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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번 생엔 내가 왕비야-348화 (348/733)

<제348화> 참을 수 없는

알폰소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뭐라⋯⋯고?”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앙다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너 왜 나 안 만지냐고.”

그녀의 두 번의 인생을 통틀어 그녀를 만지고 싶어하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만나는 남자는 물론이요 만나지 않는 남자도 그녀를 원했다. 그리고 한 번 시작한 후에는 멈추지 못하는 게 상례였다.

“말이 안 되잖아.”

과거의 알폰소도, 전생의 체자레도 한 번 손을 댄 후엔 멈추기를 정말로 힘들어했다. 꿀단지에 빠진 곰이요, 약에 취한 고양이 같았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아리아드네는 답답함에 꼬았던 다리를 바꿔 꼬았다. 상체가 반대편으로 기울며 탐스러운 가슴이 쏟아질 듯 흔들렸다.

알폰소는 질식할 것만 같은, 아니 질식하고 싶은 기분에 평정을 찾으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알폰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를 추궁했다.

“내가 체자레와 깊은 관계까지 갔다고 생각해서 안 건드리는 게 아니라면 이럴 이유가 없지 않아?”

뚜렷한 녹색 눈동자가 알폰소를 곧게 바라보았다. 고양잇과 동물처럼 끝이 치켜 올라간, 둥근 눈이었다.

눈꺼풀이 깜박, 닫혔다 열리며 짙은 속눈썹이 떨렸다. 그의 호흡도 함께 떨렸다.

그녀는 의자에 앉은 채로 알폰소 쪽으로 상체를 쭉 내밀었다.

알폰소는 접견실에 놓인 윙체어에 앉아 있었고 아리아드네는 그 바로 옆, 한 단 아래에 있는 참모용 스툴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민원인 용 의자는 긴 테이블 너머 한참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남자 손 두뼘 거리에 있던 그녀가 몸을 내미니 그녀의 상체는 그의 정강이에 거의 밀착되다시피 했다.

그 상태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조그만 입술이 열리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저렇게 생겼으면서 이렇게 움직이기까지 하는지, 알폰소는 내심 감탄했다.

“우리는 성인이고, 서로 마음 확인도 했고⋯⋯.”

알폰소의 시선은 아리아드네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였다.

흰 피부, 우유 같은 피부, 푸딩 같은 질감일 것이 분명한 새하얀 피부.

그 위를 감질나게 딱 한 겹 덮고 있는 얇디얇은 붉은 파틀렛, 그리고 그 아래를 피부와 같은 색으로 덮은 크림색 공단 드레스.

공단은 피부색과 같은 밝은 우윳빛이었지만 진주알같이 인위적인 광택이 돌았다.

알폰소는 그걸 찢어버리고 원래 피부의 뽀얀 결을 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이런 거 저런 거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그는 혼신의 집중력을 그러모으고 있었다. 그녀의 말소리가 아득하게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저 문장만은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 이런 거, 저런 거. 이런 거, 저런 거.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 우당탕!

아리아드네가 앉아 있던 스툴이 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알폰소는 그녀의 양 팔목을 잡아 들고 윙체어 바로 뒤의 벽에 밀어붙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아리아드네의 귀에 속삭였다.

“이런 거 저런 거 뭘 했는데?”

뜨거운 호흡이 그녀의 목덜미에 훅 끼쳐왔다. 금발 고수머리가 그녀의 시야를 온통 가렸다.

순식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왕자궁 안의 공식적인 접견실이 아니라 내밀한, 황금의 궁전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아주 낮은 저음이었다.

“이런 건 누구랑 했고.”

그는 고개로 그녀의 목덜미를 쓸었다. 높은 콧대가 목덜미의 솜털에 닿을락 말락 하는 거리로 스쳐 지나갔다.

“하아.”

여자는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쉽게 용서해주지 않았다.

“저런 건 누구랑 했는데?”

양팔을 그의 왼손 하나에 손쉽게 결박당한 채로 머리 위로 올린 그녀는 무력하게 몸부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픈 몸짓이 아니었다. 제발 빨리 와 달라는 애원의 몸짓이었다.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짧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더 긴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의 호흡도 얕고 가빴다. 그녀는 쌕쌕 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흐느꼈다.

