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5화> 고귀한 유대 (397/733)

<제15화> 고귀한 유대2021.01.24.

순간적으로 나온 비명이라 루크레치아는 미처 그 비명에 반응할 새도 없이 관성적으로 상아 펜대를 재차 내리쳤다. - 부웅! 가속을 탄 루크레치아의 오른팔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산차가 열 대째 매를 맞기 직전에, 아리아드네는 몸을 던져서 산차 앞을 막아섰다. 그 열 대째 매는 산차 대신에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때렸다. - 퍽! 벼락을 맞은 것처럼 따가운 고통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매운 타격감이 왼쪽 어깨에서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분노한 루크레치아의 오른팔이 다시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고 열한 대째 매를 각오하고 있었던 순간,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에는 눈물 나게 반가운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16600819918061.jpg“아니,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데 마레 추기경이 귀가했다. 데 마레 추기경이 흰 추기경복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16600819918061.jpg“집안 꼴이 이게 뭐야!”

악귀처럼 분노에 떨던 루크레치아는 데 마레 추기경을 보자 대번에 눈물을 쏟았다.

16600819918072.jpg“당신! 왜 이제야 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오늘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요?”

루크레치아는 눈물로 호소하며 오늘 마르그리트 왕비가 그녀를 ‘데 로시 양’이라고 부른 이야기와, 그게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마르그리트 왕비가 얼마나 나쁜 년이었는지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토로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인내심 있게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있다가, 질문을 했다.

16600819918061.jpg“대체 왜 이 하녀는 두들겨 맞고 있는 거고 아리아드네는 같이 때리는 거요?”

16600819918072.jpg“다 이년들 때문이라고요!”

16600819918061.jpg“마르그리트 왕비가 기껏 당신을 초대까지 해 놓고서 왜 다짜고짜 당신을 ‘데 로시 양’이라고 불렀단 말이요? 하녀가 잘못했다손 치더라도 고작 하녀 때문에 왕비가 당신을 그렇게 구박했다고?”

루크레치아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니, 다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화를 냈다.

16600819918072.jpg“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16600819918061.jpg“뭐야?”

16600819918072.jpg“나는 누구든 골라서 결혼할 수 있었어! 평범하게 귀족 부인이 될 수 있었다고! 그런데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과 이렇게 살게 된 거잖아, 당신 때문에 정실부인이 못 된 거잖아……. 당신이 나를 망쳤어!”

루크레치아는 나라를 망하게 할 만한 미인도 아니었고, 아주 고귀한 혈통의 귀족 영애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그녀와 교류하는 주변 귀족 중에 데 마레 추기경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한 남편감이 있지도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아주 잘해 보았자 시골 남작의 부인, 대개의 경우라면 단승 기사나 변호사, 의사 같은 중인의 부인으로 끝났을 거라는 것이 공정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루크레치아의 단 하나의 재능은 데 마레 추기경이 루크레치아는 더 잘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16600819918061.jpg“루크레치아, 당신 또 왜 그래.”

16600819918072.jpg“난 훨씬 잘할 수 있었는데, 당신이 뭔데 날 무시해…….”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의 부부싸움 패턴은 뻔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데 마레 추기경이었지만 루크레치아의 이 공격에는 늘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마치 그들이 젊었던 시절의, 가능성이 무한했던 그 때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여하튼, 연극의 주인공이 바뀌었으니 기존 인물은 물러나 드릴 타이밍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껴안고 있던 산차를 데리고 뒤로 슬금슬금 발을 빼며 응접실을 저 신파극을 찍는 한 쌍의 바퀴벌레에게 온전히 내어주기로 했다. 바닥에 웅크려 있던 아라벨라에게도 입술에 손을 얹고 조용히 하라고 시키며 챙겨서 나갔다. 눈치가 빤한 이사벨라는 이미 내빼고 없었다. 무게중심을 아래에 두고 뒷걸음질로 응접실을 나가 복도를 거쳐 현관까지 나오는 길은 마치 천릿길 같았다. 현관에 도착한 아라벨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흩어져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아리아드네는 서둘러 산차를 끌고 3층의 다락방까지 뛰어 올라간 다음에야 긴장이 탁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16600819921833.jpg“산차……!”

온통 전신에 두들겨 맞은 흔적이 가득한 주근깨 소녀의 맑은 연두색 눈이 아리아드네를 향했다. 온통 뒤집어쓴 푸른 잉크 밑으로 보라색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총천연색의 산차를 보고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16600819921833.jpg“산차, 산차,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다 내가 잘못한 거잖아!”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껴안고 펑펑 울었다.

