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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은혜를 망각한 자들 (360/733)

<제113화> 은혜를 망각한 자들2022.01.02.

이폴리토는 아버지가 자기의 살인죄를 네 어머니에게 덮어씌우자는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쭉 째진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들켰다는 다급함이었다.

16583740154255.jpg‘내가 관여되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이미 아셔?!’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원흉이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다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아내를, 아니 첩을 내칠 작정이었다.

16583740154259.jpg“넌 아직 인생이 창창해. 아직 새싹이나 마찬가지지. 아직 자리도 잡지 못했고, 장가도 못 갔어.”

데 마레 추기경은 이폴리토를 바라보며 말했다.

16583740154259.jpg“네 어미는 지금 저잣거리에서 살인자로 아주 확정이 난 상태다. 이 상태대로라면 조만간 스캄파인가 뭔가 하는 놈이 루크레치아를 ‘왕궁 법정’에 고발할 것 같다.”

16583740154255.jpg“예?! ‘왕궁 법정’이요?”

그것은 모든 귀족들이 극구 꺼리는 사태였다. ‘왕궁 법정’은 국왕이 임명한 임시 판사가 현장으로 와서 사건을 다각도로 조사한 후에 판결을 내리는 형태의 임시 재판이었다. 혹시나 국왕이 평소에 앙숙이던 자를 임시 판사로 임명하면 상황이 몹시 곤란해졌다. 망신은 망신대로 당하고 공정은 개나 줘 버리게 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았다. 그런 최악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임시 판사는 사건을 조사한답시고 범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문의 회계 장부나 재산 상태 따위를 조사해가고는 했다. 그 내용은 그대로 국왕에게 전달되었다. 그 뒤로 왕궁에서는 해당 내역을 근거로 징계를 내리거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해당 귀족 가문에 기부를 종용하기가 일쑤였다.

16583740154259.jpg“네 어미가 ‘왕궁 법정’에 고발된 살인자가 되면, 네 미래는 창창할 것 같으냐?”

이폴리토는 말이 없었다.

16583740154259.jpg“누가 살인자의 아들인 너에게 딸을 주겠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넌 작위가 있는 여자가 필요해.”

정확히는, 작위를 가진 무남독녀 외동딸이 필요했다. 가급적이면 백작위 이상으로. 그런 여자는 흔치도 않았고 콧대도 높았다. 온갖 남자들이 다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작위를 승계할 수 없는 대귀족의 차남, 벼락출세한 상인, 잘생긴 제비 할 것 없이 모두들 그런 여자를 찾아다녔다.

16583740154259.jpg“……네 어미는 이제 데 마레 가문에 짐밖에 안 된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를 악물었다.

16583740154259.jpg“흑마법 사태 때 끊어냈어야 했어. 정 때문에 질질 끌다가 여기까지 끌려온 거야.”

16583740154255.jpg“아버지!”

16583740154259.jpg“이폴리토! 네 어미인 건 알지만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봐라! 흑마법 사태 때 잡혔었다면 우리는 이단 심문관에게 끌려가서 다 죽었어!”

백번 옳은 말이어서 이폴리토는 아버지에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16583740154259.jpg“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 내 주자.”

16583740154255.jpg“…….”

이폴리토는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모친을 내치자고 주장하는 아버지를 차마 거역하지 못하지만 어머니를 버릴 수도 없는 효자처럼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이폴리토는 지금 슬슬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었다. 이폴리토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숨겨야 하는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로, 하녀를 살해한 일은 루크레치아보다는 본인, 이폴리토의 탓이 더 크다는 것. 둘째로, 말레타의 배에 이폴리토의 아이가 있었다는 것. 셋째로, 이폴리토 자신은 데 마레 추기경의 자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16583740154255.jpg‘엄마만……. 엄마만 없어지면 아무도 모르잖아?’

이 사실을 나불댈 수 있는 다른 한 명인 말레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다. 타란토의 외갓집이 이폴리토 출생의 비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20년 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들이니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일을 들쑤시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증거가 있을 리가? 이런 류의 일들은 몹시 비밀스러워서 증명할 물건은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질 나쁜 계산이 팽팽 돌아가는지 꿈에도 모른 채, 데 마레 추기경은 자신의 구상을 말했다.

16583740154259.jpg“유가족을 데려와서 합의를 보자. 루크레치아를 가문 내에서 죽여서 내줄 테니, 모두 오해였다고 발표하자고.”

16583740154255.jpg“……!”

16583740154259.jpg“파올라 스캄파가 죽은 건 질 나쁜 부랑자들이 일으킨 불운한 사고이고, 데 마레 가문은 오해로 잘못 얽혔으며, 루크레치아 데 로시는 병사한 걸로 하자.”

몹시…….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16583740154259.jpg“내가 스캄파 유족과 지역협동조합 대표들과 협의를 하고 오겠다.”

데 마레 추기경은 집사 니콜로도, 아들놈도 도무지 쓸만한 놈들이 없다며 혀를 쳤다.

