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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화> 서로 다른 생각 (354/733)

<제107화> 서로 다른 생각2021.12.12.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말레타는 이제까지의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절박하게 산차에게 매달렸다.

16583739732722.jpg“산차, 내 친동생 산차야!”

말레타는 랑부예 구휼원의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온 이후로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그녀에게 이곳은 인세의 지옥을 형상화한 곳이었다. 어떻게 탈출한 곳인데,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16583739732722.jpg“난 여기서 굶어 죽고 싶지 않아. 애를 낳고 그 애는 분변 더미 위에서 죽고 나는 옆에서 애 낳다가 죽고……!”

말레타는 숫제 무릎까지 꿇으며 산차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16583739732722.jpg“제발 날 여기 두고 가지 마. 제발 불쌍하게 여겨줘. 제발……. 제발…….”

산차는 이 어디선가 본듯한 광경에 혀를 찼다. 하지만 상황이 반대였다.

16583739732722.jpg- “고귀하신 아가씨! 산차는 손버릇이 나쁘고 불치의 기침병이 있습니다!”

말레타가 과거, 둘 중 한 명만 데려가겠다는 데 마레 가문의 아가씨 앞에서 외쳤던 말이었다. 말레타가 그날 했던 행동을 산차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6583739732722.jpg“날 두고 떠날 거야? 아니잖아. 넌 내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이잖아.”

너는. 날 여기 두고 갔었지. 대체 너는 지킨 적이 없는 윤리와 도덕을 왜 나에게는 들이미는 거지? 산차는 동정심보다는 역겨움을 느꼈다. 자기 목숨을 구하겠다고 횡설수설하며 매달리는 말레타는 처량하기보다는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산차는 아가씨의 명령을 따라 말레타를 잘 숨겨두었다가 언젠가는 말레타를 데리고 돌아와야 했다. 산차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갔다.

16583739732744.jpg“왜. 업보가 돌아올까 봐 두렵기라도 하니?”

말레타는 찔끔 놀라 바닥에 엎드린 채 여동생의 눈치를 보았다.

16583739732744.jpg“영영 버려두고 싶지만 때가 되면 우리 아가씨께서 연락하실 거야. 여기서 조용히 기다려.”

말레타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반 잔의 물컵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 중 비관적인 절반을 읽어냈다. 정말로 기약 없이 기다리라는 소리였다.

16583739732722.jpg“사, 산차. 아가씨께 말 좀 전해줘.”

그녀는 여동생의 옷소매를 붙들고 매달렸다.

16583739732722.jpg“나 이폴리토 도련님을 모셨잖아. 그전에는 이사벨라 아가씨를 모셨었잖아. 아리아드네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어.”

이번에는 방향이 맞았다. ‘아리아드네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라는 소리에 산차는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산차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16583739732744.jpg“말해봐.”

하지만 말레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16583739732722.jpg“아가씨 본인이 직접 오셔야 말할 수 있어.”

산차는 대답했다.

16583739732744.jpg“나한테 못 할 말은 아가씨에게도 못 할 말이야. 나는 배신하지 않아. 내 입에서 어디로 새어나갈 일 없으니까 지금 말해.”

그러나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라도 산차와 말레타는 사고회로 자체가 달랐다.

16583739732722.jpg“무슨 소리야? 내가 너한테 나불나불 다 얘기했다가 아가씨가 그것만 듣고 입 싹 씻으시면 나만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 되니까 그런 거지! 내가 그런 허접한 수작에 속을 것 같아?”

산차는 한숨을 내쉬었다.

16583739732744.jpg“너 같은 거한테서 사람 같은 말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16583739732722.jpg“정보는 진짜야. 아가씨한테 꼭 전해!”

산차는 대꾸도 없이 랑부예 구휼원을 떠났다. * * *

16583739740787.jpg“그렇단 말이지?”

16583739732744.jpg“……예.”

16583739740787.jpg“해묵은 원한을 이번에 하나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데뷔탕트 무도회의 후크. 아라벨라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 후크. 아리아드네는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잊을 수가 없었다.

16583739740787.jpg“말레타가 증언할 의향이 있대? 그것만 확실하면 이번에야말로 이사벨라를 끝장낼 수 있을지도 몰라.”

16583739732744.jpg“……말레타에게 뭘 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요.”

산차는 기색이 불편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약간 걱정이 되어 산차를 바라보았다.

16583739740787.jpg“산차, 걱정이 되니? 이번이 네 복수의 기회인데 내가 말레타에게 증거를 받고 그 대가로 활로를 열어줄까 봐 말이야.”