“알폰소—.”

알폰소는 그녀의 팔을 위로 그러쥔 채로 쪼그려 앉았다. 압도적인 덩치와 암리치 덕에 가능했다.

그는 아래에서 위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코끝으로 그녀의 턱을 밀어 위로 올렸다.

아리아드네의 조막만 한 얼굴이 저항 없이 추켜올려졌다가 왼쪽으로 떨어졌다.

“난 남들이 널 보면서 그런 생각 하는 게 싫어.”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반투명한 우윳빛 피부. 터질 듯한 농염함.

“누구랑은 이걸 했을 거고 다른 사람이랑은 저걸 했을 거고—. 이런 생각 말야.”

목소리가 너무 낮아 일부 발음이 뭉개질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의 말을 들은 여자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서렸다.

그녀에겐 이게 더러워진 자신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인간은 선입견대로 듣는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 흥분으로 평소보다 더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 거기에 스며든 절망의 냄새는 눅진하고 아득했다.

이런 표정이 있구나. 이런 표정도 볼 수 있구나.

알폰소는 눈 앞에 펼쳐진 절경에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입 안 피부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런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탄성을 터트리며 바라볼 것이다.

되고 싶어서 선망하고 가지고 싶어서 질투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부숴버리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가진 자였다. 자기 것을 부수는 악취미는 없었다. 알폰소는 지키는 자였다.

“⋯⋯여자들이 그런 상상을 할 때도 네 평판에 해가 될 테고.”

알폰소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언성을 높여 으르렁댔다.

“사내놈들이 그딴 상상을 하면 대가리를 날려 버리겠어.”

알폰소의 태도가 사나워지자 아리아드네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녀가 겁먹은 것이 눈에 보이자 알폰소는 그제야 그녀의 양팔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 그게 그녀를 아예 놓아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난 그런 생각을 하는 놈을 실제로 잡아다 목을 따 버릴 수 있어.”

이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리아드네의 양 팔목을 하나씩 양손에 잡고 그녀를 벽에 밀어붙인 채였다.

그저 팔이 아프지 않도록 세심하게 손목 높이를 머리 위가 아니라 어깨까지 내려 주었을 뿐이었다.

“내 수하라면 군기 위반으로 간단하게. 산 카를로 시민, 아니 에트루스칸백성이라면 왕족모독죄로. 죄질이 더러워 삼족을 멸하고 싶으면 군사기밀 침해죄로.”

그의 목소리처럼 표정 역시 매우 담담했지만 아리아드네는 그 평안한 얼굴에서 광기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알폰소에게 광기라니.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게 눈앞에 펼쳐진 상황의 가장 적합한 묘사였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벽에 밀어붙인 채로, 상체와 상체가 밀착한 채로, 그러나 맨살은 서로 단 하나도 닿지 않도록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럴 수는 없잖아? 모두가 나의 백성인데 말이야.”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호흡에 담긴 후끈한 습기에 무의미하게 몸부림쳤다.

“알폰소—.”

그녀가 부르는 그의 이름에는 애원을 넘은 애걸이 담겨 있었다. 제발, 그만 애태우고 여기서 제발.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청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폰소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흉한 상상을 하라고 남들 앞에 고깃덩어리를 던져주고는 침을 흘렸다고 머리를 날려 버리는 건 올바른 주군이 할 짓은 아니지 않아.”

아리아드네를 벽에 밀어붙인 자세와는 참 대비되는 인자한 톤이었다.

“그러니까 모범을 보이는 거야. 아무도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네 이름에 흠집 하나 안 가게.”

알폰소는 얼굴로 부드럽게 아리아드네의 볼부터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의 콧등이, 그의 고수머리가 그녀의 잔털을 간지럽혔다.

“넌 내가 얼마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허벅지부터 아랫배까지 통째로 느껴지는 뻐근함과는 상반되는 상냥한 목소리였다.

