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한 입으로 두말하기
알폰소 왕자의 선언에 발조 백작부인과 바톨리니 백작부인의 눈이 커졌다.
도리어 체자레 공작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데에 시간이 걸려서 한 타이밍 늦게 놀랐다.
“뭐?”
갈라진 목소리의 체자레를 앞에 두고 알폰소는 희게 웃었다.
“공작 말대로, 내 여자가 외간 남자와 만날 일 없게 해 달란 말이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더 가깝게 이끌려왔다.
아리아드네는 갈비뼈 위를 누르는 두꺼운 좌완에 호흡이 달려 숨을 토해냈다. 이 상황이 초현실 같았다.
아리아드네를 꽉 안은 알폰소는 턱짓으로 체자레에게 옆 방향을 가리켰다.
“길부터 터 줬으면 좋겠소만.”
체자레는 호흡곤란이 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왕, 왕자님.”
더럽고, 치사했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 앞에서 그녀를 안은 남자에게 존칭을 사용해야 하는 심정이 참담했다.
그러나 체자레의 인생 처음으로, 무언가가—아마도 절박함이—자존심을 이겼다. 아리아드네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알폰소의 목소리 톤이 내려갔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알폰소는 전쟁터에 다녀오고 나서도 항상 웃는 낯이었다. 인상이 좀 바뀌었지만 표정만큼은 똑같았다.
체자레는 알폰소가 위엄이 생겼다, 전보다 냉하다는 세간의 평을 웃어넘겼다.
그런데 지금 알폰소의 얼굴을 보니 왜 인상이 달라진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황금의 왕자님은 사막의 모래처럼 바래, 무심하고 냉혹한 낯빛으로 자신의 이복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그⋯⋯.”
체자레는 가까스로 단어를 찾았다.
“저, 저는 데 마레 백작과 대화 중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왕자님이라고 하셔도 시뇨라의 대화를 마음대로 끊고 대화 상대에게서 떼어갈 수 있다는 내용은 예법에 없습니다.”
“그대 말이 맞아, 예법에는 없지.”
알폰소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반문했다.
“그런데 그게 자네 주장 아니었나?”
체자레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지금 그가 알폰소에게 말을 거는 건 딱히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들을, 아니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기 따름일 뿐이다.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자 알폰소 대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읍소했다.
“아리, 내가 한 얘기 생각 잘 해봐.”
“공작.”
알폰소의 미간은 좁아지고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체자레는 아랑곳없이 아리아드네에게만 집중했다.
“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공작!”
인내심이 바닥난 알폰소가 그를 제지했다. 하지만 체자레도 물러설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알폰소의 품 안에 안긴 아리아드네를 보며 사정하다시피 애원했다.
“생각 정리되면 연락⋯⋯.”
“체자레 데 코모!”
벼락같은 알폰소의 고함에 그제야 체자레가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알폰소는 고개를 들이밀고 으르렁댔다.
“면상에 주먹 맞기 전에 입 닥쳐.”
체자레는 하늘에 맹세코 항상 온화하던, 네 살 어린 배다른 남동생이 자기에게 이렇게 구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데 코모’라니! 이건 대놓고 그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었다.
체자레가 말을 잃고 버벅대는 사이에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말했다. 은십자 부녀회 회원들이 자기 귀를 파볼 만큼 상냥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가자, 아리.”
아리아드네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둘 사이에 몸이라도 던져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바라던 일이었다.
알폰소는 그녀를 여전히 팔에 안은 채 체자레의 옆을 지나쳤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 둘은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체자레는 속이 두 배로 긁힌다는 단점도 몸소 느꼈지만 떠나가는 아리아드네의 등 뒤에 대고 마지막 한 마디를 외칠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리! 기다릴게!”
데 마레 백작은 돌아보지 않았고—설령 돌아보았다고 하더라도 집채만 한 왕자의 거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체자레 공작의 목소리는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 공허하게 오솔길을 울렸다.
체자레는 더할 나위 없이 참담한 심정이 되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이 해프닝으로 인해 더없이 행복해진 사람도 있었다. 상상도 못 했던 구경거리를 얻은 발조 백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입을 떡 벌렸다. 지가가 지금 막 목격한 일을 티파티에서 동네방네 떠들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동시에 뱃속이 뜨거워졌다.
반대로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입맛이 썼다.
사교계를 달굴 뜨거운 소재 거리를 얻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새로 모시게 된 상전의 아들이 물 먹은 내용이라니.
참여 못 하는 거로만 해도 속이 쓰린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방제작업에 끌려 들어가게 생겼다.
이 모든 일을 뒤로하고, 아리아드네는 앞만 보고 걸었다.
저 체자레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인생사는 참 아이러니했다. 한때는 저 말을 듣고 싶어서 목숨까지 걸었었는데 이제는 들어도 머리만 지끈거렸다.
