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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44화 (344/733)

<제344화> 좋은 남자의 조건

가브리엘레는 자기가 여기에 왜 왔는지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다.

“정말로 타란토 공녀가 매일 너희 집에 와?”

“⋯⋯.”

“절친한 사이라며?”

그렇지만 눈치가 전혀 없진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자 그녀는 얼른 사과하고 화제를 돌렸다.

“너무 그러지 마! 궁금해서 그런 거라고! 나 전해줄 엄청난 얘기가 있어서 왔다고! 너희 언니 남편 소식 들었어?”

‘형부’ 소리를 안 한 것은 가브리엘레의 아리아드네를 향한 마지막 배려였지만 충분치 않았다.

아리아드네가 선호하는 호칭은 ‘콘타리니 백작’이었다.

아리아드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자 가브리엘레는 더 이상의 해명을 포기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몰래 뒤로 고리대금업을 맡기던 레무인 상인이 달아나서 파산하게 생긴 건 알지?”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지난 일주일간 산 카를로에서 제일가는 화제였다.

다들 콘타리니 가 같은 유서 깊은 명문가가 여자 하나 잘못 들였다가 상인의 손에 망하는 일이 생기다니 세상사 참 말세라고들 수군거렸다.

이사벨라의 미래도 어두웠다. 그 집에서 책임져 줄지, 아니, 책임져 줄 수 있을지 여부도 알 수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데 마레 추기경은 그날 저녁 혼자서 그라파 반병을 비웠다.

자식 잘못 키운 것을 반성하는 것이었을까. 하필이면 이폴리토도 부재중이었기에 추기경의 슬픔을 나눠줄 사람이 없었다.

이폴리토는 집에서 달아난 후에 한 번 돌아오긴 했었는데, 매일 방문하는 비앙카의 눈치가 보였는지 다시 나가버렸다.

그렇다고 아리아드네와 이사벨라가 엇나간 슬픔을 나누기도 뭣했다.

작은딸은 큰언니와는 잘 알려진 앙숙이었고 그렇다고 아버지와 유대관계가 깊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이 콘타리니 가를 도와줄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손익계산 분명한 데 마레 추기경이 이득 안 되는 일을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술 반병을 비우고 감상에 빠졌을 뿐이지 사람을 보내 큰딸을 도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기경이 알았다면 자신의 결정을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근데, 대박이 났대!”

가브리엘레의 말에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반전이 가능한 구조인가? 망할 일만 남은 것 아닌가? 하지만 산 카를로 세계관에서는 무슨 일이든 다 가능했다.

“글쎄, 국왕 폐하께서 상설 왕궁 법정을 새로 만드시면서 콘타리니 백작을 그 재판관으로 임명하셨대!”

⋯⋯레오 3세가 낀다면 말이다.

이제까지 왕궁 법정은 개별 사건이 있을 때 그때그때 열렸다.

그런데 아예 왕궁 법정을 항시 열어두고 모든 사건을 거기로 보내겠다는 거였다.

문제는 지금 왕궁 법정으로 갈 만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콘타리니 백작 본인의 채무 불이행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콘타리니 가문을 살려 주신 거네.”

“그렇지!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법관으로 앉아 있는 왕궁 법정에 카멜리아가 고소해 봐. 이기겠니?”

“보통 콘타리니 가문을 구해주려면 8000 두카토를 대신 갚아 주는 게 인지상정인데 말이야.”

“⋯⋯그러게?”

아리아드네는 이게 참 레오 3세다운 일처리라고 생각했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짓으로, 루비나 공작부인만도 못하다.

지금은 잠시 이득인 것 같지만 멀리 보면 사회의 신뢰같이 더 중요한 가치를 망가뜨린다.

“카멜리아는 좀 괜찮아?”

가브리엘레라면 분명히 카멜리아에게도 들렀다 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브리엘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카루소 저택에서 오는 길인데, 카멜리아는 엄청나게 화가 났지만 카스틸리오네 남작님이 잘 달래 주시고 계셔.”

카멜리아는 젊었다. 이렇게 권력으로 자신의 정당한 권리가 짓뭉개져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

본질은 상인이고 하급 귀족 태생인 사람이 수도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온갖 못 볼 꼴은 다 보고 살았다. 그로서는 이 정도는 그저 귀여운 정도였다.

- “있는 걸 뺏긴 건 아니지 않니. 어차피 못 받을 돈이었다.”

- “아빠!”

- “그건 내 외손주를 백작으로 만드는 투자였어. 투자는 원래 날릴 걸 가정하고 넣는 돈이다.”

- “그치만! 계약서엔 차용금이라고 적혀 있었잖아요!”

분기탱천한 아내를 달래는 일에 카멜리아의 남편도 가세했다.

평범한 남자라면 ‘외손주’니 ‘백작’이니 하는 얘기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겠지만 카루소 대표는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 “그래요, 카멜리아. 계약서에 쓰인 대로 흘러가는 세상일이 어디 있어요. 그랬으면 제 재산은 지금이 100배는 족히 되었을 겁니다.”

- “네 남편 말이 맞다. 현명해. 결혼 잘했어. 해코지당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기자.”

가장 가까운 남자 둘이 성심성의껏 말리자 카멜리아의 분노도 수그러들었다. 화도 계속 혼자서만 내면 민망한 법이다. 가브리엘레는 덧붙였다.

“게다가, 카멜리아가 계속 달거리가 없다네?”

“어머!”

카루소 대표와 카멜리아의 부부 금실은 카멜리아의 남편이 평민이라거나 나이가 많다며 빈정거리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게 할 만큼 좋았다.

카루소 대표는 어린 아내가 땅을 밟을 일이 없을 만큼 지극 정성이었고 그의 정성은 물처럼 흐르는 황금으로 표시되었다.

