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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주제를 모르는 여동생 (388/733)

<제6화> 주제를 모르는 여동생2020.12.23.

- 쿵! 아리아드네가 발을 굴렀다. 오만불손한 하녀는 아리아드네의 기세에 움찔 놀랐다.

1660081903346.jpg“소속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느냐.”

열다섯 살 소녀답지 않게 낮게 깔린 목소리와 태도에 서린 위엄에 하녀는 기가 죽어 아리아드네의 눈치를 보았다.

16600819033471.jpg“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아가씨께서 미천한 제 소속까지 굳이 아실 필요는 없으실 것 같아서…….”

1660081903346.jpg“소속.”

하녀는 그제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읊었다.

16600819033471.jpg“이사벨라 아가씨를 담당하는 2층 하녀입니다…….”

아리아드네는 하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불타는 빨강 머리에 짧고 통통한, 지금의 아리아드네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하녀였다.

1660081903346.jpg“이름.”

16600819033471.jpg“아가씨…….”

빨강 머리 하녀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의 매서운 눈초리에 이내 고개를 숙이고 이름을 댔다.

16600819033471.jpg“말레타라고 합니다…….”

1660081903346.jpg“너는 내가 두고 보겠다.”

자라처럼 고개를 푹 숙인 붉은 머리 하녀에게 아리아드네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1660081903346.jpg“태도 똑바로 하렴.”

그 말을 들은 하녀 말레타는 고개를 숙인 채 허둥지둥 허리를 푹 굽혀 인사를 하고 방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 * * 아리아드네는 누더기를 소박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하녀의 뒤를 따라 데 마레 추기경의 처소로 향했다. 아리아드네가 불려간 곳은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가 아닌 그의 전용 응접실이었다. 서재 안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는 그였지만 응접실까지는 가족은 간혹 허용되고는 했다. - 똑똑.  

16600819033471.jpg"추기경 예하. 아리아드네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하녀는 비굴할 정도로 깍듯하게 방문을 노크하고 추기경에게 아리아드네의 도착을 고했다. 저번 생에서 이 자리에 서서 저 황금 도료로 채색된 아기 천사와 눈이 마주치고 새파랗게 겁에 질렸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축이 되었었지만 이번 생의 아리아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9년간의 사교계 일인자의 생활로 사치품은 진력이 나게 본 터였다. 사용인이 열어준 문으로 아리아드네는 당당하게 들어갔다. 그녀는 완벽한 궁중식 예법을 지키며 사뿐히 들어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1660081903346.jpg“기체후 일향만강하시옵니까? 불초자식이 오랜만에 추기경 예하를 뵈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왼쪽 눈썹을 치켜뜬 채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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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조그만 덩치의 50대 중년 남자였다. 약간 쥐를 닮은 인상이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얇은 뼈대, 좁은 어깨 등의 특징은 이사벨라와 많이 닮았으나, 여성적인 특징을 가진 50대 남자는 잘생겼다기보다는 볼품이 없었다. 대신 형형하게 빛나는 진녹색 눈동자는 그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16600819037352.jpg“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베르가모 영지에서 자라느라 크게 공부할 기회도 없었을 터인데 잘 자라 주어서 이 아비는 기쁘구나.”

1660081903346.jpg‘말씀만이라도 신경 쓰는 척을 해주시니 감사하기 짝이 없네요.’

아리아드네는 속마음을 감추고 낭랑하게 대답했다.

1660081903346.jpg“더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가문의 이름을 빛내고 부모님과 형제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습니…….”

16600819033471.jpg“그럼. 부끄럽지 않아야지.”

40대의 귀부인이 아리아드네의 말을 잘랐다. 루크레치아였다.

16600819033471.jpg“여자의 덕성은 배우고 익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는 부모와 형제를, 나이 들어서는 남편을 잘 보필하고 모시며 수발하는 것이다.”

이사벨라의 어머니답지 않게 광대뼈가 높고 얼굴이 긴 여자였다. 하지만 아마빛 머리카락과 자수정 눈은 자신의 딸과 똑같았다. 인상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그녀는 치켜 올라간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며 경고성 훈계를 했다.

16600819033471.jpg“나대지 말고 여자애답게 음전하게 지내라.”

