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우물에 푼 독
“앞을 보고 다니셔야죠!”
루비나 공작부인의 고함에 알폰소 왕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만프레디 경이 그답지 않게 무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예를 지키십시오, 부인.”
루비나 공작부인이 신분이 자기보다 더 높은 알폰소 왕자에게 말을 붙인 것을 탓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치자면 백작가의 차남인 만프레디 경도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답할 신분이 되지 않았다.
“감히!”
루비나 공작부인은 격분했다. 그녀는 만프레디 경은 쳐다보지도 않고 알폰소 왕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왕자! 아랫사람 간수 제대로 하시오!”
“부인!”
만프레디 경을 위시한 기사들이 그녀를 제지했지만 루비나 공작부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간수가 문제가 아닌가?”
여기까지 말한 루비나 공작부인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저 분수도 모르는 만프레디 가의 천방지축은 말할 것도 없고.”
“뭐요?!”
만프레디 경이 발끈했지만 루비나 공작부인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도 그렇고⋯⋯. 애초에 사람 고르시길 잘못 고르시는 것 아닙니까?”
만프레디 이야기를 할 때까진 태연자약하던 알폰소의 표정이 아리아드네가 언급되자마자 변했다.
알폰소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루비나를 제지했다.
“공작부인.”
그러나 루비나는 알폰소의 평정심에 미세한 균열이 간 것을 놓치지 않았다.
“왕자님. 저는 왕자님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루비나는 언제 격분했냐는 듯이 여유작작한 미소를 띤 채였다.
“마르그리트 왕비님께서 돌아가시고 왕족 중 여자 구성원은 저 밖에 남지 않았으니, 왕자님의 혼사를 살필 사람도 저밖에 없지요.”
만프레디 경이 큰 소리로 콧방귀를 뀌었으나 베르나르디노 경이 그를 제지했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을뿐더러, 레오 3세로부터의 후환을 염려한 것이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루비나는 말을 이었다.
“그대의⋯⋯. 약혼녀도 아니고, 참. 호칭이 마땅치가 않군요. 그래, 여자친구. 제 며느리가 될 뻔한 아이라 잘 알고 있는데.”
루비나 공작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리아드네 데 마레는 체자레와 약혼했었으며, 알폰소는 국왕으로부터 그녀와의 교제 허락조차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미소의 의미를 이해한 알폰소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왕자님의 짝이 될만한 아이가 아닙니다. 체자레와 약혼했을 당시에도 딱히 탐탁지 않았어요. 영 몸가짐이 단정치 못해서.”
그녀는 과장되게 언성을 높였다.
“제아무리 약혼녀라고 하더라도, 혼전에는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 글쎄, 제가 연 무도회에서 뒷방에 둘이 숨어 들어가더니, 옷이 제대로 흐트러진 채 우당탕 복도에 굴러 나오더라고요!”
베르나르디노 경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만프레디 경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죄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묘사하는 저 사건 당시 예사크 전쟁터에 있었던지라 뭐라 반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아무리 물어봐도 딱 잡아떼긴 하던데, 누가 봐도 끝까지 간 것 아닙니까? 그 언니 되는 아이는 대놓고 진도 나갔던데 여동생이 좀 더 음험하고 간교할 따름이지 어미가 없어서 그런지 똑같이 가정교육이 엉망입니다!”
루비나는 두 자매의 사건에 각각 얽힌 남자가 자기 아들 한 명임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체자레가 받은 가정교육이야 알폰소가 받은 가정교육과 비슷했겠지. 최소한 레오 3세가 한 절반은 똑같았을 것 아닌가.
“하필이면 제 무도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 내 원 참 부끄러워서 혼났습니다!”
알폰소 왕자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이런 이야기, 그 여자가 왕자님께 이실직고하진 않았겠지요?”
루비나 공작부인은 자신에게 누릴 자격이 없는 도덕적 우월함을 뒤집어 쓴 채 아리아드네를 비난했다.
“과거사가 있다면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고 그래도 사귈 건지 상대방한테 선택권을 주는 게 정직한 태도 아닙니까?”
루비나는 당연히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에게 이야기했을 리가 없을 거라고 단정하고 이야기했다.
“역시 가정교육을 못 받은 집 자식들은 이런 데서 티가 나는⋯⋯.”
“이미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알폰소의 날 세운 목소리가 루비나의 말을 잘랐다.
“예?”
“이미 관련해서 이야기 다 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알폰소 왕자의 표정은 반쯤은 냉랭했고 반쯤은 심드렁했다. 만프레디 경은 당황해서 알폰소 왕자를 바라보았다.
“굳이 이런 말씀을 왜 전하시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만프레디 경보다도 더욱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루비나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답에 말까지 더듬으며 답했다.
“나, 나는⋯⋯. 그대의 집안 어른으로서⋯⋯.”
알폰소 왕자는 피식 웃었다.
“집안 어른이요?”
왕자의 음성은 그로서는 매우 드물게 날카로웠다.
