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39화 (339/733)

<제339화> 체자레 공작의 시비

알폰소는 체자레의 질문에 대한 대답 없이 그냥 빙그레 웃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알폰소는 산뜻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체자레는 레오 3세 앞에서 감히 적통 왕자에게 따지고 들지는 못했다.

다만 그의 물색 눈동자가 몹시 격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체자레 공작이 피사노 영지에서의 칩거 생활을 정리하고 서둘러 수도로 돌아온 것은 비앙카 공녀의 데뷔탕트 파티 때문이었다.

물론 친척 여동생의 사교계 데뷔를 축하해 주겠다는 선량한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 “데 마레 여백작이 타란토 공녀의 샤프롱 자리를 꿰찼답니다.”

이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체자레는 그저 어머니가 꼴 좋게 되었다고 웃어넘겼다.

그는 루비나가 줄곧 ‘수도로 돌아오라’며 보내는 편지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인생 처음으로 당해본 끔찍한 실연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주하지 않으면 현실화한 결과를 깨닫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그랬던 그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킨 것은 다음 한 줄 때문이었다.

- “루비나 공작부인께서 결사반대하신 덕에 데 마레 여백작은 샤프롱이 아니라 ‘구이다타’라는 역할만 맡게 되었습니다. 공석인 샤프롱 대신 알폰소 왕자가 공녀의 후견인을 선답니다.”

‘어머니가 쓸데없는 짓을!’

이건 참을 수가 없었다. 체자레의 눈이 돌았다.

‘무도회 준비를 핑계로 둘이 착 붙어 계시겠다?’

아리아드네와 알폰소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니 핑계 삼았다는 점에서는 엇나갔지만 결과적인 면에서는 매우 정확한 추측이었다.

피사노 영지가 국경에 딱 붙은 탓에 타란토 공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후견인과 ‘구이다타’가 동시에 붙게 되었다는 소식은 공작의 귀에 아주 늦게 들어왔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의 잘 빠진 흑마를 정신없이 채찍질해 번개와 같은 속도로 산 카를로로 돌아왔다.

데뷔탕트 파티가 타란토가 아닌 산 카를로에서 열려 그나마 다행이었다.

타란토에서 열리는 파티였다면 체자레 공작은 절대로 시간을 맞추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흑마, 레오폴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리아드네를 만나겠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가 파티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후견인과 ‘구이다타’가 모두 자리를 떠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 둘은 어디 갔냐고 수소문하자 다들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 “글쎄요⋯⋯? 둘이 같이 나가신 것 같던데요? 꽤 일찍.”

공작으로서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자기가 여자와 무도회에서 단둘이 일찍 나갔을 때 일어났을 법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반복됐다.

주인공은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였다.

무도회장에 우두커니 선 체자레는 이 연놈들이 왕자궁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만—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추론해 본 것으로, 그 도출 과정은 틀렸지만 이번에도 결론만은 정확했다—그는 팔라지오 카를로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레오 3세의 신붓감을 강탈해 약혼한 일로 총사령관 직위를 박탈당한 이후 야간에 궁전에 출입할 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전전긍긍하며 빌라 소로토네에서 뜬눈으로 하룻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첫새벽에 입궁했을 때는 데 마레 백작은 이미 왕자궁을 떠난 이후였다.

그 뒤로 체자레의 온 신경은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에게 쏠려 있었다.

‘누구랑 만나는지 대답을 안 해?’

체자레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그는 알폰소에게 사생활을 캐물을 사이도 아니었고, 아리아드네를 찾아가서 대답을 요구할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런 체자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폰소는 미미하게 웃으며 비앙카를 재촉했을 뿐이다.

“가자, 비앙카.”

“네, 오빠.”

비앙카가 자리에서 날름 일어났다. 체자레는 둘을 배웅한다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술이 자꾸 일그러져서 실패했다.

결국 그는 일어서서 나가는 알폰소와 비앙카의 등을 보며 레오 3세와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구차한 핑계를 대고 말았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알폰소가 순순히 손님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으면 그들의 뒤를 밟아 알아낼 참이었다.

* * *

아리아드네와 알폰소의 입장에서, 비앙카가 산 카를로에 더 머물기로 한 것은 꽤 괜찮은 일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건 비밀로 하기로 해.”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알폰소와 만난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이유로 가장 먼저 댄 것은 알폰소의 유불리였다.

알폰소는 레오 3세의 유일한 직계 왕위계승자였지만 아직도 왕세자 책봉을 받지 못했다.

