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합리적 의심
서로 반가워하고 이러저러한 근황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참이 지났다. 줄리아가 조심스레 운을 뗀 건 그 이후였다.
“사실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은 이야기가 있어서야.”
“무슨⋯⋯?”
아리아드네의 눈매는 빼죽한 편이었지만 줄리아는 항상 저 얼굴이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취약했다.
“얘기해줘야 할지 말지 고민 오래 했는데⋯⋯.”
줄리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알아야 대비도 할 것 같아서.”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루비나 공작부인이 얼마 전에 알폰소 왕자에게 입을 놀렸다나 봐. 네가 체자레 공작과 그⋯⋯. 깊은 관계를 가진 게 틀림없다고.”
아리아드네의 초록색 눈이 완연하게 커졌다. 첫 번째 감정은 경악이었다.
“뭐?”
루비나는 그 경위가 어찌 되었건 간에 일단 피사노 공작부인이었고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가장 지체 높은 여인이었다. 지켜야 할 품위가 있었다.
게다가 알폰소는—루비나가 생각하고 싶어하는 대로라면 특히나—그녀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결단코 공작부인이 아들뻘인 왕족에게 입에 올릴 주제가 아니었다.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의 첫 감상에 십분 동감했지만 침착하게 경위의 전달에 집중했다.
“예전에 루비나 공작부인 주최의 무도회에서 체자레 공작이 우리 오빠와 싸웠던 일 있잖아?”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있었지. 그런데?”
“그걸 치정 싸움이자 그렇고 그런 일이었다고 왜곡했다네.”
그날 아리아드네가 허술한 옷차림으로 남들 눈에 뜨이기는 했었다. 평판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일은 결국엔 결정적인 한 방이 없었다. 이사벨라처럼 현행범으로 만인 앞에서 딱 걸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아리아드네는 이게 기껏 해봤자 귀부인들을 동원해 사교계에 은근히 퍼트리는 뒷소문 정도에서 끝날 일로 여겼을 뿐이다.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닌 루비나 본인의 입에서 나올 줄은, 그리고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이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친 인간!”
경악 다음은 분노였다.
루비나, 품위라고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는 여자였다. 게다가, 머릿속에는 온통 음란마귀만 득실대는 것이 틀림없었다.
“황달 걸린 놈 눈엔 온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더니!”
“자기는 젊어서 무도회에서 그러고 다녔나 보지.”
줄리아가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루비나 공작부인의 전직(前職)에 대해서는 말이 많잖아. 국왕 폐하를 처음 만난 자리에 관련해서도.”
지방에서 상경한 데 마레 추기경을 부모로 둔 아리아드네는 자세히 모르는 일이었지만 수도 귀족의 자제인 줄리아는 부모님께 대충 건너 들은 풍월이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전 남자친구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한마디 보탰다.
“가정교육만 봐도 공작부인의 평소 신조가 뻔한데.”
산 카를로, 아니 중앙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무도회 스캔들을 만든 남자는 루비나 공작부인의 아들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이번 일까지 무도회 스캔들로 친다면 전과 2범이다.
물론 딸 둘을 다 연루시킨 데 마레 추기경도 엉망인 가정교육의 혐의에서 벗어나긴 어렵겠지만 최소한 그는 가정교육 전담자는 아니었다.
줄리아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다행히 왕자님은 ‘이미 이야기 다 해서 알고 있는 일이다’라고 일축하시기는 했대.”
하지만 이 부분이 어딘가 이상했다. 뭔가 퍼즐이 맞지 않았다.
줄리아에게는 아리아드네가 체자레 공작과 깊은 관계까지 갔었다면 자기한테 얘기를 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어색해질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가 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을 거라는 우려가 오늘 그녀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었다.
“사실⋯⋯. 둘이 이야기 나눈 거, 아니지?”
분노가 가신 후의 아리아드네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도리질을 쳤다.
“그런 대화, 나누지 않았어.”
참담한 심경이었다.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했을 리가 없잖아, 그런 흉한 얘기.”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당신의 형과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줄줄 설명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수치스럽고 서러웠다.
그렇다고 그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자니 최근 알폰소가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을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루비나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줄리아가 아리아드네를 다독였다.
“나랑 이야기할래? 아니면 조금 쉴래?”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의 심경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 같았으면 바로 자리 보전하고 누워 사교계 따위 6년쯤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아드네가 뭐든지 서걱서걱 잘 처리해내는 건 알았지만 이건 평판에 직결되는 일이었다.
좀 더 본질에 가까운, 귀족가 딸의 근원적인 자부심의 뿌리 같은 거였다.
해내면 멋있지만 반드시 잘 할 필요는 없는 정치나 사업 같은 일과는 원시적으로 달랐다.
“아니, 아니아니.”
아리아드네는 눈물을 쓱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폰소와⋯⋯. 알폰소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줄리아는 깜짝 놀라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바로?”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로서는 만류의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결국에는 한 번 거쳐 가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가 알폰소와의 관계에서 최초로 정면돌파를 선택한 날이었다.
