자세한 내막까진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격하게 콧김을 내뿜었다.

“계속 해 봐!”

“시신을 인수할 사람이 없어서 교외의 무연고자 묘지에 묻히셨다고 합니다⋯⋯.”

“망할 새끼.”

남자는 낮게 욕을 내뱉었다.

“제 어미 닮아서 배신이나 해대고!”

잿빛 머리의 남자는 순식간에 흥분했다. 그는 격렬하게 화를 냈다.

“죽어도 싸! 죽어도 싸다고!”

남자가 욕하는 대상은 제 아들이라기보다는 그의 죽은 어미로 보였다.

엘코의 어미는 그가 어릴 때 만난 청루의 여자였다. 난생처음 만난 여자이기도 했고,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연상의 여자이기도 했다.

첫사랑인 그 여인의 첫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남자를 항상 괴롭혔다.

그는 술에 취할 때마다 여자를 ‘그 배 속의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보장이 있느냐’라며 달달 들볶았다.

견디다 못한 여자는 귀족 자제였던 그의 집 하인과 눈이 맞아 도망치려다가 남자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여자는 눈이 돌아 버린 남자에게 매질을 당하다가 세상을 등졌고, 어린 엘코는⋯⋯. 남자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아들이라도 죽었다니 화가 났다.

“에트루스칸의 왕자 놈, 감히 내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아들인지 알았을 리도 없고 배신자는 처형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항변이 남자에게 먹혀들 리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잔혹하기로 이름이 높은 남자였다. 그의 부하도 자신의 장군에게 실익 없는 말대답을 하느니 그저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한참 욕을 퍼부으며 그의 아들을 죽인 에트루스칸 왕국의 후계자를 저주했다. 앞의 수하만 그 목적 없는 욕설을 듣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그는 무연고자 묘지에 묻힌 자기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오라는 명은 끝내 내리지 않았다.

* * *

체자레 공작의 귀환으로 팔라지오 카를로는 모처럼 북적북적해졌다.

“폐하.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어수선한 몰골로 들이닥쳤던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와 달리, 말끔하게 머리를 빗질하고 면도까지 마친 체자레 공작은 예의 화사한 눈웃음으로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레오 3세와 체자레 공작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서로 매우 어색한 사이였지만, 그것도 3년 전 일이었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고, 루비나가 중간에서 최선을 다해 기름칠을 했다.

기억이 희미해질 즈음 체자레가 나타나 혼신의 힘을 다해 사근사근하게 구니 레오 3세로서도 새삼 날을 세울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허허허! 네놈 얼굴은 더 좋아 보이는구나!”

“시골 공기가 몸에 맞았나 봅니다.”

“너 같은 녀석이 그럴 리가.”

약간의 뾰족함이 느껴졌다면 그건 체자레가 제풀에 찔린 탓이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 같이 만나니 좋구나!”

그 말에 루비나와 체자레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식사 자리에 동석해 있던 알폰소는 무표정하게 꿩 다리를 베어 물었다.

비앙카만 당황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렸다. 레오 3세는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느냐.”

“폐하께서 제게 시간을 내주신다면 오랜만에 모시고 사냥터나 한번 돌까 싶고.”

체자레는 눈을 접으며 요사를 떨었다.

“공사다망하시다면 옛 친구들이나 만나볼까 싶습니다.”

“안타깝게도.”

레오 3세는 대낮부터 낮술을 한 모금 넘겼다. 얼마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콰해진 얼굴이 술이 잘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내가 일이 많구나. 네 옛 친구들이라면 다 한량들 아니냐?”

“하하하하, 다 저 같은 친구들이죠.”

체자레는 싫은 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유하게 웃어넘겼다.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레오 3세는 자기가 하는 말이 싫은 소리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더 참견했다.

“거, 도움 안 되는 친구들일랑 그만 만나고 좀 유익한 친구들과도 만나고 좀 해라. 그래, 그 왜 콘타리니 백작. 오타비오. 그 친구가 성실하더라. 네 친구 아니냐?”

체자레는 웃었다.

“그럼요. 제 좋은 친구죠.”

잠시의 침묵이 흘렀지만 레오 3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다음번에 자리 한번 주선할 테니 와서 같이 티타임도 가지고 하자.”

루비나도 기묘하게 웃었다. 레오 3세는 콘타리니 백작이 새로 들인 아내가 체자레와 추문이 있던 이사벨라 데 마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었겠지만 레오 3세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다. 루비나가 제의했다.

“부부 동반으로 모이면 어떨까요?”

오타비오의 꼴 보기 싫은 젊은 아내를 곤욕스럽게 할 절호의 기회였다.

“폐하와 저, 체자레에 콘타리니 백작 부부까지요.”

다 함께 모인 날 저녁에 콘타리니 백작 부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싸울지 기대가 되어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꿩 먹고 알 먹는다고, 그녀는 여기에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까지 살뜰하게 덧붙였다.

“얘, 체자레. 너 어디 만나는 참한 처자 없니.”

이 이야기에는 체자레 공작의 매끄러운 가면도 깨졌다. 그는 불퉁한 입매로 심술궂은 미소를 흘렸다.

“저. 아시면서.”

“이런 이런, 쯧쯧.”

레오 3세가 혀를 찼다.

“너도 어서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지. 나이가⋯⋯. 어디 보자, 벌써 스물여섯 아니냐? 못해도 손주 두어 명을 안겨줬어야 할 나이야!”

레오 3세의 주책이 길어질 기색이 보이자, 알폰소 왕자가 대화를 끊었다.

“아버지.”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저는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도저히 눈 뜨고 더 들어줄 수가 없는 대화였다.

지금 객관적으로 결혼과 후사가 급한 쪽은 왕국의 후계자인 알폰소이지 자기 한 몸만 건사하면 되는 체자레가 아니었다.

그런데 레오 3세는 알폰소 쪽에는 신경을 싹 끄고 루비나와 체자레를 끼고 가족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알폰소에게는 레오 3세에게 따지고 드는 것보다는 좀 더 중요한 볼 일이 있었다.

“약속이 있어서요.”

“오, 무슨 약속?”

왕자는 부러 둘러 말했다.

“손님을 초대해서 여기 비앙카에게 함께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레오 3세는 아들의 일정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캐묻지도 않았고, 형식적으로도 알폰소를 잡지 않았다.

“친척 간에 우애가 깊으니 보기가 좋구나. 그래, 어서 가 보도록 해라.”

알폰소가 조금만 더 혀가 매웠다면 ‘친척 간에 우애가 좋기로는 아버지만 하겠습니까’ 소리가 절로 나왔겠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때 체자레가 알폰소에게 물었다.

“무슨 손님?”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쇠가 긁히는 듯 불협화음이 섞인, 떨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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