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새로운 무도회 파트너 후보2022.01.19.
알폰소 왕자는 궁전에서 빠져나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궁정이 남쪽에서 갓 귀환한 초봄에는 대부분의 공식 일정은 사람들이 팔라지오 카를로에 들어와 왕족을 알현하는 형식으로 잡혔다. 아리아드네는 궁정에 들어올 일이 없었는데 왕자는 도무지 나갈 기회가 없었다.
“왕자님. 아시겠지만 왕궁 무도회는 절대로 안 됩니다. 결혼동맹 협상이 조건이 안 맞아 결렬되는 것과 그게
우리 탓으로 결렬되는 건 천지 차이입니다.”
“……나도 알아.”
알폰소는 왕궁 무도회에서는 라리에사 대공녀를 에스코트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레오 3세의 결정이었다.
“……그러면 아리와 왕궁 무도회 다음 날, 봄의 축제 때 밖에서 만나는 건 어떨까?”
알폰소 왕자는 봄의 축제가 시작하는 날, 산 카를로의 가장 큰 광장인 산 베네딕토 광장에서 축사를 읊을 예정이었다. 일정표를 핥듯이 뒤져서 그나마 찾아낸 외출 일정이었다.
“왕자님. 평민들 사이에서 얼굴 내놓고 여자친구와 손잡고 걸어 다니시게요? 호위 병력을 300명 정도로 증원하시면 허락해 드리겠습니다.”
“자네의 허락은 필요 없다며.”
“꼭 그런 부분만 기억하시네. 보안은 타협 못 합니다. 기각이에요, 기각.”
알폰소는 표정을 찡그렸다. 알폰소는 일정표를 펼친 채 베르나르디노와 함께 데이트 날짜를 고르고 있었다. 물론, 베르나르디노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와의 데이트 날짜다.
“아효, 내 팔자야.”
마흔이 코앞인데 아직까지 장가를 못 들어 독수공방 중인 베르나르디노는 가슴을 탕탕 쳤다.
“내 마누라는 실존 인물인지, 아직 태어나긴 했는지 여부도 모르겠는데 남의 데이트 코스나 짜 주고 있다니.”
“자네가 휴가를 안 쓰고 연애를 안 했는데 지금 나를 원망하면 어떡하나.”
“다 왕자님을 잘 보필하기 위한 제 충정, 넘쳐나는 야근 탓이었거든요?”
“자기의 행복은 남이 챙겨주는 게 아니야. 본인이 챙겨야지.”
베르나르디노는 어린 주군의 입을 때리면 자기가 끌려갈 감옥이 어디인지 가늠해 보고서야 폭력적인 충동을 멈출 수가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세. 산 베네딕토 광장에서 일정이 끝나고, 아리를 내 마차에서 만나는 거야.”
“우리 왕자님은 어쩜 이럴 때만 창의력이 번쩍번쩍하실까.”
알폰소는 베르나르디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베르나르디노는 깐족거림의 본능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장소가 밀폐된 공간인가요? 무슨 음험한 생각을 하신 건가요?”
여기에서 얼굴이 벌게진 알폰소는 더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디노!”
어느 정도는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왁!”
노총각 보좌관은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애인 없는 것도 서러운데 주군에게 화풀이까지 당할 수는 없었다.
* * * 아리아드네의 봄맞이 첫 외출은 그래서 알폰소 왕자와의 외유가 아닌, 줄리아 데 발데사르와의 성황당 방문이었다. 줄리아는 아라벨라의 장례식 때 조의를 표하며 보냈던 자신의 약조를 지켰다. 산 카를로로 돌아오자마자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함께 참배를 가자고 제의한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두꺼운 자수를 놓은 검은 공단 상복을 입고, 검은 장갑과 검은 베일을 쓴 채 집을 나섰다. 전신에서 색깔이 있는 것이라고는 짙은 녹색 눈과 창백한 피부뿐이었다. 극도로 장식을 배제한 차림새는 마치 그녀가 데 마레 대저택에 들어오기 전, 베르가모 농장에 있을 때와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걸친 옷, 표정, 분위기 같은 것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티가 났다. 게다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의 기도(氣度)가 잘 버려진 칼처럼 갈무리 되어 있었다. 성공의 기억, 정확히는 성공적인 복수의 기억이 사람의 태도를 바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몹시 고요히, 타인의 눈에 잘 띄지 않게 정제되게 행동했지만 지금 자기가 실패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위풍당당했다. 마차에서 내린 아리아드네를 만난 줄리아 데 발데사르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아리아드네! 겨우내 스파르타 예법 수업이라도 들었나요? 자세가 발라져서 그런가? 분위기가 왜 다르지?”
