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충격적인 자각
레오 3세의 언급에 알폰소 전신의 피가 싹 식었다.
말장난이나 잘못된 비유라고 생각하고 웃고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직감이 그에게 긴장하라고 경고했다.
“아바마마가 무슨⋯⋯?”
알폰소는 조심스레 물으며 아리아드네를 벽에 밀어붙였던 손을 놓았다.
그녀는 자신을 고정하던 힘이 사라지자 그대로 앞으로 무너져 알폰소의 품에 안겨들었다.
말캉한 여자 몸의 감촉이 세포 하나하나의 표면을 타고 신경을 울렸다. 그녀는 뼈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알폰소는 크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국왕 폐하께서.”
여자는 약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중차대한 이야기를 하기 직전의 긴장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날 계비로 들이려고 하셨어.”
그리고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뭐?”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잡고 똑바로 세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말해봐.”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뭔가 단어가 잘못됐을 것이다.
“계비? 후처 말이야?”
안타깝게도 그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의 표정이 무너졌다. 마치 자기가 잘못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알폰소는 그녀의 죄책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목덜미 위에 조그만 머리가 부러질 것처럼 가볍게 흔들렸다.
그 모습이 너무 가련해, 알폰소는 그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생각에 미안해진 것이겠지, 하고 생각을 멈췄다.
다른 갈래의 생각이라면 ‘혹시 네가 국왕 폐하에게 꼬리친 것이 아니냐’라는 추궁으로 이어질 테지만, 알폰소는 그런 종류의 상상을 굳이 찾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쩌다가? 언제?”
아리아드네는 입을 열었다. 앵두빛 입술이 벌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천년 같았다.
후끈한 무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잘 벼린 칼날처럼 차갑고 서늘한 분노가 방안을 잠식했다.
“1123년 초겨울.”
3년도 더 된, 대략 아리아드네가 체자레와 약혼했을 때 즈음의 일이었다. 알폰소가 물었다.
“나는 이 사실을 왜 모르고 있었지?”
요즈음의 알폰소에게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첩보가 다 들어왔다. 주로 대귀족이 그 출처였다.
“⋯⋯국왕 폐하께서 애초에 극비로 하셨으니까. 사교계까지 흘러나가지도 않았어. 왕궁 안에서 입단속이 끝났어.”
아리아드네는 당시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데 마레 추기경과의 상의도 없이 이폴리토가 아닌 아리아드네에게 내려진 백작위, 연달아 받은 ‘입궁하라’고만 적혀 있었지 자세한 설명이 아무것도 없었던 교지.
알폰소는 의구심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상황과는 달랐다.
그는 이제껏 ‘아리아드네 데 마레가 백작위를 받은 건 체자레 데 코모의 피사노 공작위에 조력해서라고 알고 있었다. 라리에사의 해설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설명을 계속했다.
“가 봤더니 결혼식장이었어. 국왕 폐하께서 흰옷을 입고 기다리고 계셨지.”
- 와직!
알폰소가 왕자의 의자를 참지 못하고 부순 소리였다. 그는 손에 힘을 꽉 주다가 손잡이를 부러뜨렸다.
단단한 박달나무를 기름에 수십 번 담가 만든 왕세자의 의자가 아귀힘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다. 이게 지금 그의 심경이었다.
전통과 책임과 권위를 다 부셔버리고 싶은 마음.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탈출했어?”
그는 약간의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가 라리에사와 파혼해야 하는 것처럼 아리아드네도 사실 정리해야 하는 호적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각오였다.
연인한테 가장 미안한 일이 공평해졌으면 하는 무의식적인 소망의 발로였다.
“체자레가⋯⋯.”
조금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체자레 공작과의 약혼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레오 3세라면 서류상으로는 자신의 여자로 등기해 놓고 겉으로는 체자레의 약혼자로 전시하는 것도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의 답변은 전혀 그의 예상 밖이었다.
“자기 휘하의 사람들을 끌고 들어와서 국왕 폐하를 칼끝으로 위협하며 혼인 서약서를 찢어버렸어.”
“뭐?”
“정확히는, 찢은 건 아니고 자기와의 약혼 서약서로 바꿨⋯⋯.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말을 멈추고 알폰소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알폰소? 괜찮아?”
알폰소의 표정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이었다.
“⋯⋯체자레가? 그랬다고?”
“내가 들어갔을 때에는 바닥에 죽은 사람도 있었고 결혼식장⋯⋯ 그러니까 ‘태양의 홀’이 온통 피바다였어.”
알폰소는 믿을 수가 없었다. 체자레, 그 겁쟁이 새끼가?
그가 생각하기에 체자레 데 코모는 다리 사이에 찬 걸 떼어버려야 마땅한 새끼였다.
불결한 결합에서 태어난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참회하기는커녕 레오 3세의 혈통을 상장처럼 흔들고 다니며 여자를 꼬셨다.
그런 주제에 지위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오면 자신의 사생아 신분 뒤로 홀랑 숨었다. 함께 자란 알폰소가 보기에는 늘 그랬다. 인간 미달이었다.
“그 체자레가⋯⋯. 아바마마에게 검을 뽑았어?”
아리아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알폰소는 지금 사실의 확인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뜻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세상에.”
체자레 데 코모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의탁하고 있는 처지였다.
알폰소에게는 정당한 왕좌의 계승자라는 권리도, 전쟁을 경험한 기사단도, 그리고 그 두 가지를 기반으로 태동하는 자기 세력도 있었지만 체자레에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레오 3세를 그의 인생에서 뺀다면 번지르르한 얼굴과 사교계에서의 약간의 악명 정도만 남을 터였다.
그런 놈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아리아드네를 위해서?