그녀는 포르토 공화국 스타일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가슴 대부분을 옷 바깥으로 내놓은 다음 그 위를 얇은 레이스 한 겹으로만 가린 과감한 스타일이었다. 부들부들하고 뽀얀 피부는 나이에 비해 퍽 육감적이었지만 훌륭한 정부라면 모를까 모범적인 대저택의 안주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1660081903346.jpg‘한때는 저 여자처럼 되는 것이 올바른 귀족의 표본인 줄 알았던 때도 있었지.’

온갖 사교계 경험을 쌓고 1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서 다시 만난 그녀는……. 귀족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천박했다.

1660081903346.jpg‘저런 드레스를 입고 남한테 음전하게 굴라는 훈계를 하는 정신상태는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아리아드네는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생각들이 티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아이답게 방긋 웃었다.

1660081903346.jpg“예, 마님. 말씀을 잘 따라 좋은 자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데 마레 추기경이 눈썹 끝을 올렸다.

16600819037352.jpg“마님?”

하지만 그 치켜 올라간 눈초리는 아리아드네가 아닌 루크레치아를 향한 것이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서출들은 아예 따로 호적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공식적으로는 정부인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것처럼 구는 것이 예의였다. 적출 자녀들 못지않게 효도를 하는 것이 서출 자녀의 미덕이었고, 서출을 자기 소생의 자식들과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어진 귀부인의 미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출 자녀가 적모에게 허락도 없이 먼저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크레치아는 남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입꼬리만 힘겹게 들어 올려서 웃음으로 아리아드네의 인사를 받았다.

16600819033471.jpg“마님이 아니라 어머니라고 부르려무나. 우리는 잘할 수 있을 게다.”

감추지 못하는 싫은 티가 났지만 새 자식과 헌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1660081903346.jpg“감사합니다, 어머니.”

16600819037352.jpg“보기가 좋구려.”

아리아드네는 그림처럼 웃었고, 데 마레 추기경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 둘을 칭찬했다. 루크레치아도 어쩔 수 없이 억지 미소를 띠고 아리아드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 높고 맑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16600819039996.jpg“가족에게 돌아온 것을 환영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물어봐.”

더없이 아름다운, 작고 예쁜 산 카를로의 요정. 이사벨라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30대 초반의 나이에서 열댓 살 가량 어려진 모습이었다. 만개한 장미처럼 화려하게 아름다웠던 과거와는 다르게 작은 체구의 소녀 이사벨라는 정말로 옛 이야기의 한 자락에서 불쑥 튀어나온 요정 같았다. 불쾌함을 못내 숨기지 못했던 그녀의 어머니와 다르게, 이사벨라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표정으로 상냥하게 웃었다.

16600819039996.jpg“우리는 자매잖아. 많이 도와줄게.”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숨을 들이쉬었다. 압도적인 미모였다.

1660081903346.jpg‘저 웃는 낯에 속으면 안 돼.’

달콤한 미소로 희생양을 꾀어서 등 뒤에 칼을 꽂는 아름다운 이사벨라. 손이 절로 덜덜 떨렸다. 아리아드네는 손 떨림이 보이지 않도록 양손을 각기 반대쪽 옆구리에 끼워 숨겼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할 수 있는 최대한 선량하고 호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꾸벅 인사했다.

1660081903346.jpg“감사합니다.”

저 달콤하게 미소짓는 완벽한 언니와 잘 지내고 싶어서 평생을 눈치 보고 시중을 들며 비굴하게 살았었다. 그녀가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따스하고 좋은 사람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등에 칼을 꽂았던 그날도 그녀는 저렇게 웃고 있었던 터였다. 아리아드네의 요동치는 감정을 최대한 누른 인사에 이사벨라는 예의 해사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아리아드네가 옆구리에 끼워서 숨긴 두 손을 억지로 당겨내어 자신의 두 손에 맞잡았다.

16600819039996.jpg“나는 또래 동생이 생기면 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 같이 티파티도 하고, 시내에 가게 구경도 나가보고……. 옷이나 보석 좋아하니?”

1660081903346.jpg“아, 아니요, 제게는 다 과분합니다.”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의 몸에 손을 대자 아리아드네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된 것처럼 몸이 굳었다. 어려서부터 굴종했던 기억이 마치 팔다리를 지배하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드네는 밖에서 보이지 않기를 기도하며 이를 악물었다.

16600819039996.jpg“언니라고 불러.”

이사벨라는 타고난 지배자 같은 태도로, 여유롭게 웃으며 따듯하게 권했다.

16600819033471.jpg“언니 같은 소리 하네!”