그런데 황금뿐만이 아니라 밤에도 성의가 흘러넘쳤던 모양이었다.

“아직 달거리가 없은 지 오래된 건 아니라서 아기라고 확신할 순 없는데 몸조심을 하긴 해야 하잖아.”

“그렇지.”

가브리엘레는 그 이후로 카루소 대표가 카멜리아에게 하는 게 부럽다는 둥, 자기 남편은 어떻다는 둥 등등의 잡담을 늘어놓다가 은근한 눈매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알폰소 왕자님이랑 연애는 어때?”

뜸을 들이는 품새며 배시시 웃는 양이 사실 이게 오늘 방문의 본론 같았다.

“우리가 옛날에 알폰소 왕자냐 체자레 백작이냐 고르는 놀이를 했었는데, 결국 둘 다 만나는구나!”

가브리엘레는 소감을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폭풍 소회를 쏟아부었다.

“둘 다 만나본 여자의 소감은 어때?”

그녀는 질문하면서 자기가 더 격앙된 것 같았다.

“누가 더 다정해? 당연히 알폰소 왕자님이겠지? 그런데 그런 건 겉에서 보는 걸로는 모르잖아? 의외로 체자레 공작일지도 모르지! 키스는 누가 더 잘해? 꺄아! 이건 체자레 공작 쪽일 거 같은데, 역시 이것도 모르지!”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더니 그 순진무구한 흥분과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밤일은 누가 더 잘해?”

“가비!”

아리아드네는 질겁하며 가브리엘레의 질문을 끊었다. 하지만 가브리엘레는 노련하게 치고 들어왔다.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 없잖아.”

아리아드네는 단호하게 잘랐다.

“안 했어!”

가브리엘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둘 다?”

“둘 다!”

가브리엘레는 원래 새침데기에 가까웠는데 유부녀가 되더니 능글맞음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이 질문을 해준 게 도리어 다행이었다. 단호하게 ‘안 했다’고 대답할 수 있었으니까.

가브리엘레는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었다. ‘한 적 없다더라’라고 동네방네 소문내 준다면 아리아드네의 어깨가 더 가벼워질 수 있었다.

애매하게 ‘알폰소와 체자레 중 누가 키스를 더 잘하느냐’ 같은 질문이었다면 이득도 없고 기분만 나빴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키스한 지가 꽤 되었다. 아니, 절대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주 오래된 건 아니었다.

비앙카의 데뷔탕트 날 알폰소와 나누었던 키스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둘이 사귀기로 한 뒤로는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손가락 하나도 대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그게 체자레 공작과 마장으로 가는 뒷길에서 마주친 다음부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혼자 찔려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알폰소도 내가 체자레와 약혼했던 게 마음에 걸리는걸까?’

아리아드네는 그녀가 남자와 대화라도 할라치면 발작했던 전생의 체자레를 생각했다.

번듯한 귀족만 견제한 게 아니었다. 목동, 하인, 마부까지, 체자레는 남자라면 누구든 싫어했다.

알폰소는 그에 비하면야 양반이었지만,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약혼까지 했다는데 완전히 신경 쓰지 않는 걸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일지도 몰랐다.

‘국왕 폐하께서 날 계비로 만들려고 하셨던 걸 알면 왕궁을 뒤집어엎겠는데.’

아리아드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잘못한 일도 아니고, 있었던 일을 없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갑갑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과거는 표백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더 잘할 거 같아?”

“내가 어떻게 알아!”

* * *

루비나 공작부인은 약이 있는 대로 올라 있었다.

젊은 콘타리니 백작이 아내와 헤어지게끔 체자레와 만날 자리를 주선한 것이었는데, 막상 콘타리니 백작부인은 그 자리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나왔다.

‘상설 왕실 법정은 콘타리니 백작부인 때문에 만든 게 틀림없어!’

여자의 직감이었다. 레오 3세는 입이 싼 편이라 항상 자기가 생각한 정책 구상을 루비나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리고 상설 왕실 법정 따위 이제껏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갑자기 만들어서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에게 맡겨? 이건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에게 주는 레오 3세의 즉흥적인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

루비나 공작부인은 그 눈빛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어언 25년도 더 전이었다.

총각이던 레오 3세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처녀이던 루비나에게 구애하던 때 보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기분이 형용 불가하게 나빴다. 뭐라도 해야 했다.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가 이혼당해서 수녀원으로 쫓겨나면 폐하께서 그년을 잊으실까?’

공작부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화장실로 가는 왕궁 복도를 걸었다. 그녀로서는 드물게 혼자 걸을 기회였다.

‘아니면 차라리 콘타리니 백작과 사이가 좋아져서 둘째라도 가지면 괜찮아지려나?’

이쪽은 가능성이 있었다. 배가 불러오고 살이 찌면 못생겨질 테니 레오 3세는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에게서 관심을 끊을 것이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그 긴 세월 총애를 잃지 않았으면서도 괜히 자식이 체자레 하나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일단 임신을 시킨 이후에 수도에서 내보내 어떻게든 레오 3세 눈에만 안 띄게 하면 된다.

‘아오! 그런데 누구 좋으라고!’

이사벨라가 오타비오와 사이가 좋아져서 둘째도 낳고 다복하게 살라고 판까지 깔아줘야 한다고? 루비나 공작부인이 내적 갈등에 쌓여 있을 때였다.

“어머나!”

루비나는 뾰족한 무언가에 부딪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드니 그 앞에는 알폰소 왕자와 왕자의 기사들이 지나고 있었다.

루비나가 찔린 물체는 그들이 가득 들고 있던 훈련용 나무 창이었다.

“왕자!”

가뜩이나 기분이 저조했던 루비나 공작부인은 독이 가득 올라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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