이는 국왕의 게으름, 심술, 내지는 견제 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자가 신분 탓에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낳을 수 없는데 마레 백작과 열애 중이라고 밝히는 것은 국왕에게 왕세자 책봉을 미룰 좋은 핑계를 안겨주는 것뿐이 안 된다.

“그게 여러모로 좋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순전히 알폰소를 배려해서 결정한 사항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한 차례의 화려한 약혼과 파혼을 겪었다.

중앙대륙 전체를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 건 참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몇 년 뒤에도 ‘아, 그 아리아드네 데 마레 백작?’이라는 인사치레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그 아리아드네 데 마레’라는 말이 정확히 무얼 지칭하는지 몰라 움찔 놀라곤 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그의 배다른 형제와 연애라니, 최고 흥행했던 통속 사건의 후속편 아닌가.

이러쿵저러쿵 남의 입에 올라가는 일은 더는 사양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관계가 잘 안됐을 때를 대비한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일는지도 몰랐다.

비밀 연애를 하자는 제안에 알폰소는 뭐라고 하려고 했으나, 결국엔 그녀의 뜻을 따라 주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자.”

그런 상황에서 비앙카는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그녀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함께 준비해 준 사람들이 어린 공녀를 챙겨주는 건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알리바이로 이용당하게 된 비앙카 역시 유모의 손아귀에서 당당하게 벗어나는 게 기꺼웠다.

그녀는 언니‧오빠와 놀러 나가는 약속이 임박해올수록 다가올 모험에 대흥분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오늘도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는 비앙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공녀에게 수도 여자들이 타는 방식으로 말타기를 가르쳐 주기로 한 것이다.

알폰소와 비앙카는 레오 3세와 오찬 약속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이동하는 시간까지 고려해 늦은 아침을 먹고 팔라지오 카를로를 방문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버린 그녀는 마장(馬場)으로 이어지는 왕궁의 뒷길을 거닐며 시간을 때웠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느니 알폰소와 비앙카를 만날 때까지 산책이나 하려는 마음이었다.

“데 마레 백작이 왕궁에는 무슨 일이시오?”

다만 그녀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그녀를 먼저 발견했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단출하게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내가 묻지 않소?”

상대방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그녀에게 기어이 말을 붙인 사람은 체자레 공작이었다.

그는 예전보다 더 말라 보였다. 창백해진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얇은 입술과 꽉 다문 입꼬리에는 신경질적인 면모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깊은 물빛 같은 눈 색깔, 깎아지른 콧날과 높은 이마 선에서 드러나는 찬란한 미모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각하.”

아리아드네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나 핼쑥한 얼굴의 체자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집요하게 캐물었다.

“누굴 만나러 온 거요?”

아리아드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말 타러 왔습니다.”

체자레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납득한 얼굴이 아니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먹고 떨어지라는 심정으로 알리바이의 이름을 팔았다. 이러려고 준비한 알리바이 아닌가.

“비앙카 공녀님과 함께 외승(外乘)을 가기로 해서요.”

체자레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실 이는 그가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그는 심술궂게 내뱉었다.

“비앙카 공녀라니, 알폰소 왕자겠지.”

그의 입술이 푸들거렸다. 저 두 연놈이 기어이 만나고 있었다.

그가 유예해놨던 이별이 엄습했고 실낱같던 가능성이 눈앞에서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안 된다, 저 둘은 만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체자레는 가파르게 쏘아붙였다.

“누굴 눈뜬장님으로 알아?”

아리아드네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게 공작님과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체자레는 숨을 들이켰다. 이미 받아들인 사실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여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귀신 같은 눈치에 뜨끔하긴 했지만 이럴 땐 무조건 잡아떼는 게 우월전략이었다. 그녀는 체자레의 무자격에 집중했다.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잖아요. 갈 길 가시죠. 시비 걸지 마시고.”

“시비라니!”

체자레의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그대 걱정을 해 주는 거요!”

자기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가는지 정신이 없었다. 대충 쏟아붓고 나니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아니 전보다도 더 고혹적으로 아름다웠다.

“알폰소 왕자가 그대를 왕세자비 감으로 과연 생각이라도 할 것 같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아리아드네는 제발 여기서 대화를 끊고 싶었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제발 알폰소와 비앙카가 나타나 주면 좋겠다.

지금 그녀가 집에 돌아가 버리면 알폰소와 비앙카가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체자레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어차피 안 될 혼사인데 꿈 깨시오. 혼기 넘긴 미혼 여자가 괜히 왕족 옆에 착 붙어서 돌아다니면 쓸데없는 구설에나 오르지!”

체자레의 언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그대는 정숙함이 얼마나 큰 가치인지 모르나?”

