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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우리 둘만의 비밀입니다 (375/733)

<제128화> 우리 둘만의 비밀입니다2022.02.23.

다홍색이 주황색을 거쳐 노란색으로 그러데이션 된 드레스를 입은 라리에사는 멀리서 보면 한 떨기 아펠도른 튤립 같았다.

16583741221615.jpg‘아리가 입으면 예쁠 텐데.’

좀처럼 밝은색의 옷을 입지 못하는 자신의 소녀를 안타까워하며,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 대공녀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다른 한쪽 손은 허공에 들어 맞잡은 채, 빠른 템포의 산 카를로 왈츠곡에 맞추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왕자와 대공녀 커플이 첫 춤을 추기 시작하자, 플로어에는 속속 다른 젊은이들도 합류하기 시작했다.

16583741221619.jpg“왜, 젊은이들이 가서 춤을 추지 않고요.”

바톨리니 노백작이 이사벨라에게 권했다. 이사벨라는 웃으며 사양했다.

16583741221623.jpg“아니요, 첫 번째 곡부터 춤이라니 부끄러워서 싫어요.”

무도회의 첫 춤이란 첫 춤을 다 휩쓸고 다녔던 이사벨라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아코포 아텐돌로 따위와 춤추는 모양새를 남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이사벨라는 파트너를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혀놓고는 매너 있게 춤을 리드하는 이 나라의 왕자와, 그 앞에서 빠른 템포로 턴을 도는 외국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불만족스러웠다.

16583741221623.jpg‘이 구렁텅이에서 곧 나가 주고 말겠어!’

  * * *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 커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은 이사벨라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 역시 무도회장 한편에 서서 그녀의 남자와, 그의 공식 미래 아내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폰소와 아리아드네는 서로 공식 석상에서는 아는 체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폰소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유일한 왕자였고 이번 왕궁 무도회에서 첫 춤을 추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알폰소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인파에 섞여 전혀 부자연스러운 표시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남자는 앞뒤 사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1658374122163.jpg“아리아드네 양.”

16583741221635.jpg“네?”

1658374122163.jpg“불편해 보여요. 괜찮으세요? 우리 잠시 발코니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라도 쐴까요?”

라파엘은 아리아드네가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가 손을 잡고 춤추는 모양새를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아예 장소를 바꿔 주고자 했다. 아리아드네는 티가 났나, 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쓸었다.

16583741221635.jpg“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라파엘은 지그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1658374122163.jpg“정말 괜찮아요? 굳이 강한 척할 필요는 없어요.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걸요.”

그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점을 감안해서 상황 설명은 생략했지만, 아리아드네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누구라도 자기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춤을 추는 모습을 본다면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일종의 고집이었다. 그리고 알폰소가 절대로 단둘이 발코니나 정원에 나가지 말라고 조건을 걸어두기도 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유일한 왕자님께서는 친구조차도 못 믿는 모양이었다.

16583741221635.jpg“아니에요. 필요해서 하는 일인걸요. 신경 쓰지 않아요.”

라파엘은 웃으며 허리를 굽히고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1658374122163.jpg“그럼, 제게 첫 춤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저 꼴을 보느니 자기도 춤을 추는 편이 기분이 나을 것이다. 수천 개의 양초로 밝혀진 거대한 홀에 벽면 가득히 걸린 거울이 양초의 빛을 반사해, 창백한 발데사르의 후계자의 얼굴에도 노란 온기가 떠올랐다. 아리아드네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오른손을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알폰소에게 약속한 대로, 가장 두꺼운 무도회용 장갑을 낀 손이었다.

1658374122163.jpg“가시죠, 시뇨라.”

라파엘은 아리아드네를 이끌고 플로어의 중앙 부근으로 나갔다. 그는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음악에 맞추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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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374122163.jpg“속도는 괜찮은가요?”

그는 아리아드네가 다른 데에 신경이 팔리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스텝이 빠른 편인 산 카를로 왈츠였지만 라파엘은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춤을 춰 왔던 것처럼 편안하게 발을 놀렸다.

16583741221635.jpg“춤을 무척 잘 추시네요.”

1658374122163.jpg“어려서 할머니께 맹훈련을 받았죠.”