말레타는 산차에게 친언니이기도 하지만 철천지원수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이사벨라와 아리아드네의 사이 같기도 했다. 아리아드네 본인도, 누군가가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 이사벨라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라고 하면 그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몹시 화가 날 것이다. 가만히 두지 않을지도 몰랐다.

16583739732744.jpg“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산차는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촉촉한 눈빛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16583739732744.jpg“아가씨. 말레타에 대한 복수는 정말로 마음 쓰지 마세요. 전 말레타가 밉지만, 걔는 제 친언니이기도 해요. 저는 아직 복수를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조차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걸요.”

16583739740787.jpg“그럼 왜 표정이 안 좋아. 나 때문에 복수할 필요가 없다고 거짓말하는 거라면 정말 안 그래도 돼.”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손을 잡았다.

16583739740787.jpg“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할게. 형제니까 용서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고 말레타를 죽여버리고 싶다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줄게. 말만 해.”

산차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16583739732744.jpg“아가씨,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저…….”

산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16583739732744.jpg“말레타는 못 믿을 위인이에요. 이폴리토 도련님과 이사벨라 아가씨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만한 위치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걔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

산차는 한마디 덧붙였다.

16583739732744.jpg“자기가 원하는 걸 얻은 다음에 데 마레 추기경 예하 앞에서 자기가 약속한 증언을 할 거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고요.”

산차는 불안한 얼굴로 그녀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16583739732744.jpg“믿음직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전 말레타가 아가씨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게 싫어요. 분명히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를 칠 거예요. 전 아가씨가 걔 때문에 손해 보는 게 싫어요.”

상상도 못 했던 이유였다. 아리아드네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그만 잡고 있던 산차의 손을 꼭 깍지를 껴 쥐었다.

16583739732744.jpg“아가씨! 이렇게 잡으시면 안 돼요! 저 바깥에 다녀와서 아직 손도 안 씻었어요!”

16583739740787.jpg“그깟 먼지 정도 뭐 어때서.”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6583739740787.jpg“그리고 넌 나에 대한 믿음을 좀 더 가질 필요가 있어.”

아리아드네는 빙긋 웃었다.

16583739740787.jpg“말레타가 뭔가 이득을 받아가게 된다면 그건 모두 후불로 받게 될 거야. 난 이젠 말레타 따위에겐 당하지 않아.”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바라보았다.

16583739740787.jpg“말레타를 데리고 오는 것보다는 우리가 움직이는 게 낫겠지? 이야기를 들으러 가 보자꾸나.”

  * * * 거의 열흘 가까이 랑부예 구휼원의 직원 숙소에 두문불출하고 있던 말레타는 정신병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못 하고 혼자 벽을 쳐다보는 게 말레타의 주된 일정이었다. 하루 두 번 나오는 식사는 직원 식사라서 빈민의 것보다는 훌륭했지만 랑부예 구휼원 특유의, 솥에서 순무를 하도 오래 끓여서 솥 자체에 배어버린, 끔찍한 순무의 아린 냄새가 났다.

16583739732722.jpg“날 여기서 굶겨 죽이려는 거지! 모두가 날 잊고 말 테지!”

말레타는 아직 태도 나지 않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이를 갈았다.

16583739732722.jpg“난 돌아갈 거야.”

온종일 혼자 다락방에 갇혀 있는 동안 말레타는 혼잣말하는 버릇이 들었다. 뭐라도 소리 내어 말하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16583739732722.jpg“아리아드네 아가씨 따위! 미래의 데 마레 장자의 어머니인 날 방해한다면 가만 안 둬!”

혼잣말은 무릇 대답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16583739740787.jpg“그렇구나.”

말레타는 웃음기 띤 목소리가 그녀의 말에 대꾸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 지푸라기 매트리스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16583739740787.jpg“미래의 데 마레 장자의 어머니라.”

16583739732722.jpg“히익!”

16583739740787.jpg“결국 소원성취했구나, 말레타.”

목소리의 주인은 아리아드네 아가씨, 본인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눌러쓴 후드를 내리고 떡갈나무 문에 기댄 채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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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3739740787.jpg“날 어떻게 가만 안 둘 건데?”

16583739732722.jpg“아, 아가씨…….”

키가 큰 아리아드네의 뒤로 산차가 따라 들어왔다. 두 명이 방문 앞에 버티고 선 분위기는 위압적이었다. 산차 앞에서 아리아드네 아가씨에게 굽실대기는 싫었지만 말레타는 기본적으로 강한 자 앞에서 약해지는 자였다. 목숨보다 소중한 건 잘 먹고 잘사는 것밖에 없다. 말레타는 아리아드네 아가씨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16583739732722.jpg“아가씨! 아가씨! 제가 실언을 했구먼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말레타는 자신이 임산부니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일어나라는 소리를 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리아드네는 뻣뻣하게 서서 말레타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레타는 속으로 욕을 하면서 입으로는 더욱 크게 곡소리를 냈다.

