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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아름다운 이사벨라의 민낯 (394/733)

<제12화> 아름다운 이사벨라의 민낯2021.01.13.

과장된 높은 소리의 탄성이었다. 하지만 꾀꼬리 소리 같은 목소리와 어울려 모두의 눈길이 이사벨라에게 확 쏠렸다. 그녀가 말을 건 상대는 본인의 어머니인 루크레치아였다. 하나 의도된 청자는 노골적으로 마르그리트 왕비와 그 시녀들이었다.

16600819747028.jpg“왕비님께서 예사크의 곤이 희생하신 부분에 대해 설교를 청하셨다니 너무 기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잖아요 어머니.”

루크레치아는 흐뭇하게 딸의 가락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16600819747033.jpg“갈리코 왕국어를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어느 부분이 제일 좋았니.”

16600819747028.jpg“예사크의 곤이 희생하신 부분이요! 예사크의 곤이 만민을 위해 희생하시자 백성들이 그에게 모두 감사해 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성황서에 따르면 예사크의 곤은 희생을 두 번 했다. 첫 번째로 목숨을 바쳤을 때는 손가락질을 당하다 고독하게 죽었고, 부활의 기적을 보인 이후 대륙에 내린 천벌을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일반 대중은 예사크의 곤을 칭송하고 우러러보았다. 오늘의 설교는 예사크의 곤의 첫 번째 희생에 관한 것이었다. 이사벨라는 갈리코 어가 짧은 나머지 ‘희생’(sacrifice)이라는 단어만 알아듣고 귀족들이 더 좋아하는 두 번째 희생에 대한 설교라고 생각해서 잘난 척을 하다가 외국어가 짧음을 들켜버린 것이다.

16600819747042.jpg“오랜 여정을 거치면 결국 칭송이 희생을 따라오기는 하지요.”

갈리코 왕국에서부터 마르그리트 왕비를 따라온 친정 시녀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자기를 구해 주려는 시녀의 호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화사하게 웃었다.

16600819747028.jpg“하지만 예사크의 곤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직후에 가이야스 일곱 언덕의 주민들이 곧바로 모두 나와서 일제히 통곡하잖아요! 아아― 돌아가신 것은 물론 슬픈 일이지마는, 예사크의 곤의 제자들은 얼마나 짜릿했을까요?”

이제 분위기는 숫제 빙고(氷庫)의 내부 공기처럼 싸늘해졌다. 성인의 희생을 치하하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그가 얻었을 명성을 부러워하는 것은 철이 없다는 말로도 덮어주기 힘든, 인성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었다. 갈리코 어를 전혀 못 해서 자기 딸이 무슨 실수를 한 것인지 가늠을 못 하던 루크레치아마저도 기가 죽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항상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없던 이사벨라는 크고 예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깜박 해 보이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쓴웃음을 띈 채 결국 아리아드네가 나섰다.

1660081974705.jpg“저는 예사크의 곤께서 내셨던 용기가 가장 좋습니다.”

여기서 분위기 수습을 할 방도는 제일 막내인 자신이 재롱을 피우는 것 외에는 없어 보였다.

1660081974705.jpg“돌아가시기 전에 아주 무서우셨을 텐데요.”

16600819747042.jpg“아아.”

16600819747042.jpg“어린 영애가 착하네요.”

아직 어른과 아이 사이의 경계에 있는 외모의 소녀가 속 깊게 성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은 어른들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분위기가 순간 풀리자 귀부인들은 사교적인 잡담 한두 마디를 던져 순식간에 화제를 돌려 버렸다. 조금 늦게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자들에게 뒤를 맡기고 가는 것도 불안하셨을 거고요’라고 아리아드네는 덧붙였지만 다들 못 들은 듯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시녀를 쳐다보고 귀에 속삭였다. “So the younger one speaks Galica.”  

16600819747042.jpg[“둘째 딸은 갈리코 어를 하는군.”]

흡족해진 왕비의 시선은 이제 루크레치아로 옮겨갔다. 오늘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네크라인이 더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루크레치아는 왕비의 눈길을 받자 호들갑스럽게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16600819747033.jpg“에트루스칸 국 타란토 교구의 성도 루크레치아 데 로시가 마르그리트 왕비 전하를 뵙습니다!”

호들갑은 주눅이 든 것을 숨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루크레치아는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에 불과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본인을 처녀적 성으로 지칭해야 했다. 아리아드네는 여기서 마르그리트 왕비가 루크레치아를 ‘루크레치아 양’이라고 부르면 정말 웃기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식을 셋이나 낳았고 큰아들이 장성했지만 어쨌건 루크레치아는 결혼한 적이 없다. 아마 얼굴 앞에다 대고 ‘루크레치아 양’이라고 부르면 새파랗게 질려서 부들부들한 다음에 집에 와서 7박 8일 정도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집안의 기물을 부수지 않을까. 하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는 추기경의 정부와 척을 질 생각은 없는지 고갯짓으로 루크레치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16600819747042.jpg“…….”

왕비의 침묵이 민망했는지 왕비의 시녀가 밝게 안내를 했다.