16583740154259.jpg“너는 이사벨라에게 이야기를 잘 전달해 둬라.”

그 와중에도 가장 찝찝한 부분은 알뜰하게 이폴리토에게 맡겨 버리는 데 마레 추기경이었다. 어머니와 각별한 큰딸에게 ‘난 오늘 네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6583740154259.jpg“오늘 결론을 내고 내일이나 모레 집행하게 될 거로 보인다. 맞춰서 진행해.”

이폴리토는 끝내 토를 달지 않았다.

16583740154255.jpg“……예, 아버지.”

  * * * 이폴리토는 착잡한 심경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어머니였다. 루크레치아는 이폴리토에게 아무것도 아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루크레치아가 다 안고 쓰러지면 이폴리토는 자유의 몸이 된다.

16583740154255.jpg‘엄마가 사실 부랑자들을 데려온 건 이폴리토라고 말해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저 성난 지역협동조합 자경단원들이 목을 내놓으라고 부르짖는 이름은 루크레치아 데 로시가 아니라 이폴리토 데 마레가 될 것이다.

16583740154255.jpg‘그러면……. 산 카를로에는 더 이상 못 있겠지?’

살인사건을 저지른 귀족 남자는 몇 년씩 다른 도시나 다른 국가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게 상궤였다. 10여 년이 지나 다들 사건을 잊었을 때쯤 슬그머니 고향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16583740154255.jpg‘파도바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게다가 그러면 난 혼기를 다 놓치게 되잖아? 안 돼, 그럴 순 없어.’

이폴리토는 나름대로 굳게 결심을 하고 여동생, 이사벨라를 찾았다. 이사벨라는 소녀들의 응접실에 있었다. 그는 응접실 문에 노크했다.

16583740164608.jpg“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사벨라가 바로 보였다. 이사벨라는 책상에 앉아 ‘명상록’을 읽고 있었다. 근신이 풀린 이후로 확연히 달라진 생활 태도였다. 그녀는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의외라는 듯이 답했다.

16583740164608.jpg“오라버니? 여기는 무슨 일이야?”

이폴리토는 안으로 들어가서 책상 옆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16583740154255.jpg“이사벨라.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야.”

이사벨라는 예쁜 아미를 찡그렸다.

16583740164608.jpg“앞에 사람들이 몰려와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

그녀는 근신에서 풀려난 이후로 검소한 옷을 입고 수수한 치장만 했다. 한눈에 보기에 참으로 청순하고 맑은 미인이었다. 하지만 외양은 꾸몄으나 거친 속은 아직 다 꾸미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거친 말투로 집 앞에 몰려든 이들을 비하하며 짜증을 부렸다.

16583740164608.jpg“아버지는 왜 강제로 해산을 안 시키시고 그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다 들어주고 계신 거야? 평민 나부랭이들, 경비병을 시켜서 흩어 버리면 끝이잖아?”

16583740154255.jpg“이사벨라.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

이폴리토는 루크레치아가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 소문이 어디까지 퍼져나가 있는지, 그래서 데 마레 추기경이 왜 저 요구를 들어줘야만 하는지에 대해 능력 닿는 데까지 이사벨라에게 설명했다. 물론 자기 관여는 쏙 뺀 채였다. 이사벨라는 어머니가 아무 관계없는 평민 처녀를 죽여서 목을 베어 오라고 시킨 사실이 산 카를로 시내에 가득 퍼졌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16583740164608.jpg“뭐라고? 그게 산 카를로에 소문이 다 났다고?”

16583740154255.jpg“그래, 그뿐만이 아니야. 조만간 왕궁에서 조사가 나올지도 몰라. 스캄파라는 놈이 우리 집안을 ‘왕궁 법정’에 고발하려고 한대.”

이사벨라는 이어지는 나쁜 소식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재빠르게 눈치챘다. 이폴리토는 지금 불행을 과장하듯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위협하듯 늘어놓았을 뿐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방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6583740164608.jpg“……그래서 지금 오빠가 하려는 말이 뭐야?”

본론이 왔구나. 이폴리토는 내키지 않는 말을 질질 끌어가며 답했다. 주어를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583740154255.jpg“아버지는.”

이사벨라의 자주색 눈이 친오빠를 주시했다.

16583740154255.jpg“어머니를 내 주자고 하시네.”

16583740164608.jpg“뭐라고?!”

이사벨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83740164608.jpg“오빠는 거기에 동의했어?!”

이폴리토는 변명하듯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16583740154255.jpg“내가 거기에 동의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다 아버지 결정이지…….”

16583740164608.jpg“어머니를 죽이자고? 오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오빠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내 부모 욕은 참을 수 있지만 내 욕은 안 된다. 자기를 비난하는 말이 나오자 이폴리토는 발끈했다.

16583740154255.jpg“어? 그럼 넌 어떻게 할 건데?! 너라고 뭐 뾰족한 수가 나오냐?”