16583739732722.jpg“제가 여기 있으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이폴리토 도련님이 얼마나 미운지! 얼마나 서글픈지! 그래도 그분이 아이 아버지인데!”

그 이야기를 하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말레타의 퉁퉁한 볼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16583739732722.jpg“아가씨,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미우시겠지만 저는 천한 아랫것에 불과하고, 그래도 제 배 속에는 아가씨의 조카가 있지 않습니까…….”

16583739740787.jpg“우리 이렇게 무익한 이야기 말고 좀 유익한 이야기를 하자.”

아리아드네는 사뿐사뿐 걸어가 말레타의 침대 위에 앉았다. 앞에는 목재로 대충 깎아 만든 낡은 스툴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스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16583739740787.jpg“앉아.”

말레타는 눈물을 훌쩍이며 스툴 위에 자리를 잡았다.

16583739740787.jpg“네가 나에게 알려드릴 것이 있다고 했다며? 그 비밀이 뭐지?”

16583739732722.jpg“그것은…….”

  * * *

16583739762943.jpg“알폰소 왕자님. 우리 얘기 좀 해요.”

  지나가던 길이었던 알폰소는 양팔을 벌려 통행을 막은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는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표정으로 라리에사 대공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며 서 있던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16583739762951.jpg“대공녀. 예를 지키시지요.”

  조곤조곤하고 듣기 좋은 중저음에, 나직한 말투였다. 하지만 예민한 라리에사는 거기에 스며든 냉담함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16583739762943.jpg“제가 무슨 큰 결례를 저질렀다고 그러세요! 전 알폰소 왕자님을 뵙고 싶어서 여기서 한참 기다렸다고요!”

  라리에사가 복도에 한 시간 넘게 서서 알폰소를 기다린 것은 사실이었다.  

16583739762951.jpg“저는 지금 기사들과 미리 잡은 일정이 있고 대공녀는 아무 약속 없이 길을 막으셨습니다. 제 부관인 디노에게 문의해서 약속을 잡으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16583739762943.jpg“하지만!”

  소를 닮은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라리에사가 울부짖었다.  

16583739762943.jpg“왕자님께서 저를 피하고 계시잖아요! 편지의 답장도 드문드문 오고, 공식 행사를 제외한 에스코트는 모두 다른 일정이 있다고 하시고!”

  라리에사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가슴을 두드리며 호소했다.  

16583739762943.jpg“제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알폰소 왕자는 단호했다.  

16583739762951.jpg“대공녀께서 뭘 더 하셔야 하나요?”

  알폰소는 손님에게 저택을 안내하는 주인의 말투로 부드럽게 말했다.  

16583739762951.jpg“타란토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행도 다니시고 식도락도 즐기세요. 가보시고 싶으신 곳이 있으시면 제 수행원들에게 이야기하세요. 데려다줄 겁니다. 보고 싶은 곳은 다 가실 수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마지막 단어들을 덧붙였다.  

16583739762951.jpg“에트루스칸은 마치 친척을 맞이하듯이 갈리코의 대공녀를 환영합니다.”

  그들은 8촌 혈연관계가 있었으므로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친척으로서 이번 겨울을 함께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리에사는 결단코 그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16583739762943.jpg“알폰소 왕자님. 우리는 더 가까워져야 해요. 그게 우리 아버지들의 뜻이에요.”

  라리에사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급해진 라리에사는 그만 그간 잘 숨겨왔던 성질머리를 드러내고 말았다.  

16583739762943.jpg“그리고 그건 당신 백성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도 하죠! 에트루스칸 국민에 대한 일말의 책임감이 있다면, 나한테 잘 하세요.”

  이자는 대 갈리코 왕국의 힘을 두려워할 것이 틀림없다. 라리에사는 든든한 아버지, 외드 대공과 자신의 8촌 오빠인 갈리코의 필리프 4세를 떠올리며 한마디 더 을렀다.  

16583739762943.jpg“전 지금 폭발하기 직전이에요.”

  라리에사는 이 기세를 몰아 알폰소 왕자의 무심함을 비난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꾹 누른 듯한 알폰소의 대답이 그녀가 다음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16583739762951.jpg“내 백성을 위한 유일한 길?”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하던 알폰소 왕자가 청회색 눈에 분노의 불길을 담고 라리에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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