16600819747042.jpg“응접실로 오시지요. 귀부인들께서 모여 계십니다.”

왕비는 데 마레 추기경의 식솔들에게는 단 한 마디도 직접 건네지 않은 채 위엄 있게 걸음을 옮겼고 대신 왕비의 시녀가 루크레치아와 일행들을 작은 복도로 이어진 소미사당 뒤편의 응접실로 인도해갔다.

16600819747028.jpg“어머! 정말로 예쁘네요!”

이사벨라의 경탄이 어울리게 녹색 비단과 마호가니 목재로 곱게 꾸며진 작은 응접실에는 많지 않은 부인들이 애프터눈 티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앉아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최측근 귀부인들이었다. 엉거주춤하게 입장한 루크레치아가 어디에 앉아야 할지 눈치를 봤다. 루크레치아는 이런 이너 서클에 끼는 것이 평생소원이었지만, 막상 그날이 닥치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는 듯했다.

16600819747033.jpg“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한 루크레치아가 중앙 쪽의 소파로 향하자, 귀부인들은 거리의 비둘기 떼가 행인을 피하듯 자리를 옮겼다. 그중 가장 티가 나게 루크레치아를 피한 것은 큰 키에 회색 머리카락을 한 귀부인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실소를 흘렸다.

1660081974705.jpg‘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었다. 전생에 체자레가 레오 3세의 사생아라며 입소문을 퍼트리다 티파티에서 아리아드네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바로 그 부인이었다. 마르케즈 백작 부인은 당연히 어린 아리아드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마르그리트 왕비가 응접실로 입장하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일어나서 왕비를 맞이했다.

16600819750944.jpg“왕비 폐하를 뵙습니다!”

응접실 안의 귀부인들이 밝고 떠들썩하게 왕비에게 인사를 올렸다. 루크레치아에게는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마르그리트 왕비는 마르케즈 백작 부인에게는 환히 웃으며 친근하게 답례를 했다.

16600819747042.jpg“내 충실한 친구인 마르케즈 백작 부인, 오늘도 얼굴이 좋군.”

16600819747042.jpg“다 왕비 폐하께서 굽어살펴 주신 덕이 아니겠습니까.”

왕자의 머리색과 똑같은 금발 머리를 한 창백한 피부색의 왕비는 외국인임이 틀림없는 억양을 숨기지 못했다. 진한 갈리코 왕국 억양에 루크레치아는 살짝 놀랐지만 왕비의 응접실에 있던 귀부인들은 어느 한 사람도 그것이 이상하다는 티를 내지 않으며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일행에 끼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 아리아드네를 곁눈 짓으로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소개를 해주었다.

16600819747042.jpg“이쪽은 데 마레 추기경의 식솔들일세. 그 딸아이가 영특하고 신앙심이 깊다고 해서 초대를 해 보았네.”

귀부인들이 ‘추기경의 딸아이’ 이야기에 수군거리며 쳐다본 것은 이사벨라 쪽이었다. 루크레치아가 신분 탓에 사교계에서 자리를 제대로 못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벨라는 작년에 있었던 데뷔탕트 이후로 영리하고 산 카를로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이미 소문이 모두 나 있는 상태였다. 이사벨라는 반걸음 앞으로 나가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사뿐 인사를 했다.

16600819747028.jpg“이사벨라 데 마레입니다. 왕국에서 가장 귀하신 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뽀얀 피부에 살짝 올라와 있는 장밋빛 홍조는 몹시 사랑스러웠다. 진주가 아로새겨진 머리가리개 아래로 상앗빛의 최고급 드레스를 입은 이사벨라는 출생의 흠집과 상관없이 더할 나위 없이 예쁘고 귀해 보였다.

16600819747042.jpg“어머, 이 아가씨가 이사벨라 데 마레 영애로군요.”

16600819747042.jpg“소문대로 참 예쁘네요.”

16600819747042.jpg“귀엽기도 해라.”

재잘대는 귀부인들을 앞에 두고 아리아드네는 반 박자 늦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인사의 대상은 귀부인들이 아니었고, 시선과 몸의 방향은 마르그리트 왕비를 향하고 있었다.

1660081974705.jpg“차녀 아리아드네 데 마레입니다. 고귀한 핏줄에 예사크의 곤의 가호가 있기를.”

귀부인들은 예쁘고 티 없이 자란 큰딸을 보다가 꾀죄죄하고 우중충한 둘째 딸을 보니 약간 말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참 예쁘구나, 같은 형용사는 앞서 나온 큰딸에게 모두 써 버려서 더 해줄 칭찬도 없었다. 하지만 왕비는 아리아드네의 인사를 기쁘게 받았다. 입가는 무뚝뚝했지만 눈가에는 웃을 때 짓는 깊은 까마귀 발 주름이 지어졌다.

16600819747042.jpg“아직 어린아이가 인사를 참 예의 바르게 하는구나.”