이곳은 외부 마장으로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이었다.

원체 사람의 발길이 뜸해 사생활이 지켜지는 곳이기는 했지만 그러기엔 체자레가 지나치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100 피에디 밖에서도 그가 지르는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님께 들을 훈계는 아닙니다만?”

체자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같은 순간 아리아드네의 등 뒤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체자레의 표정이 나타난 사람 덕인 줄 알고 뒤를 홱 돌아보았으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오솔길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톨리니 백작부인, 그러니까 오타비오의 누나 클레멘테와 발조 백작부인이었다.

그들은 루비나 공작부인을 뵈러 궁전에 방문한 참이었지만, 아리아드네와 마찬가지로 약속 시각이 될 때까지 정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수다를 떨며 걷던 와중에 쫄깃한 소리가 들려 발걸음을 옮긴 것이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다.

- “이게 무슨 일이래요?”

- “정숙함? 데 마레 백작이 남자한테 꼬리라도 치다가 걸렸나?”

- “자기 친언니처럼?”

둘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귓속말을 나눴다. 체자레는 대단찮은 관객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만나게 될 때까지 나흘 남짓을 궁전에서 허송세월해야 했다.

그녀가 약속을 잡아 만나주지는 않을 테니 다음번에 얼굴을 언제 볼지 모르는 일이다. 체자레는 필사적으로 아리아드네에게 매달렸다.

“자기는 똑똑하잖아. 말도 안 되는 확률에 도전하지 마.”

“난데없이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세요?”

“안타까워서 그래! 당신을 안 봐주는 남자한테 청춘을 바치고 버림받을까 봐!”

‘자기소개하세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간신히 내려갔다.

“알폰소는 당신을 거둬들일 수 없다고! 그놈의 머릿속엔 책임, 책무, 의무감이 가득 차 있어서 자기 여자한테 내줄 공간이 없어.”

“마치 아주 잘 아시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도 절로 뾰족해졌다.

“둘이 언제부터 친했다고!”

이건 아픈 곳을 찔렸기 때문에 나오는 공격성이었다. 그 와중에 은십자 부녀회의 두 귀부인은 서로 소곤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 “알폰소 왕자님한테 들이대고 있나 봐요.”

- “제 발 저려 하는 꼴 보니까 진짜인 모양인데요?”

체자레는 본심을 말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불가능한 왕자비 자리 따위 꿈도 꾸지 말고, 나한테 와. 내 옆에서 피사노 공작부인 하자. 내 옆자리에서 영원히 내 손을 잡고 지내자.

하지만 자존심과 염치가 끝내 그의 혀끝을 붙들었다.

예기치 않게 나타난 관람객 앞에서 체자레 공작이 아직도 데 마레 백작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걸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한테 정이 떨어져 만나 주지도 않는 여자에게 재차 고백할 정도로 자신감 충만한 남자가 아니었다.

아니, 평소라면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거절당해도 큰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넓고 미녀는 많았으니까.

문제는 저 여자는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는, 그러니까 일종의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만 안전한 길로 후퇴하고 말았다.

“나는 알폰소와 형⋯⋯ 아니 가족이야! 그대가 나보다 알폰소를 더 잘 알기라도 한다는 거요? 사귀기라도 하나?”

아리아드네는 일부러 더 강세를 줘서 외쳤다.

“아니거든요!”

체자레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럼 사귀지도 않는 주제에 외간 남자와 만나는 일 따윈 썩 그만둬!”

그는 아리아드네를 비난하며 불가해한 편안함을 느꼈다.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와 발조 백작부인은 킬킬대고 웃으며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체자레의 따귀라도 치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묵직한 저음이 체자레의 설교를 멈췄다.

“체자레 공작 말이 모두 맞아.”

알폰소가 중앙 궁전 쪽에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알폰소를 발견한 체자레 공작과 두 백작부인이 내키지 않는 예를 취했다.

그 아주 짧은 틈을 타, 알폰소가 아리아드네를 자기 품 안에 안았다.

알폰소의 탄탄한 가슴 근육과 높은 체온이 비단 드레스를 뚫고 아리아드네의 등에 맞닿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사귀지도 않는 외간 남자와 만나는 건 정숙한 산 카를로 귀부인으로서는 안 될 말이지.”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안은 채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체자레를 내려다보았다.

금발의 왕자는 적발의 공작보다 머리 반 개쯤 컸다. 그의 손길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쓸었다. 다친 동물을 보듬는듯한 움직임이었다.

“데 마레 백작은 나와 만나고 있어. 그러니까 공작은 비켜주길 바라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