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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46화 (346/733)

<제346화> 한 길 사람 속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티베리 강가를 따라 조성된 고급 귀금속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똑같이 마차를 타고 거니는 데이트였지만 알폰소는 예전, 소년 왕자 시절처럼 아리아드네를 철저하게 숨기지 않았다.

왕자의 기사단이 철통 호위를 했으되 마차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시민과 상인들은 누구나 왕자 옆자리, 흑발의 미녀를 볼 수 있었다.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부끄러울 정도였다.

마차 안에서 서로에게만 집중했던 전과 달리 이번엔 바깥 구경을 하는 것도 차이였다.

천천히 속보 정도로 모는 마차를 타고 귀금속 좌판을 둘러보던 알폰소는 문득 말했다.

“저거 자기에게 어울릴 것 같다.”

제법 간지러운 호칭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얼굴을 붉혔다.

“세워!”

마차가 딱 귀금속 가게 앞에서 멈췄다. 알폰소는 다시금 자기가 봤던 좌판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큼지막한 로돌라이트 가넷 반지가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만 웃고 말았다.

“푸훗!”

“아니, 왜 웃지?”

알폰소는 진지하게 물었다.

“색깔도 예쁘고, 크기도 그대 손에 적당한 것 같고?”

로돌라이트 가넷은 매혹적인 장미색으로, 라탄 제국 이전부터 에트루스칸 반도에서 몸치장용으로 많이 쓰인 사랑받는 보석이었다.

하지만 반도 북부에서 흔하게 나는지라 가격대가 낮아서 주로 은에 세팅해 평민의 결혼 예물로 사용했다.

왕자의 배우자는 물론이요 귀족가의 성인 여성이 착용하기에도 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이게 썩 알폰소답다는 생각을 했다.

근자의 그는 언제나 자기 판단과 자기 주관에 따른다.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지 않았다.

자기 눈에 예뻤기에 권한 것이다. 어차피 사치품을 살 돈 정도는 흐르고 넘치도록 있는 남자였다.

루비가 로돌라이트 가넷보다 귀하고 비싸다는 사실은 알폰소의 고려 외였다.

“아니야. 마음에 들어.”

로돌라이트 가넷의 뜻말 중 하나는 ‘영원한 행복’이었다.

“우리, 가까이에서 볼까?”

알폰소의 권유에 따라 마차에서 내린 그들은 로돌라이트 가넷 반지를 살펴보고 흥정 없이 값을 치렀다.

상인은 크게 기뻐하며 감사했고 주변 사람들은 살아생전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왕자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에 체면 따위 버린 채 몰려들어 이 선남선녀 커플을 구경했다.

“참 운이 좋으신 겁니다! 최상급의 로돌라이트 가넷을 황금 난집에 물렸어요! 이런 물건은 몇 년에 하나 나올까말까 합니다요!”

특이하게도 은이 아니라 금에 세팅된 반지였다. 아리아드네는 이게 자기에게 오려고 그랬나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상인으로부터 반지를 건네받았다. 알폰소는 권유했다.

“끼어 보지 그래?”

“그럴까?”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말대로 장갑 낀 오른손 약지에 새 반지를 끼워보았다.

맨손 검지에 끼울 때의 굵기를 고려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알폰소가 그녀를 제지했다.

“왜 장갑을 끼고 해. 맨손에 하지.”

그리고 그는 언뜻 그녀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기왕이면 왼손 약지에.”

아리아드네는 그대로 굳었다. 그녀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쳤다.

왼손 장갑을 벗으라는 말에 일단 첫 번째로 긴장했고 왼손 약지라는 말에 두 번째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체자레는 영원히 그 손가락을 허여하지 않았다. 숫제 물리적으로 잘라버렸다.

잠시 미동도 없던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왼손 약지⋯⋯?”

알폰소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일체의 딜레이 없이 답했다.

“그래. 왼손 약지.”