아리아드네가 겨울 동안 산 카를로에서 했을 일들을 생각해보던 줄리아는 그녀가 지난겨울에 모친상과 형제상을 둘 다 치렀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조용히 혀끝을 깨물었다.
“귀담아듣지 마세요. 좋아 보인다는 뜻이에요.”
여기까지 말한 줄리아는 또 혀끝을 깨물 뻔했다. 줄초상을 지르고 나서 행복해 보인다는 소리 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 그러니까, 생각보다 실의에 빠지지 않은 것 같아서 좋아 보인다고요.”
막상 아리아드네 본인은 줄리아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찰떡같이 잘 알아들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타란토는 어땠어요!”
그들은 웃으며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부설 납골당으로 향했다. 아리아드네의 여동생 아라벨라와 줄리아의 조모, 그리고 큰오빠가 거기에 묻혀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베르가모 농장에 묻혔다. 파올라 스캄파의 유가족이 내건 조건은 루크레치아가 성대한 장례식도, 호화로운 매장도 하지 못하는 거였다.
“평안을 빕니다. 아멘.”
“아멘.”
줄리아는 아리아드네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모친과 여동생의 이야기를 하기 싫어할까 봐, 재작년에 돌아가신 자기 할머니의 이야기를 했다.
“대단하신 분이었지만 따스하신 분이기도 했어요. ‘이 말썽꾸러기들이 또 사고를 치면 상속에서 배제해 버릴 거야!’라고 호통을 치시고는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걱정이 되신 나머지 쿠키를 들고 와서 입에 물려 주셨지요.”
줄리아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냉하게 생겨서 첫인상이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이렇게 웃으니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할머니와 좋은 추억을 많이 쌓으셨군요.”
“그럼요. 저와 제 오빠, 이제는 돌아가신 큰오빠까지 셋이 어렸을 적에, 할머니께서 무기력증에 빠지셔서 저희 부모님께선 저희들을 할머님께 맡겼어요. 기분 전환 겸해서요.”
그녀는 콧잔등을 약간 찌푸리고는 덧붙였다.
“강아지 대용이었죠.”
하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그렇지만 강아지처럼 뛰어놀던 그 시절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요! 손주들 중엔 저희가 할머니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냈어요.”
줄리아는 할머니의 유골이 모셔진 납골당 한쪽 벽면 중 일부 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생전의 발데사르 할머니, 전대 발데사르 후작 부인의 얼굴을 본떠 조각한 성모상이 유골함 겉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여기 올 때마다, 시간이 얼마나 유한한지 느끼고는 해요. 처음에는 할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만 들고 몹시 슬펐는데, 자주 방문하다 보니 할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에는 사람인 이상 끝이 있을 수밖에 없고, 나도 내일 당장이라도 더 이상 숨 쉬고, 느끼고,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되새기게 되죠.”
줄리아는 몸을 돌려 말없이 묵묵히 서 있던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리아드네. 죄책감 따위는 얼른 흘려보내 버려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쓸데없는 고민도 그만두고요. 망자도 그걸 원하실 거에요.”
줄리아는 전후 사정을 모른 채 자기가 평소에 생각하는 바를 설파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줄리아가 아라벨라의 죽음에 얽힌 사연과, 회귀의 비밀과, 루크레치아의 악행 등등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안 채로 조언을 했더라도 이거보다 더 적확한 조언을 해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참으로 맞는 말이에요, 줄리아.”
줄리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아리아드네, 지금 뭔가 고민이 있죠? 미간에 주름이 펴지지를 않고 있어. 말해봐요.”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고민 중이라는 사실을 줄리아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고민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전부 다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황금률에게 징벌을 받지 않고 받아낼 수 있는 핏값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해 보고 있어요’, 라던가 ‘회귀의 비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세속적으로 내려오더라도 ‘사실 알폰소 왕자님과 비밀 연애 중인데, 정략결혼 상대가 있으셔서 껄끄럽네요’ 같은 이야기도 불가능했다. 결국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고민 중 가장 하찮은 것을 털어놓았다.
“‘봄의 축제’ 전야제인 왕실 무도회에 체자레 백작님이 함께 가자고 하셔요. 그런데 별로 그분과 가고 싶지 않네요.”
“아리아드네 양. 옛날에 티 파티에서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요?”