그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알아차렸다. 일전에 줄리아가 이야기해 주었던 발데사르 노부인의 이야기였다. 라파엘은 퍽 입담이 좋은 이야기꾼이었고, 아리아드네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1658374122163.jpg“할머니께서는 왕년에 무도회 등지에서 날리셨던 모양인데, 노년에 건강 때문에 시골 영지에서 요양하게 되시자 적적하셨나 봅니다. 저희 삼남매를 응접실에 세워두고 하루 종일 왈츠를 추게 하셨어요. 각이 조금만 무너져도 테이블을 치며 소리치셨죠.”

발데사르 노부인은 병약한 둘째 손자에게 운동을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둘째 손자는 해를 보면 두드러기가 나는 특이 체질이었다. 그녀는 궁여지책으로 손주들 셋을 응접실에 집합시켜 하루 종일 춤을 추게 했다. 아리아드네는 그 응접실을 상상하며 웃었다.

16583741221635.jpg“할머니께서 여장부셨군요. 남매간의 우애가 좋으신 거 같아요.”

1658374122163.jpg“형이 살아계셨을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셋이 늘 붙어 다녔어요. 지금이야……. 줄리아와는 얼굴만 보면 서로 으르렁대죠.”

‘정말로 으르렁대는 형제들을 못 보셨군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혀끝을 간신히 잡아매며 아리아드네는 사교적인 미소를 지었다.

16583741221635.jpg“형님 이야기를 많이 하시네요.”

1658374122163.jpg“그럼요. 제 모든 고민의 근원은 형님의 부재에서 비롯됩니다.”

16583741221635.jpg“저런, 정신적 지주셨나 봐요.”

1658374122163.jpg“아뇨 아뇨.”

그의 다음 단어는 예상외였다.

1658374122163.jpg“순진해 빠진 바보 멍청이였습니다.”

라파엘은 죽은 형 펠리시아노가 얼마나 덤벙대고, 실수 연발에, 천진했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전부 다 욕이었지만 결국에는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토로였다. 한참 펠리시아노의 멍청함에 대해서 욕을 한 다음에야 라파엘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1658374122163.jpg“저는 그래도 형이 가주가 되길 바랐어요. 그래서 일찌감치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했습니다.”

‘기사가 되는 방면도 시험해 보았지만, 몸이 약해서 무리였어요’, 라고 라파엘은 부연했다. 에트루스칸 왕국에서는 보통 장자에게 작위와 토지를 물려주고, 차자 이하는 성직자나 군인, 혹은 상인이 되어 생계를 따로 꾸렸다. 하지만 그것은 통상적인 경우일 뿐이었지 자식 중 몹시 뛰어난 아이가 있다면 차자에게 물려주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어린 라파엘은 형에 비해서 여러모로 눈에 띄게 두각을 나타냈지만, 사랑하는 형을 내쫓고 싶지 않았다.

1658374122163.jpg“성직자가 되기로 한 결심 자체는 천신님에 대한 불타는 신앙 뭐 그런 게 아니었어요. 밥 벌어 먹고살 만한 괜찮은 진로, 뭐 그런 거였죠. 그런데 아리아드네 당신도 아시겠지만, 신학은 참으로 파면 팔수록 심오하지 않습니까?”

라파엘은 흔들림 하나 없이 스텝을 밟으면서도 열변을 토했다.

1658374122163.jpg“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원죄는 존재하는가, 신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복잡한 층위의 질문들에 대해 논리적인 답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대의 신학입니다.”

명석한 젊은이들이 신학자가 되는 가장 흔한 루트였다. 젊은 시절의 데 마레 추기경이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1658374122163.jpg“신비주의 신학은 이제 타파되어야 해요. 기적, 이능, 자연현상에 대한 숭배. 이런 것들은 이제 신세기의 문물에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합니다.”

아리아드네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신실한 천신님의 종이자 논리와 합리의 수호자였지만 예삽교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적과 이교도의 이능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세상은 논리로 해석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복잡했다.

1658374122163.jpg“전 이제 정말로 교단에 투신하고 싶어요. 인생을 연구에 바치기로 이미 마음먹었거든요. 사실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이미 파두아의 대신학교(大神學校)를 졸업했어요.”

파두아의 대신학교는 신학을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전통적으로 사제가 되려면 성황당 부설 수도원에 들어가 어려서부터 허드렛일을 하며 알음알음 배우며 신학을 익혔다. 데 마레 추기경이 밟은 루트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파두아의 대학에 신학대학이 설립되며 파두아 대신학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엘리트 성직자를 배출하는 코스로 급부상했다. 귀족의 자제나 고위 성직자의 서자들은 부설 수도원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배우는 대신에 대신학교에서 고액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리아드네가 물었다.