지금 그 손가락은 아주 잘 붙어 있으며, 반지를 끼워주려는 알폰소는 그녀의 옆에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정적인 처리에 조금 시간이 걸렸던 아리아드네의 입가에 드디어 감동의 미소가 번져갔다.

“알폰소⋯⋯.”

하지만 그녀에게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정확히는 왼손 약지가 문제라기보다는 장갑을 끼지 않은 왼손이 문제였다.

아직 사람들 앞에서 장갑을 벗어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만 무녀 할머니는 아리아드네에게 ‘웬만하면 왼손의 핏자국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가능성이 0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매달 초, 무녀 할머니는 자기가 지기(地氣)를 뽑아 공양을 지내 주술의 힘을 보충해 주겠지만 달이 사그라질 때가 되면 주의하라고 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땅은 힘이 약해 동쪽 땅 만큼의 힘을 낼 수가 없으니 달의 끝자락에 가까워지면 주술이 풀릴 수가 있다며 말이다.

지금은 하현달이 슬슬 그믐달에 가까워져 갈 때였다.

아리아드네는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왼손 핏자국을 만인에게 들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신 오른손에 끼워볼게.”

그녀는 오른손 장갑을 벗어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보았다.

반지는 검지에 끼우려던 그녀의 예상보다 조금 더 작아, 약지에 꼭 들어맞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예쁘게 잘 맞아.”

미안한 마음에 원래 반지를 보고 웃으려던 것보다 부러 더 밝게 웃었다.

“고마워.”

그런 아리아드네를 보며 알폰소도 웃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그들은 시장 상인들과 장을 보러 온 시민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해 주고서야 다시 마차에 탈 수 있었다.

다시 둘만 있는 공간으로 돌아온 아리아드네는 좀 전,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보라던 알폰소의 제안을 거절한 게 못내 미안한 마음에 그를 불렀다.

“알폰소.”

“응?”

로돌라이트 가넷의 뜻말 중에는 ‘저항할 수 없는 매력’도 있었다.

그녀는 오른쪽 맨손에 장밋빛 반지를 낀 채, 알폰소와 눈을 맞추고 웃었다.

“이 반지, 오늘 입은 옷에도 어울리는 거 같아.”

아리아드네는 오늘 드물게 밝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소매 리본이며 치맛단에 놓인 자수,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파틀렛까지 모두 장미색 내지는 짙은 자주색이었다.

그녀는 부러 허리를 뒤로 젖히며 어깨를 한쪽만 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세트로 목걸이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알폰소의 시선이 절로 붉은 파틀렛에 닿았다. 그리고 만난 아찔한 실루엣에, 그 자리에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고정되었다.

“그렇지만 귀걸이나 목걸이가 아니라 반지인 것도 기뻐.”

알폰소의 귀에는 아리아드네의 음성이 분명히 들렸지만 뜻이 제대로 입력되지는 않았다.

붉은 파틀렛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와 단차 있는 음영이 시각적으로 압도적이라 소리까지 처리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렸다가 닫히는 붉은 입술과 검은 입동굴은 덤이었다. 알폰소의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리아드네는 선물받은 반지를 낀 손으로 알폰소의 뺨을 살짝 쓸어내렸다.

장갑을 벗은 맨손의 촉감이 그의 볼에 닿았다.

“고마워.”

아리아드네의 말꼬리는 마치 질문인 양 살짝 올라가 있었다. 무엇을 구하는 물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폰소는 더운 숨을 길게 뱉어냈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그는 간신히 단어를 뱉어냈다.

“하, 아리⋯⋯.”

알폰소는 다리를 살짝 더 넓게 벌리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러지 마.”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차 맞은편 좌석에 앉은 아리아드네는 몸을 좀 더 앞으로 기울이며 무릎을 부딪쳐왔다.

“왜?”

그녀의 말투는 사뭇 도발적이었다.

그녀는 오늘 이 결혼적령기를 훌쩍 지난 남녀의 건전하기 짝이 없는 연애에 종지부를 찍을 작정이었다.