그때, 뾰족한 목소리가 구석으로부터 찔러 들어왔다.

16600819033471.jpg“쟤가 왜 우리 자매야? 난 인정 못 해.”

16600819033471.jpg“아라벨라!”

루크레치아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 주인의 입을 막았다. 열 살가량 되어 보이는 아마빛 머리카락의 소녀였다. 소녀는 언니와 다르게 아버지를 닮아 아리아드네와 같은 진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채도가 낮은 머리카락과 진한 눈이 조화롭지 못해 그 친언니만큼의 외모는 아니었다. 아직 젖살이 덜 빠진 볼이 오동통했다. 데 마레 추기경의 막내딸, 아라벨라 데 마레였다. 지난 생에서는 1123년에 대유행한 흑사병으로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었다. 어린 소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아리아드네를 삿대질했다.

16600819033471.jpg“우리랑 닮았어? 머리도 새카맣잖아. 공부도 못했고 류트도 못 탈걸? 라틴어는 할 줄 알아?”

이쯤 되자 루크레치아는 입으로만 말리던 것을 멈추고 가장의 눈치를 보며 허둥지둥 달려와 아라벨라를 뒤에서 껴안았다. 하지만 그녀가 막내딸을 달래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고 데 마레 추기경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16600819037352.jpg“그만!”

데 마레 추기경은 왼손을 휘휘 내저으며 엄포를 내렸다.

16600819037352.jpg“루크레치아,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한 거요? 내가 성황청 표창받을 만큼 우애 좋게 살래? 기본만 하자는 거잖아 기본만!”

16600819033471.jpg“죄송합니다, 예하. 아라벨라가 아직 어려서…….”

16600819037352.jpg“열 살이 어리긴 뭐가 어려! 베르가모 영지 같은 데에서 열 살이면 농사꾼 한 사람 몫을 할 나이요!”

아라벨라는 아리아드네 때문에 내가 혼이 난다는 양 적의를 가득 담고 아리아드네를 째려보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 상황이 마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고성이 오가는 상황 자체를 더할 나위 없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중요한 사람이 같이 있을 때 끝의 끝까지 착한 척을 하는 것은 이사벨라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16600819037352.jpg“나가보시오!”

그의 축객령에 데 마레 추기경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일제히 응접실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등을 보이지 않도록 걸었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신하가 왕에게 보이는 예법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식솔들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그의 신하들에 더 가까웠다.

16600819037352.jpg“참, 아리아드네에게 이사벨라와 아라벨라와 같은 라틴어 선생을 붙이시오. 나머지 가정교육도 똑같이.”

루크레치아는 불만을 겉으로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다소곳이 수긍했다.

16600819033471.jpg“알겠습니다, 예하.”

  * * * 데 마레 추기경의 응접실에서 물러난 루크레치아는 이를 악물고 아리아드네에게 한마디 했다.

16600819033471.jpg“문제 일으키지 마라.”

아리아드네는 겉으로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지만, 속으로는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1660081903346.jpg‘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문제라고는 당신 자식이 일으켰지. 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하녀가 문 앞에서 시립하고 있는 가운데 루크레치아는 먼저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복도에는 이를 가는 아라벨라와 이사벨라, 그리고 눈을 멀뚱멀뚱 뜨고 서 있는 아리아드네 셋만 남게 되었다. 아라벨라는 원통함을 못 참겠다는 듯 이를 갈며 눈을 부라렸다.

16600819033471.jpg“난 인정 못 해!”

열 살 소녀는 씩씩대며 조그만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해댔다.

16600819033471.jpg“농장 하녀로 자란 주제에! 천한 하녀 어미한테서 태어난 주제에!”

아리아드네는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고작 열 살짜리가 이런 단어를 어디서 배웠을까. 보나 마나 제 부모가, 혹은 독사 같은 언니가 아이에게 속살거린 단어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의 고집이라고 속 좋게 웃으며 넘어가기에는 아리아드네는 이번 생엔 참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타고난 기질 역시 그다지 유순한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웃음 뒤에 가시를 가리며 한 마디를 건넸다.

1660081903346.jpg“아버지 말씀을 듣자 하니 농장에는 네가 가게 생겼는걸?”

16600819033471.jpg“뭐?”

1660081903346.jpg“열 살이면 충분히 한 명의 농사꾼이라시잖아.”

16600819033471.jpg“이이이익!!”

아라벨라는 분을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아리아드네 쪽으로 돌진해왔다. 뒤는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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