* * *
“아리,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알폰소 입장에서는 헤어진 지 채 한 시간도 안 된 여자친구가 바로 다시 만나자고 한 상황이었다. 저렇게 물어보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 입장에서는 지금 작은 말 하나하나가 전부 다 서운했다.
“우리, 얘기 좀 해.”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심상치 않았다. 아리아드네의 이런 기색에 알폰소의 청회색 눈 역시 가라앉았다.
그는 물었다.
“어디 조용한 데라도 갈까?”
알폰소가 왕자궁에서 그녀를 인도한 곳은 그의 접견실이었다. 이는 아리아드네의 섭섭함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응접실도, 개인 공간도 아니고 접견실이라니⋯⋯.’
여긴 민원인도 들어오는 공간이다. 전혀 개인적인 곳이 아니었다.
알폰소가 자신에게 선을 긋고 있다는 생각에 아리아드네의 기분은 극도로 저조해졌다.
왕궁의 사용인이 차 두 잔을 내온 후 자리를 떴고, 그녀는 조용히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짜고짜 ‘나 체자레랑 잔 적 없어’라고 외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참을 앉아 있던 그녀가 꺼낸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반대로 알폰소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오전에 무난하게 데이트를 마쳤고 아리아드네를 백작저로 안전하게 잘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반지까지 선물해 주었다. 여자친구의 이런 태도 변화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반지가 마음에 안 들었나? 목걸이와 귀걸이까지 세트로 사 줬어야 했나? 마차를 너무 먼 곳까지 타고 가서 힘들었나?
백성 생활 시찰과 겸사겸사해서 가는 게 아니라 데이트에만 치중해서 갔었어야 했나?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이 알폰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저 중 그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잘⋯⋯. 모르겠는데?”
알폰소의 낮은 목소리가 주의 깊게 답했다.
“딱히 없어, 할 말은.”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귀에는 이게 단호한 회피로 들렸다. 그녀는 왈칵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큰 녹색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알폰소는 기겁하며 아리아드네의 손을 잡았다.
“아리, 왜 그래. 괜찮아?”
이것은 예기치 못한 행동이었다.
그녀의 장갑을 넘어 느껴지는 알폰소의 맨손은 두툼하고 따스했다. 그 체온이 아리아드네에게 용기를 주었다.
“⋯⋯며칠 전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알폰소는 경청하며 아리아드네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가 아프지 않을 정도까지만, 그러나 애정이 느껴질 정도로. 아리아드네의 문장에 힘이 실렸다.
“⋯⋯루비나 공작부인과 대화를 나눴다는 이야기 들었어. 체자레에 대해 얘기했다고.”
그 말에 알폰소의 표정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아리아드네의 손을 마주 잡은 알폰소의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아리아드네의 심장이 덜컹, 흔들렸다.
그녀는 그만 알폰소가 자기 손을 놓기 전에 먼저 알폰소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 버리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라기에는 아리아드네 입장에서는 억겁의 시간같이 느껴진—침묵을 지킨 후, 알폰소는 짧게 내뱉었다.
“그걸 ‘대화’라고 부를 수 있나.”
알폰소의 입장에서, 그건 대화라기보단 루비나의 배설에 좀 더 가까웠다.
하지만 알폰소의 기색을 예민하게 살피던 아리아드네는 관자놀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자괴감과, 동시에 공포와 싸우며 힘겹게 단어들을 그러모았다.
“그 일에 대해서⋯⋯. 내가 해명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아리아드네는 여기 오면서 ‘해명’이라는 단어는 결코 쓰지 않겠노라 다짐에 다짐하며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에는 ‘해명’할 거리가 없었다.
체자레와의 약혼은 외부적 불가항력으로 일어난 일이었고 루비나가 문제 삼은 무도회장 사건도 결국엔 체자레가 관계를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설명’을 할 거였지 해명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알폰소를 보자 괜스레 죄인이 된 기분에 그녀는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공작부인의 말대로, 체자레와 깊은 관계였다는 얘기는 사실이⋯⋯.”
“거기까지만.”
알폰소는 그답지 않게 손을 들어 아리아드네의 말을 제지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건 이미 내 안에서 정리가 다 된 일이야.”
그의 청회색 눈은 몹시 깊어 알폰소가 진심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몹시 잘 꾸며낸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리아드네의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알폰소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피사노 공작과의 약혼이 영 마음에 걸렸다면 산 카를로로 돌아와서 널 다시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여기까지 말한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기분 좋은 일까지는 아니야.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으니까, 우리 그냥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말자.”
아리아드네는 입을 살짝 벌리고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듣기 좋은 이야기였다.
완벽하게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이야기였다. 상상조차 안 해본, ‘좋은 남자’의 사전적 정의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미스터리가 끝내 풀리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나 하나만 물어볼게.”
그녀는 심호흡했다.
“너 요새 나 왜 안 만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