알폰소는 물었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데 코모 백작을 가만 두셨어?”
그랬을 리가 없다. 체자레는 지금 멀쩡하게 피사노 공작 작위를 잘 가지고 있지 않은가.
“에트루스칸 왕국 총사령관 자리에서 곧장 해임하셨지.”
“⋯⋯.”
알폰소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초리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레오 3세는 고작 그딴 걸로 자신에게 칼을 뽑은 아들을 살려 둘 사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가 가서 국왕 폐하와 담판을 지었어. 체자레를 건드린다면 폐하께서 날 계비로 들이려던 사실을 만방에 폭로해 버리겠다고⋯⋯.”
알폰소와의 관계를 담보 잡고 협박했지만 거기까지 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필요는 없다.
이 정도는 착한 거짓말 축에도 못 든다. 그녀는 대화의 방향을 요령껏 돌렸다.
“폐하께서는 본인이 날 탐내셨던 걸 밖에 알리고 싶어하지 않아 하셔. 루비나 공작부인도 아주 막판에야 알게 되셨던 것 같고. 당일 ‘태양의 홀’에 동원됐던 사람들 중 다수가 강제로 입막음을 당했다고 알고 있어.”
국왕의 심복과 거기에 줄 댄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땅끝 임지로 보내버리거나 트집을 잡아 죽였다.
죽은 자는 주로 하급 하인들이었다. 그렇지만 큰 소요는 없었다. 그것이 중앙 대륙의 궁정이니까.
그리고 알폰소는 한 발짝 늦게, 좀 전에 아리아드네의 표정에 있었던 죄책감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체자레와 약혼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게 되어서, 그러니까 체자레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알폰소는 깨달았다. 체자레 공작은 자기 생각보다 더 만만치 않은 경쟁자일 수 있겠다고.
* * *
어찌어찌 오늘도 아리아드네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돌려보내기에 성공한 알폰소가 찾은 곳은 연무장이었다.
그는 취소할 수 없는 만찬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정을 미룬 후 훈련장에 틀어박혔다.
- 와지끈!
훈련용 짚인형의 목재 기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만프레디 경은 약간 질린 표정으로 막내, 데실리오 경에게 물었다. 왕자의 손에 들린 건 나무 패는 도끼도 아니고 훈련용 목검이었다.
“저거 몇 개째냐?”
“열다섯 개요⋯⋯.”
“저거 순전히 힘으로 때려부수는 거잖아. 그런데 열다섯 개?”
“네⋯⋯.”
보통 지푸라기를 때리고 말지 나무기둥까지 부수진 못하기 때문에 저 훈련용 짚인형은 기사단 전체가 훈련할 때에도 달에 십여 개 구매하는 게 다였다.
왕자의 심기가 만만찮게 꼬여 있는 걸 감지한 만프레디는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저럴 땐 말야, 근처에 안 가는 게 최고야. 주변에서 얼쩡거리다 걸리면⋯⋯.”
- 콰직!
열여섯 개째 짚인형이 반토막이 나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연무장에 서 있는 짚인형은 하나도 없었다.
연무장 관리는 왕자의 기사단이 직접 했기 때문에 데실리오 경이 새 짚인형을 나무기둥째로 들고 훈련장으로 뛰어들어갔다.
만프레디 경의 이야기를 갓 들은 차라 울상이 된 채였다.
‘하필이면 이럴 때⋯⋯.’
“어이 거기!”
하필이면 연무장을 울리는 왕자의 낮은 목소리에 데실리오 경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나 왕자님 눈에 띄었으니 연무장 40바퀴 뛰게 되나⋯⋯.’
하지만 왕자의 일갈은 다른 사람을 향했다.
“만프레디! 자네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뻔히 보면서도 연무장 관리를 막내만 시켜?”
“힉!”
“할일이 없어 보이니 실시다! 연무장 60바퀴!”
“히이익!”
알면서도 피할 수 없었던, 믿을 수 없는 운명에 입을 쩍 벌린 만프레디가 구보를 시작했다.
알폰소는 그 등을 보면서야 오늘 오후 처음으로 피식 웃었고, 경직되어 뻣뻣한 자신의 근육과 감정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해치운 열여섯 개의 인형이 그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무엇이 그가 이토록 검을 휘두르게 추동했을까? 아리아드네를 향한 풀지 못한 욕정? 친아버지에 대한 분노? 친아버지와 여자를 두고 싸우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
다 지분은 있었으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질투. 열등감.’
알폰소가 오늘 느꼈던 감정은⋯⋯. 체자레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그리고 일말의 감탄이었다.
그는 다 가지고도 하지 못했던, 자기보다 한 발을 더 내디딘 남자의 용기와 헌신.
그가 어머니의 날개 뒤로 숨었을 때 모든 것을 다 내던진 대책 없는 그의 배다른 형.
가슴 속이 울컥, 차올랐다.
“하아아압!”
알폰소는 들끓는 열기에 열일곱 개째 짚인형에 덤벼들었다.
* * *
아들의 여자에 눈독을 들여 개판 오분 전 상황을 만들어놓은 레오 3세는 지금 새로운 여자에 눈독을 들이는 중이었다.
“아니, 콘타리니 백작부인이 꽃을 들고 그걸 강아지 귀에 꽂아줬지 뭐요!”
레오 3세는 오타비오 부부를 불러 얼마 전에 한 번 더 따로 차를 마셨던 일을 루비나 공작부인에게 이야기하며 박장대소했다.
“손바닥만한 강아지 귀에 데이지 꽃을 꽂아주는 게 센스가 아주!”
레오 3세는 루비나가 안고 있던 프렌치 불독, 벨라벨라를 흘겼다.
“저 못생긴 건 왜 어울리지도 않게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