생각도 하기 싫고 그저 지표면에서 없어지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삼일만 자리보전하고 누우면 딱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자신을 감싼 체온을 느끼고는 옆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알폰소가 강건한 매무새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오빠! 언니!”
저 멀리서 비앙카 공녀가 손을 흔들었다. 비앙카도 멀리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그 내용까지는 잘 안 들렸지만 체자레 공작이 뭐라 뭐라 애걸복걸하는 눈치였다. 빨리, 빨리 설명 들어야지!
수도는 참 재밌는 곳이었다!
* * *
발조 백작부인은 눈치가 좀 없는 편이었다. 은십자 부녀회에서 무소불위로 군림한 기간이 길어서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루비나 공작부인 앞에서 자기가 어떤 광경을 보았는지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고 말았고, 루비나는 친하지도 않은 사교계 부인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발조 백작부인은 머리를 쥐어뜯는 루비나를 보고 뽐을 내며 생활의 지혜 늘어놓았다.
“어머! 공작부인? 머릿니가 있으신가 보군요?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셨어야죠. 머릿니가 있을 땐 식초에 박하를 넣고 달여서 그 물로⋯⋯.”
루비나는 바톨리니에게 ‘저 여자 당장 내쫓아버려!’라고 외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루비나가 타고난 성질머리에도 불구하고 가깝게는 발조 백작부인의 주접을, 멀게는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의 실패—비앙카의 데뷔탕트 날 다른 무도회를 연 일—를 용인한 데에는 알폰소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고양이인 줄 알았던 어린 왕자가 완전히 범이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이 성년 호랑이는 이빨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어떻게 감히 내 아들을 ‘데 코모’라고 불러!”
발조 백작부인을 내보낸 후 클레멘테와 단둘이 남은 루비나는 느껴지는 위협과 그로부터 기인하는 분노를 쏟아냈다.
“그건 국왕 폐하께서 내 아들을 인정하신 걸 무시하는 처사야!”
“왕자가 세상일을 다 자,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클레멘테는 추임새를 넣었다. 남 욕할 때는 말더듬증이 급격히 나아지는 그녀였다.
“⋯⋯그런데. ⋯⋯도리어 이, 이득이 있지 않겠습니까?”
“응? 이득? 무슨 이득!”
루비나는 고성을 질렀다.
체자레의 면이 자기의 면이며 사교계에서 자기가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겠느냐, 저 발조 백작부인의 입에 걸레짝을 처넣어서라도 입을 막으라고 난리를 치는 걸 한참이나 들어주고 나서야 간신히 클레멘테에게 발언 기회가 돌아왔다.
“그, 그게⋯⋯. 국, 국왕 폐하께서 아, 아직까지도 알폰소 왕자를⋯⋯. 와, 왕세자(principe ereditario)로 임명하지 아, 않으셨잖습니까?”
“그래, 우스운 일이지.”
루비나는 마르그리트 왕비가 죽은 후, 아니 왕비의 생전부터 알폰소가 누리는 특권과 영광을 없애려고 각종 공작을 했지만 레오 3세는 대부분 들어주지 않았다.
타란토에 전쟁 자금을 보내지 않는다거나 같은, 왕의 행사가 외부로 소문날 일이 없는 몇몇 케이스들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레오 3세는 왕권신수설에 권력이 기반한 국왕치고는 여론에 지독하게 신경을 썼다.
그는 루비나 공작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킬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레오 3세는 얄궂게도 루비나가 안된다고 읍소를 하기도 전에 알아서 알폰소를 왕세자로 임명하지 않았다.
“⋯⋯폐, 폐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다면⋯⋯.”
클레멘테는 조심스레 루비나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 알폰소 왕자가 정말로 데 마레 여백작과 결혼하게 된다면⋯⋯. 알폰소 왕자에게는 후, 후계자가 없게 됩니다⋯⋯. 후, 후사를 생산할 수가 어, 없는 거지요⋯⋯.”
루비나의 눈이 커졌다.
“네 말인즉슨?”
“예⋯⋯. 마, 만일 체자레 공작께서 군주의 딸과 혼인을 하시고, 그 겨, 결합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레, 레오3세 폐하께옵서는⋯⋯. 그 후사를 고려하지 않으실 수 없기 때문에⋯⋯.”
“⋯⋯체자레의 자식이 왕손이 된다는 소리냐?”
루비나 공작부인의 심장이 두근, 세상 힘차게 박동했다.
“아, 아니지! 아직 왕세자 책봉을 안 한 거라면 어쩌면⋯⋯.”
어쩌면⋯⋯. 알폰소를 차기 왕, 체자레의 아들을 차차기 왕으로 배정하는 거북한 동거를 하지 않고 그냥 바로 체자레를 차기 국왕으로 삼을 수도⋯⋯.
그러나 이내 루비나 공작부인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모든 가정은 다 한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자레가 군주의 딸과 결혼한다는 조건 말이다.
“누가 체자레 놈과 결혼을 하려 들겠어!”