16583741221635.jpg“파두아에서는 군사학교를 졸업하신 것 아닌가요?”

파두아의 군사학교는 이폴리토가 다닌 곳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애초에 라파엘을 만나보기로 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1658374122163.jpg“집에서는 그렇게 알고 있죠. 제가 집에 보낼 군사학 성적표 때문에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16583741221635.jpg“그럼 성적표를 가짜로 만들어서 집에 부치신 거예요? 학장님 인장이 찍혀서 대학 측에서 발송해야 할 거 아니에요.”

파두아의 군사학교는 성적표를 위조하기가 이렇게 쉬웠나? 아리아드네는 오라비 이폴리토를 한 번 파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1658374122163.jpg“아뇨, 아뇨. 신학과 군사학을 이중으로 전공했습니다. 관련 없는 두 학문을 동시에 하느라 죽는 줄 알았어요. 졸업 필수과목 수업시간이 겹칠 땐 얼마나 등에 땀이 나던지!”

16583741221635.jpg“아……. 이중전공이라니, 대단하셔요.”

1658374122163.jpg“대단은 무슨요. 정규교육 없이 아세레토의 사도를 논파한 아리아드네 양이야말로 대단하죠!”

그녀는 약간의 실망과 약간의 경탄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이폴리토가 성적표를 위조해서 보냈을 가능성이 줄어들어서 조금 실망했으나, 신학과 군사학을 동시에 수료했다니, 앞에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대단해 보였다. 경탄과 밑천이 드러나기 싫은 마음에, 그녀는 라파엘을 듬뿍 칭찬했다.

16583741221635.jpg“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집 안에 관련 도서가 널려 있었어요. 그럼 라파엘 님은 이제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베룸 쿠에리티스’에 가입하시는 건가요?”

‘베룸 쿠에리티스’는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이 주관하는 신학 연구 모임으로, 취미라기에는 수준이 높고 전업이라기에는 금전적 보상이 없는 모임이었다. 예전에 데 마레 추기경이 아리아드네에게 권했지만 아리아드네가 펄쩍 뛰며 사양했던 모임이기도 했다. 구조상, 생계 걱정 없이 학문 놀음을 할 수 있는 귀족만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1658374122163.jpg“아뇨. 저는 그런 취미 모임 말고, 아예 교단에 투신할 생각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라파엘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16583741221635.jpg“예?”

그는 상기된 낯빛으로 은빛 속눈썹과 붉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1658374122163.jpg“부제 고시도 다 쳐서 통과했고, 사제님 한 분의 추천서를 받아 부제 서품만 받으면 바로 입교합니다.”

속세를 떠나 사제님이 될 거라는 폭탄선언이었다. 이 남자는 발데사르 후작가에 하나 남은 후계자다.

16583741221635.jpg“가족들은……. 모르시죠?”

모르겠지.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아리아드네는 놀라서 이렇게밖에 반문할 수가 없었다.

1658374122163.jpg“그럼요. 알았으면 저희 부모님이 절 가만히 놔두실리가요.”

라파엘은 유쾌하게 웃었다.

1658374122163.jpg“말씀하지 않아 주실 거죠? 우리 둘만의 비밀입니다?”

알폰소가 내건 수많은 조건들 중에는 ‘라파엘과 단둘이 비밀을 만들지 말 것’은 들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아리아드네가 줄리아나 다른 발데사르 후작가의 구성원에게 전하는 순간 그 집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자기 집의 일만으로도 머리가 다 복잡했다. 남의 집 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6583741221635.jpg“비밀 지켜 드릴게요.”

그녀는 왈츠의 마지막 턴을 돌면서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8374122163.jpg“약속이에요.”

라파엘은 왈츠를 추느라 그녀와 맞잡은 자신의 왼손으로 그녀의 손바닥을 더듬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16583741221635.jpg“!”

갑자기 손을 쥐는 감촉에 아리아드네가 놀라 라파엘 데 발데사르를 쳐다본 것과 동시에, 악단이 왈츠곡의 마지막 음표를 연주했다. - 다단. 라파엘은 언제 그랬다는 듯이 한 걸음 뒤로 떨어져, 우아하게 허리를 굽혀 자신의 파트너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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