줄리아의 티 파티에서 영애들이 모여 자기는 알폰소 왕자님 쪽이 취향, 아니 나는 체자레 백작 쪽이 취향이라며 소녀들이 두 패로 갈려 까르르 웃던 날의 이야기였다. 줄리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결국 아리아드네 양의 선택은 알폰소 왕자님인가요?”
아리아드네는 뒷발로 진실에 다가가는 줄리아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아리아드네는 겉으로는 알폰소 왕자와 연결 지을만한 고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니고요! 그냥, 체자레 백작님이 이러시는 게 몹시 부담스러워요.”
“뭐, 체자레 백작이 너무 들이대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죠.”
줄리아는 아리아드네의 변명에 순순히 수긍해 주었다.
“그럼 다른 사람이랑 가면 되잖아요.”
“체자레 백작님을 거절할만한 마땅한 다른 파트너분이 생각나지를 않네요.”
줄리아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수긍했다. 아리아드네에게 다른 구애자가 있다거나, 아니면 친한 남자 사람 친구 같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체자레 백작을 거절한 뒤에 아무나 잡아 파트너 삼은 후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면 아리아드네나 데 마레 가문이 체자레 백작을 정말, 진짜로, 몹시 싫어한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핑계가 있으면 되겠네.”
“그렇죠.”
“아리아드네, 그럼 이건 어때요?”
줄리아는 손뼉을 짝, 쳤다. 반쯤은 친구의 고충을 해결해주기 위해, 반쯤은 집에 있는 악성 재고를 처분하는 기분으로 한 제의였다.
“왕궁 무도회에 우리 오빠를 데려가요.”
“오빠요?”
아리아드네는 발데사르 후작가를 방문하면서 한 번도 줄리아의 오빠를 본 적이 없었다. 저번 생에서도 딱히 줄리아의 오빠를 본 기억은 없었다.
‘발데사르 후작가의 장남인데 내가 왜 모르지?’
사실 발데사르 후작은 매우 건강하게 장수한 편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전생에서 섭정공의 약혼자로서 교류할 일이 있던 산 카를로의 귀족이라면 가주이거나 그 부인이다. 체자레의 즉위 직전까지도 발데사르 후작이 정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녀들까지는 사교계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더듬던 아리아드네의 기억 뒤편에서 희미한 힌트가 나타났다.
“아, 유학을 떠나 있다던?”
“네, 파도바에 있었어요. 얼마 전에 돌아왔죠.”
전생에서는 거기에서 산 카를로로 복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교계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줄리아는 미간에 인상을 썼다.
“뭐,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에요. 다시 나가겠다고 아주 악을 쓰고 있어요.”
아리아드네는 ‘역시나’, 라고 생각했다. 줄리아의 오라버니는 전생에는 무사히 파도바로 돌아가는 데에 성공했던 모양이다.
“학업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네……. 군사학으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요, 신학 공부를 다시 한 다음에 사제 서원을 하고 출가해서 신학자가 되겠다고……. 어머니께서 고민이 많으시죠.”
그녀는 인상을 찡그린 채 친오빠의 험담을 했다.
“아들 하나인데 말이 돼요? 집안은 누가 이으라고……. 오빠가 성직자가 되어 버리면 방계에서 집안에 여기저기 숟가락 얹으려고 달려들 텐데요. 자기 생각만 한다니까요. 산 카를로에 돌아와서도 맨날 자기 서재에 처박혀서 책이나 읽고……. 엄마가 사교 행사에 좀 참여하라고 그렇게 애걸복걸을 해도 들은 척 만 척이에요.”
아리아드네는 군사학으로 파도바에서 대학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폴리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좀 캐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폴리토가 거기에서 깨끗하고 고고하게 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는 일전에 아세레토의 사도 사건으로 신학에서 이름을 떨쳤잖아요? 아리라면 신학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우리 오빠도 만나보는 데에 동의할 거예요.”
‘이크.’
아리아드네는 긴장했다. 한 가지 주제에 깊이 빠진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그녀의 얕은 밑천이 들통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오빠니까, 체자레 백작께는 줄리아 데 발데사르 후작 영애가 자기 오빠 좀 방 안에서 꺼내 달라고 읍소에 읍소를 해서 부탁을 들어주느라 다음번에 뵙겠다고 하면 되죠.”
이것은 솔깃했다.
“어때요, 진행할까요?”
“……일단 오빠분께 한번 물어봐 주세요. 괜찮은 아이디어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