마르그리트 왕비가 데 마레 가의 구성원에게 처음으로 직접 건넨 한마디였다. 귀족 부인들이 아니라 왕비에게 영광을 돌린 것이 흡족했던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왕비의 인정을 받자 귀부인들은 언제 이사벨라에게 눈길 한 번 주었냐는 듯이 아리아드네에게 어린 영애가 참 침착하다는 둥, 교육을 잘 받았다는 둥 칭찬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관심의 바깥으로 밀려난 이사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16600819747028.jpg‘마르그리트 왕비는 눈이 삐었어!’

그때, 부인들의 무리를 이끌고 있던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외곽에 앉아 있던 루크레치아에게 말을 걸었다.

16600819747042.jpg“이사벨라 양의 드레스가 참 예쁘네요. 어느 양장점에서 맞춘 건가요?”

루크레치아는 진짜 귀족의 한마디에 반색하며 대답했다.

16600819747033.jpg“저희 집의 침모가 집에서 만든 것이랍니다.”

이사벨라가 그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드레스 자락을 탁탁 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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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상등급의 비단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볼륨을 잡아 이사벨라의 마른 체형을 보완한 최고급 맞춤형 드레스였다. 두툼한 실크 원단 아래로 질 좋은 슈미즈의 레이스가 언뜻 보였다.

16600819747042.jpg“침모의 솜씨가 좋네요. 우리 딸한테도 한 벌 맞춰주고 싶은데 양장점에서 산 것이 아니라서 아쉽게 되었어요.”

진짜 귀족 부인과의 정기적인 교류가 정말로 고팠던 루크레치아는 처음 본 사이에 건네기는 과한 호의를 베풀었다.

16600819747033.jpg“저희 침모한테 맡기시면 되지요.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묘한 얼굴로 웃었다.

16600819747042.jpg“잘하는 침모가 손이 느린가 본데 저까지 일을 더 할 수는 없지요. 큰 따님과 둘째 따님의 옷을 지은 침모가 다른 사람 아닌가요?”

16600819747042.jpg“……!”

16600819747042.jpg“그러고 보니?”

의미심장한 말에 귀부인들은 저마다 이사벨라와 아리아드네의 드레스를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과연 큰딸과 작은딸의 옷차림은 크게 차이가 났다. 이사벨라의 착장은 몹시 호화로웠다. 드레스며 구두며 머리 장식이며 모두 최신 유행을 정확히 맞춘 상등품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어른의 손길이 닿지 않은 티가 여실히 났다. 루크레치아가 좀 더 사교계에 안착한 사람이었다면 귀부인들은 말을 아꼈을 것이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는 입지도 없었고, 마르그리트 왕비는 그녀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항상 마르케즈 백작 부인에게 밀려서 이인자인 치보 후작 부인이 마르그리트 왕비의 기색을 살짝 살피더니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했는지 대놓고 포문을 열었다.

16600819747042.jpg“후덕한 부인은 자녀들은 잘 거두어 챙겨야 합니다.”

질 수 없다는 듯, 내지는 기다렸다는 듯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대뜸 말을 받았다.

16600819747042.jpg“내연녀는 나쁘지만 아이는 어쨌거나 가문의 일원이지요. 가문이 있어야 내가 있는 것입니다.”

부인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16600819747042.jpg“교양이…… 상식이…….”

16600819747042.jpg“아이는 죄가 없……. ”

16600819747042.jpg“어쩜 가여워라……. ”

루크레치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지만 친딸은 최고급으로 입혀 놓고 서출 딸은 싸구려를 입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루크레치아는 순발력이 빠른 편도 아니었다. 어머니를 곤경에서 구해 준 것은 이사벨라였다.

16600819747028.jpg“부인들께 실례합니다. 제 동생은 건강이 안 좋아 베르가모 영지에서 지내다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

이사벨라는 예쁘게 웃으면서 다들 보시라는 듯 아리아드네에게 다가가서 친근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16600819747028.jpg“동생의 옷가지는 모두 최고급으로 침모가 지금 짓고 있어요. 아직 마르고 작아서 제가 작년에 입던 옷을 준 거예요.”

1660081974705.jpg“…….”

16600819747028.jpg“원래 검소한 제 취향에 맞춘 옷이라서 그래요. 자매들은 어려서는 옷을 같이 입잖아요.”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를 쳐다보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기 같은 피부에 콕 보조개가 패었다.

16600819747028.jpg“안 그러니, 내 동생?”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따라 웃었다.

1660081974705.jpg‘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의 만행들을 일러바치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좀 전에 이사벨라가 했던 것처럼 드레스 자락을 탁탁 쳐서 폈다.

1660081974705.jpg“맞아요 언니. 저한테는 과분하게 좋은 드레스예요. 입던 옷인 줄은 몰랐지만 참 마음에 들어요.”

드레스 자락이 펄럭이자 안에 입은 면 슈미즈가 보였다. 낡고 닳은 슈미즈를 본 귀부인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16600819747042.jpg"세상에! 면이 거친 것 좀 봐!"

16600819747042.jpg“색깔이 완전 누런데요? 저거 원래 무슨 색이었어요?”

16600819747042.jpg"저 얼룩 좀 봐요! 집안일 하다 튄 얼룩인데? 부엌일도 시키나?"

루크레치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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