“집안 어른은 아랫사람을 굽어살피고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부인께서는 나에게 그런 도움을 단 한 번이라도 주신 일이 있었는지?”
알폰소도 눈뜬장님이 아니었다.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산 카를로는 물론이요 전국 모든 요지에 왕자의 눈과 수족이 슬슬 자리들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도 이제 예사크에 있는 자신에게 갈 물자와 지원을 지연시킨 것이 루비나 공작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세력까지 갈 것도 없이 통밥만 조금 굴려봐도 뻔한 일이었다.
“당신은 내 아버지의 여자일 뿐입니다. 아바마마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당신을 용인합니다만, 거기까지입니다.”
알폰소는 뭔가 혐오스럽고 신기한 것을 보는 눈길로 루비나 공작부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가까이 오지 마시길.”
나무 창에 찔린 것까지 다 그녀의 잘못처럼 만들어버리는 일별이었다.
“선 넘지 마시고, 뭐라도 되는 줄 알지 마시고, 무엇보다도.”
왕자는 오물을 뱉어내듯이 내뱉었다.
“내 어머니 이름, 그리고 내 여자 이름, 그 더러운 입에서 꺼내지 마시길.”
알폰소는 탑처럼 두꺼운 몸체를 돌렸다. 귀 아래까지 자란 황금색 고수머리가 흔들렸다.
“가자.”
황금의 왕자님은 그대로 기사들을 이끌고 저벅저벅 걸어가 버렸다.
만프레디 경만 어딘가 똥 싸다 만 것 같은 불편한 걸음새로 어기적거리며 걸어갔을 뿐이다. 뒤에 혼자 남은 루비나 공작부인은 분통을 터트렸다.
“뭐, 뭐야 이건?!”
그녀가 예상했던 진행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떨어진 전개였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남자를 아주 잘 알았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저런 이야기를 듣고도 남자가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가 예사크의 곤이야? 이게 말이나 돼?”
루비나는 복도에 홀로 서서 저주를 퍼부었다.
“성인(聖人)인 척 해 봐라! 새파랗게 어린 것이! 결국엔 너도 사람이야! 새벽에 갑자기 깨달음이 확 오는 순간이 올걸?! 나는 남이 먹다 남긴 거나 주워 먹는 바보였구나, 멍청이였구나 하고 말이야!”
그녀는 체통 머리 없이 침을 뱉었다.
“퉷!”
지나가던 하녀들이 루비나 공작부인의 그런 꼬락서니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루비나 공작부인은 이런 자기 모습을 남이 보았다는 사실에 더더욱 분노했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저것들을 당장 붙잡아서 성 밖으로 쫓아내!”
증거 인멸도 하고 화풀이 대상도 만들고, 일석 이조였다.
* * *
지난 왕궁 방문 이후로 이사벨라는 기세가 등등했다. 성공하는 별을 타고난 사람들이 따로 있다고 했는데, 그녀야말로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콘타리니 백작이 상설 재판관이 되셨다고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네요!”
오타비오가 상설 왕실 법정의 재판관이 되자 수도 가문들은 콘타리니 백작가에 줄을 대려고 난리였다.
재판권의 독점은 대단한 이권이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이사벨라가 올려다보지도 못할 지위와 평판의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몰려와 입바른 소리들을 해댔다.
귀부인들의 칭찬에 이사벨라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우훗, 그런 걸 가지고 뭘요.”
듣는 사람이 토할 것 같은 겸양을 떨어보는 일은 이사벨라가 꼭 해 보고 싶었던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다.
“선대의 유산을 계승한 것뿐인걸요. 공명정대한 재판으로 이름을 떨쳐야 비로소 아버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겠지요.”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의 절반쯤은 저게 개소리라는 걸 알았고, 나머지 절반은 이사벨라의 헛소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전자는 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부인이었고 후자는 그들이 데려온 딸이나 며느리였다.
가브리엘레 데 몬테펠트로는 며느리 자격으로 이 자리에 오기는 했으되 이사벨라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이는 그녀가 이 자리의 정치적 함의를 꿰뚫을 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사벨라가 얼마나 오타비오를 하찮게 여겼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어머니인 몬테펠트로 노후작부인은 최고로 깍듯한 접객용 미소를 띠며 이사벨라와 콘타리니 가문을 추켜올렸다.
“훌륭한 선대의 유산을 계승해도 당대에 무너지는 젊은이도 있고 신기원을 열어젖히는 중시조(中始祖)도 있습니다.”
주름진 얼굴에 인자한 미소는 왕궁 박물관에 접대의 본보기로 박제를 해 놔도 좋을 만큼 에티켓의 교본대로였다.
그녀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술술 말했다.