체자레의 평판이 새삼 문제였다.
3년 전 데 마레 백작과 파혼했을 때, 루비나는 파혼은 여자 손해지 내 아들이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일단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그 여자의 친언니와 아랫도리를 놀려 버린 남자라는 이야기에 전 중앙대륙이 놀랐다.
보통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정착하는 게 클리셰 아닌가?
이에 체자레의 기존 악명마저도 새로운 에피소드와 함께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국가 단위의 난봉꾼이었던 피사노 공작 체자레는 그만 대륙 단위의 카사노바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 이후 체자레의 행실도 딱히 바람직하지가 않았다.
남들은 공작이 얌전히 영지에 처박혀 독소 제거의 나날을 보낸 줄 알고 있었지만 체자레가 돌아옴과 동시에 그의 화제성도, 식솔들도 함께 돌아왔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간 영지에서 체자레가 뭘 하고 지냈는지가 수도에 소문이 났다는 뜻이다.
수도에 번지는 소문에 따르면, 체자레 공작은 낮밤 구분 없이 술과 다른 것들에 취해 지내면서 흑발의 여자들을 반복해서 안았다고 했다.
오로지 검은 머리의 키 큰 여자만. 얼굴도 나이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딱 한 번 자고 나면 내쫓고 다시는 보지 않았다.
손댄 여자가 한둘이 아니어서 소문을 단속할 수도 없었다.
뒤탈 안 날 여자만 건드린 것도 아니고 하급 창녀부터 귀족 자제까지 고루고루 건드렸다고.
“아주 육갑을 떨어라!”
루비나가 일갈했다. 그녀의 사고뭉치 아들조차도 어머니의 혓바닥에 맞으면 아프다고 할 정도로 신랄했다.
“가뜩이나 중앙대륙에 마땅한 혼처가 기근인데 체자레 놈까지 저렇게 구니 어디서 사람을 구해!”
멀쩡한 알폰소의 짝으로도 율덴부르크 대공의 세 살 난 여아가 거론될 정도니 객관적인 인력난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능성이 있을 만한 군주의 여식들을 조목조목 따져보았지만 딱히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하는 그 와중에도 루비나는 아들의 의사는 간단하게 무시했다.
오늘도 당장 데 마레 여백작을 붙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는데 루비나는 그 둘을 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매독이 있다고 자기를 발고해서 감옥에 보낸 며느릿감을 예뻐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루비나는 아들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까지 양보할 정도로 너그러운 어미는 아니었다.
“남자나 여자나 상향혼 하려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목욕재계하고 조신하게 꽃다발 내미는 법이나 연습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아랫도리 함부로 놀리는 버릇 못 버렸으니!”
“에휴⋯⋯.”
클레멘테의 한숨까지 더해져 루비나의 응접실이 한숨의 이중주로 가득 찼다.
그 와중에서도 클레멘테는 조심스레 루비나를 위로했다. 예쁨을 아니 받기도 힘든 처세였다.
“그, 그래도⋯⋯. 아, 알폰소 왕자가 데 마레 여백작한테 누, 눈이 뒤집힌 건 조, 좋은 일입니다⋯⋯.”
클레멘테는 고 콘타리니 백작의 혈육으로 레오 3세가 아리아드네 데 마레를 계비로 들이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체자레 공작이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 와중에 고 콘타리니 백작의 자녀들까지는 이야기가 새어나간 것이다.
“구, 국왕 폐하의 누, 눈 밖에 확실히 날 테니까요⋯⋯.”
클레멘테는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될지 몰라 루비나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루비나는 클레멘테가 하는 얘기를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클레멘테는 적당히 대충 눙치기로 했다.
“⋯⋯우, 우리는 이 연애를 응원해야 해요⋯⋯. 그, 그래야 공작님의 이, 입지가 생깁니다⋯⋯.”
“끙!”
루비나는 못마땅해 장탄식만 몰아쉬었다. 지금 그녀가 수도에서 가장 증오해 마지않을 여자들을 꼽으라면 데 마레 자매들일 것이다.
다행히 루비나에게는 즐거운 일정도 있었다.
“아, 맞다. 국왕 폐하께서 일정을 잡으라고 하시던데.”
루비나는 자기가 꾸민 레오 3세와 루비나 공작부인, 체자레 공작, 그리고 젊은 콘타리니 백작 부부가 모일 티파티에 대해 클레멘테에게 이야기했다.
클레멘테가 추임새를 넣었다.
“⋯⋯허, 그, 그거 참⋯⋯.”
악취미인 구성이었다. 다행히 루비나는 클레멘테의 답변을 요구하지 않고 용건으로 넘어갔다.
“네 남동생에게 알려. 궁으로 오라고. 오래 끌 것 없다. 이번 주 후반으로 하자.”
이 덕택에, 데 마레 자매 중 동생에게 화난 루비나의 불똥은 언니 데 마레가 뒤집어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