그는 아름다운 여동생을 향해 삿대질했다.

16583740154255.jpg“왕궁 조사관이 나오면 끝장이야! 너, 어머니가 ‘왕궁 법원’에서 살인자로 확정되면 살인자의 딸 할 수 있어?!”

이폴리토는 씨근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16583740154255.jpg“살인자의 딸이 돼서, 그 무게를 얹고 혼인 상대를 구할래? 누가 널 데려가겠어!”

이사벨라의 아름다운 자안 가득히 망설임이 차올랐다. 약간의 두려움도 깃들어 있었다. 수녀원은 안 된다.

16583740154255.jpg“지금은 그저 소문일 뿐이야. 유가족이랑 합의해서 ‘다 오해였다’, ‘루크레치아 부인은 병으로 죽었다’라고 하면 어차피 죽은 사람은 더 욕도 안 하고 시간이 지나면 잊혀져.”

이폴리토는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16583740154255.jpg“더 좋은 생각 있어? 있으면 말해봐!”

그는 내심 이사벨라가 좋은 생각을 해내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 역시 했다. 루크레치아는 모든 비밀을 껴안고 혼자 죽어줘야 했다. 그래야 그가 살았다. 이폴리토에게는 다행히도, 이사벨라는 그들의 배다른 여동생과 달리 이런 상황에서 기지가 번쩍번쩍 빛나는 아이는 아니었다. 대신 이사벨라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을 했다. 제비꽃 색 눈동자 가득 눈물을 흐느끼며 몸을 던져 오빠에게 애걸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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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3740164608.jpg“꼭 그 방법밖에는 없어? 어떻게 어머니를 죽이자고 할 수가 있어! 다른 길은 없는 거야?”

이사벨라는 반짝이는 눈동자에 눈물을 매달고 오빠에게 사정했다.

16583740164608.jpg“오빠, 그런 거 잘하잖아! 어떻게 좀 해봐!”

이사벨라는 사실 이폴리토를 조종하는 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능’을 키워드로 해서 살살 긁으면 이사벨라 멋대로 인형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나빴다. 이폴리토는 이사벨라에게는 숨긴 자기만의 목표가 있었고, 그 와중에 무능하다는 암시가 겹치자 화까지 나 버렸다.

16583740154255.jpg“아 진짜, 여기서도 저기서도 나만 붙들고 지X이야!”

그는 여동생을 팩 쳐냈다.

16583740154255.jpg“내가 신이냐? 내가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그러면 저기 산 카를로 궁정에 가 있겠지 내가 여기 널브러져 있겠냐?”

이폴리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83740154255.jpg“하여간에 그렇게 될 거니까 알고나 있어. 난 분명히 전했다.”

이폴리토는 소녀들의 응접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이사벨라는 황망한 표정으로 응접실 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눈물로 호소를 할 수도 있었고,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지금 당장 도망치라고 언질을 넣을 수도 있었지만 이사벨라는 그저 방 안에 조용히 앉아서 ‘명상록’의 다음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 * *

16583740171898.jpg“결국 혼삿길 막히는 건 싫고 엄마는 구해내라는 거네요.”

  - 와그작! 산차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베어 물었다.

16583740174863.jpg“그러네. 혼삿길이 막혀도 상관없으니 엄마를 구해달라는 소리는 입이 찢어져도 안 하네.”

아리아드네와 산차는 아라벨라의 방에서 이폴리토와 이사벨라의 촌극을 모두 엿들은 차였다. 소녀들의 응접실은 이사벨라와 아라벨라의 방과 문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는 구조였다. 지금 비어 있는 아라벨라의 방에 있으면 응접실에서 나누는 대화가 바로 옆에서 하는 말처럼 아주 잘 들렸다.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돌아온 둘은 이 사태에 대한 하마평을 나누는 중이었다.

16583740174863.jpg“‘미스 로시’가 나쁜 년이기는 하지만 정말 자기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이폴리토랑 이사벨라가 제일 나빠.”

16583740171898.jpg“진짜……. 미스 로시는 자식 농사 잘못 지었어요.”

16583740174863.jpg“그게 업보라면, 진짜 지은 죄만큼 받는 거야.”

아리아드네도 과자를 한입 먹으며 말했다.

16583740174863.jpg“산차. 온 집안에 귀를 밝게 열어둬. 특히 아버지 본인이 어떻게 움직이시는가와, 집사 니콜로가 어디서 뭘 하는지 나한테 실시간으로 보고해.”

16583740171898.jpg“네.”

16583740174863.jpg“조만간 ‘미스 로시’를 가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그 말은 반 시간도 지나기 전에 현실이 되었다. * * *

16583740174891.jpg“루크레치아 마님, 따라오시죠.”

16583740174895.jpg“무슨 일이냐? 누가 보낸 거야!?”

16583740174891.jpg“시끄럽게 구는구먼. 끌어내!”

집안 장정들에게 질질 끌려가 루크레치아가 정신을 차린 곳은 북쪽 지하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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