알폰소와 그녀는 스킨십이 처음인 사이도 아니었다.

예전, 어릴 적에 이미 키스 따위는 다 해치워 버린 관계였고 알폰소는 이번에도 그녀에게 만나자고 고백하기도 전에 입술부터 들이댔던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대차게 뺨을 맞았었지.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수도승처럼 변했다.

그러니까, 신체 건강한 것도 알고, 내외하는 사이인 것도 아니고, 이젠 서로 좋아하기까지 하는데 남자가 자기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는 것은 아리아드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알폰소는 애써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중얼거렸다.

“⋯⋯넌 내가 무슨 마음인지 꿈에도 모를 거야.”

이사벨라가 산 카를로에서 가장 조형미 있는 얼굴의 소유자라면 아리아드네는 산 카를로에서 가장 뇌쇄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

십 대 초반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그 힘은 그녀가 성숙해가면 갈수록 폭발적이었고 저항하기 어려웠다.

아리아드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이걸 왜 참아야 해?”

그녀는 알폰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너 원래 안 참았잖아.”

아리아드네의 직설적인 질문에 알폰소의 얼굴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이 올라왔다.

“⋯⋯그랬지.”

그는 아리아드네를 밀어냈다.

“지금은 후회해.”

그는 다시 자리를 고쳐 앉았다. 여전히 다리를 벌린 채긴 했지만 똑바로 단정한 자세였다.

알폰소에게 부드럽게나마 밀쳐내진 아리아드네는 충격으로 굳었다. 알폰소는 그런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감싸며 도닥였다.

“우리 돌아가자.”

말이 없는 그녀를 그가 달랬다.

“집에 데려다줄게. 오후에 약속 있다며.”

아리아드네는 여전히 표정이 안 좋았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볼을 쓸었다.

“반지 자랑해. 남자친구가 사줬다고. 왼손 약지에 끼우라고 했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리아드네의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반지. 날 사랑하지 않아서 키스하지 않는 거라면 왜 굳이 반지를 사 줬겠어?’

전생의 체자레처럼 스킨십은 즐길 대로 즐기면서 미래의 약속은 끝내 내놓지 않는 것보다는 이쪽이 백번 낫다.

나쁜 남자에 길들여져 있어서 사랑의 증거를 안 좋은 쪽으로 찾으려 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심호흡을 하며 알폰소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 * *

오후에 ‘친구와의 약속’이 있지 않냐는 알폰소의 말과는 달리, 아리아드네의 응접실에는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렇지. 와줘서 고마워.”

그 손님이란 줄리아 데 발데사르였다. 그들은 절친한 친구였지만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줄리아의 오빠인 라파엘이 아리아드네에게 고백하고 차인 날, 산 카를로를 아예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로 발데사르 후작부인은 자리보전하고 누워 한참 동안이나 산 카를로 사교계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줄리아는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는 잘 지낸대. 중남부 칼리엔다 교구로 내려가서 사제서원을 받았어.”

“⋯⋯.”

“예사크 지방으로 다녀온 여행과 스쿠올라 디 그레타에서 했던 교육 봉사가 모라토리움으로 인정이 되어서, 수행 봉사를 더 안 해도 되었나 봐.”

아리아드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그녀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줄리아는 가만히 있다가, 피식 웃었다. 줄리아는 표정이 원체 무표정에 가깝고, 무표정할 때는 날카로워 보이는 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저 웃음이 비웃음이나 비난일까봐 두려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줄리아의 다음 말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계집애. ‘시뇨르 라파엘이 사제서원 바로 받으셔서 너무 잘됐다’ 같은 소리 했으면 한 대 때리려고 했다.”

아리아드네의 어깨에서 긴장이 탁 풀렸다.

“보고 싶었어, 이 망할 계집애야.”

줄리아의 말에, 고개 숙인 아리아드네의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런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감싸 안아 주었다.

아리아드네는 줄리아를 마주 얼싸안은 채 속삭였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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