* * *

‘별들의 방’에서 아리아드네에게 따귀를 맞던 날 알폰소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그의 마음이, 그의 행동이 타인에게는 좋지만은 않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

어려서부터 중앙대륙 제일가는 혼약상대인 황금의 왕자님이었다.

그의 시선을 못 끌어 안달인 소녀는 많았어도 그의 시선을 받고 싫어했던 여자는 없었다.

그의 유일한 연애였던 아리아드네와의 첫 번째 만남도 알폰소의 입장에서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래서 착각했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관심이, 그의 호의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호의, 아니 시혜에 해당한다고.

그렇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도 따끔하게 한마디 들은 바 있었지만 응용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아리아드네에게 뺨을 맞던 날 들었던 한마디가 비로소 그의 심장에 비수로 꽂혔다.

- “그 여자를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나를 루비나랑 똑같은 신세로 만들겠다고?”

아리아드네는 절절하게 토해냈었다.

- “루비나는 정부라서 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지도 못하잖아! 비앙카 공녀는 루비나가 정부라서 상종도 하기 싫다잖아!”

그리고 그의 가슴을 울렸던 단 한 줄.

- “날 사랑한 적이 있기나 해?”

그의 짧은 생각이, 별 뜻 없이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던 사소한 행동들이 그녀가 그의 사랑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는 아픈 깨달음.

알폰소는 그날 결심했다.

라리에사와 파혼하고 아리아드네의 머리에 왕자비의 관을 씌워주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겠노라고.

그는 전반적으로 자기가 몹시 잘 참아왔다고 자부했다. 물론 결심이 항상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의 인내심을 벗어날 정도로 아름다웠고, 감정적으로 흘러넘치는 날은 있기 마련이니까.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오늘 아침에 마차 안에서도 그는 미치는 줄 알았다.

그녀가 상체를 옆으로 비틀며 그의 시선을 유도했을 때 그는 그녀가 일부러 그러는 걸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별개였다. 그녀의 몸짓을 무방비하게 따라가는 자신의 시선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 “이걸 왜 참아야 해?”

목소리마저 고혹적이었다. 그 음성을 들은 순간 욱씬, 묵직한 압통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계속 힘이 들어가고 있었는데 임계점을 넘어 고통으로 인식된 건 그 순간부터였다.

알폰소는 자신이 낮은 신음을 냈다고 생각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아리아드네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저지를 뻔 했다. 조금만 더 그녀가 그를 도발했다면 그는 배려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마차 안에서 거사를 치렀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의 한 마디가 그를 멈췄다.

- “너 원래 안 참았잖아.”

이 말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정말로 그냥 끝까지 갔을 것이다.

접견실 안의 알폰소는 지금 시야가 뿌옜다. 접견실 벽에 드리워진 붉은 휘장과, 아리아드네의 새하얀 피부의 강렬한 대조만 인식될 뿐이다.

후각도 그를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리아드네에게선 몰약과 시트러스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 두 가지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달콤한 냄새가 함께 풍겼다. 재스민 꽃 같기도 하고 사향 같기도 한, 그를 홀리는 데에 최적화 된⋯⋯.

그녀의 향기에 취한 그는 자제력을 되찾기 위해 그녀가 오늘 오전에 했던 말을 되새겼다.

- “너 원래 안 참았잖아.”

덤비지 않기 위해, 문명 사회의 일원으로 남기 위해 그 목소리, 말투, 마차 안의 목재 무늬, 훅 끼쳐왔던 찬 기운, 그런 것들을 쉴 새 없이 상기했다.

그러느라 그는 자신이 아직도 아리아드네의 두 팔을 잡아 벽에 밀어붙여놓은 상태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그들의 상체가 밀착해있으며 그의 심장박동과 그녀의 심장박동이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말이다.

그는 다음 말을 듣고서야 지금의 자세를 깨달았다.

자기 심장은 아주 크게 뛰었는데 여자의 심박은 일정하게 또박또박 규칙적이었기 때문이다.

“레오 3세 폐하를 죽여 버릴 수는 없잖아.”

알폰소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여기서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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