“상설 왕궁 법원은 왕국의 역사에서 최초입니다. 콘타리니 백작의 쾌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건 콘타리니 백작부인, 당신의 내조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몬테펠트로 노후작부인은 여기서 미소를 지었는데, 그녀는 자기 말이 너무 의미심장하거나 중의적으로 들리지 않도록 딱 알맞은 정도로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노후작부인이 한 말은 자칫 잘못하다간 ‘레오 3세는 이사벨라 때문에 오타비오에게 상설 법원의 재판관 자리를 주었다’로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 든 부인이라면 국왕의 지나친 호의가 총신에 대한 총애일 수도 있지만 신하가 가진 것에 대한 부적절한 관심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 알았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쏟아지는 주목에 들뜬 이사벨라는 그 웃음을 대충 넘겨버렸다.
“호호호, 과찬이세요!”
마음이 부푼 그녀에게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이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왕국 최고의 재판관이 되신 부군께 상인 놈들에게 본때를 좀 보여달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그녀의 남편은 예사크 전쟁에서 갓 귀국한 알폰소 왕자를 만났을 때도 귀족에 대한 감세와 상인에 대한 증세를 주장한 바 있었다.
바닷가 요지의 영지를 차지한 대영주가문인 구아티에리 후작가는 자신의 가신 가문으로 시작해 지금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와 좋지 못한 관계였다.
결국 당대의 카스틸리오네 남작이 구아티에리 후작가에 허리를 굽혀 영지의 기반을 다 버리고 수도로 올라오는 것으로 그 갈등이 봉합되었지만 영지의 위치가 지나치게 좋은 나머지 다른 상인 길드는 계속 나타났고 그들은 꾸준히 자치권을 요구했다.
이는 대를 이어 반복되는, 몹시 골치 아픈 일이었다.
당대 구아티에리 후작은 중앙 정계에서 차지한 그들의 입지를 이용해서 상인들이 설 자리를 아예 없애 버릴 작정이었다.
구아티에리 후작부인이 은근슬쩍 화두를 던졌다.
“요사이 상인 놈들이 분수를 모르고 너무 거들먹거리며 다니지 않습니까?”
디파스칼 노백작부인이 이때다 하고 화제를 잡았다.
“분수를 모르고 말고요! 천한 것들이 비단으로 온몸을 감싸고 다니는 걸 보면 아주 말세다 싶습니다!”
디파스칼 노백작부인은 바로 얼마 전 작은딸을 시집보냈다.
디파스칼 가의 경사는 하필이면 비탈리 카루소와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의 결혼식 바로 다음 날이었다.
카멜리아의 결혼식은 과장을 섞어 나무에는 보석이 달려 있고 분수에서는 황금이 흘렀다던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직후에 열렸던 디파스칼 백작가 둘째딸의 결혼식은 좋게 말해 조촐했고 올라간 눈높이의 하객에게는 아무래도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최근에 상인 계급의 여자에게 눈도장을 찍어놓은 목걸이를 뺏긴 귀부인, 같은 미용사를 쓰게 되어 기분이 상한 귀족 영애, 상인이 자기보다 더 비싼 무어인 노예를 데리고 나와서 쪽팔렸다던 귀부인의 성토가 줄줄이 이어졌다.
“상인 나부랭이가 저한테 자기 노예는 30 두카토나 해서 부채를 두 시간이나 쉼 없이 부칠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에!”
“더 비싼 노예가 부치는 바람을 맞는 게 모두에게 더 시원할 테니 제 노예는 옆으로 치우라던 거 있죠?!”
‘더 비싼 무어인 노예’라는 말에 이사벨라는 피식 웃으며 응접실 문가에서 호위를 서는 ‘아고스토’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흘긋 이사벨라를 마주 바라보았지만 별달리 기분 상한 기색은 내비치지 않았다.
‘무어 제국의 귀한 핏줄이라고 했지.’
아고스토보다 더 비싼 노예는 산 카를로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벨라는 내심 우쭐해졌다. 그 와중에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 귀부인들은 아우성을 쳤다.
“법정에서 아주 혼쭐을 내 주세요!”
“귀족의 위엄을 세우셔야 합니다!”
이사벨라는 갑자기 몹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분. 사실, 여러분께서 기분이 상하신 건 법률적인 문제로는 아니잖아요.”
귀부인들은 이사벨라가 자신들의 청을 거절하는 줄 알고 단체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지금 충분히 갑질을 할 위치에 있었고, 그들은 떨떠름한 기색을 드러낼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 그렇죠! 법적인 문제는 아니긴 하죠.”
“역시 공명정대해. 역시 이사벨라 데 콘타리니야.”
“아버지께서는 추기경에 남편은 그 콘타리니 가문이니 그럴 수밖에요.”
귀부인들의 무지성 칭찬과 호들갑에 이사벨라는 약간 짜증이 났다. 아부를 하려고 해도 제대로 해야지. 방향이 틀렸어, 이 사람들아.
“굳이 바깥양반들 귀찮게 할 거 있나요.”
그녀는 보랏빛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우리 선에서 처리하면 되는걸.”
감히 그녀에게 대든 카멜리아 카루소에게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저한테 상인 놈들에게 분수를 알게 해줄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