16600819921833.jpg“넌 잘못한 게 없잖아!”

산차는 말라붙은 입술을 다시며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16600819921845.jpg“아가씨가 제 목숨을 구해주셨잖아요.”

16600819921833.jpg“뭐……?”

16600819921845.jpg“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다 갚을 거예요. 저는 영원히 아가씨 편이에요.”

아리아드네가 산차를 데리고 오게 된 것은 산차를 구해줘야 하겠다는 순수한 결심에서가 아니었다. 말레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다 보니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에 불과했다. 산차를 데리고 오기 위해 루크레치아에게 빌기는 했지만, 되면 말레타를 견제할 패와 이용할 하녀가 생길 테니 좋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한 것이지 지금 이 산차의 호의와 사랑만큼 간절하게 산차 자체를 위해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넘치는 선의와, 사랑과, 맹목적인 믿음을 받으니 자신의 행적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산차의 맑은 눈이 아리아드네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최소한 받은 만큼은 온전하게 돌려줘야 하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16600819921833.jpg“산차,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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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다시금 세게 껴안았다.

16600819921833.jpg“이제부터는 내가 반대로 너를 영원히 지켜줄게. 말레타도 가만두지 않을게.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치워 버릴 거야.”

아리아드네는 가슴 깊숙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책임감과 함께, 이상하지만 전능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내가 나 혼자만이 아니고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두 명 몫만큼의 힘을 내야 하고 또 두 명을 지킬 수 있다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는 우정이라기보다는 좀 더 맹목적인, 희미한 기억 속의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받아본 적이 없었던 가족의 사랑 같기도 했다. 산차의 측에서 가슴을 가득 메우는 강렬한 감정은 인생을 구원해 준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추종이었다. 가족이 차례대로 가난과 굶주림에 죽고, 친자매인 말레타는 그녀를 가열하게 배신했다. 산차의 인생에 남은 것이라고는 하늘에서 내려와 그녀를 구원해 준 아가씨, 아리아드네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가씨를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리아드네의 왼손 약지의 붉은 기운은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아리아드네의 하얀 피부를 삼켜버릴 듯이 폭발적으로 꿈틀대다가, 소녀들의 포옹과 함께 급격히 가라앉았다. * * * 왼손 약지의 핏빛 기운이 짙어진 것은 기분 탓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아주 미약하게 홍조가 더 도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던 왼손 약지 마지막 마디는, 어제의 난리통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모기에 물린 듯한 분홍색으로 그 색깔이 진해져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왼손 약지를 한쪽 손으로 계속 매만지고 있자, 산차가 한 소리를 보탰다.

16600819921845.jpg“벌레에 물린 자리를 계속 만지면 덧나기나 하지 덜 간지러워지진 않는다고요!”

산차는 길거리에서 주워온 새끼 고양이 같았던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혓바닥이 매웠다.

16600819921833.jpg“이거 좀 커진 것 같지 않니?”

16600819921845.jpg“손가락이 어떻게 하루 만에 커집니까?”

아리아드네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사실관계에 엄격하고, 돌직구를 즐기기도 했다. 둘은 3층의 다락방에서 함께 노닥이고 있었다. 하녀 말레타는 산차를 그렇게 팔아넘긴 다음에 알아서 이사벨라 쪽으로 넘어가 돌아오지 않았고, 아리아드네는 굳이 말레타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말레타를 추적 관찰해 온 산차와의 집단 지성을 모은 토론의 결과에 따르면 말레타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짧았다.

16600819921845.jpg“그거 아가씨를 묻어버리려고 진지하게 궁리한 결과가 아니에요. 그냥 당장 ‘미스 로시’가 무서우니까 면피할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말하고 싶었던 거였고 저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니까 저한테 뒤집어씌운 걸걸요?”

16600819921833.jpg“그럼 그 난리 통 이후에는 왜 안 돌아오는 거야?”

16600819921845.jpg“눈치는 빠르니까요. 멍청하면 원래 동물적인 감각이 있어요. 안 그러면 애저녁에 죽었지 아직까지 살아 있겠어요?”

그리고 몹시 독설가였다.

16600819921833.jpg"아니, 자매인데 어쩜 그렇게 달라?

16600819921845.jpg"걘 아빠 닮았어요."

주정뱅이에 노름꾼이었던 죽은 아버지를 생각한 산차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16600819921845.jpg“질렀을 때는 그냥 저를 치워버리고 아가씨 밑의 유일한 하녀로 앞으로 잿밥처럼 내려오는 슈미즈는 자기 혼자 독점하면서 희희낙락 살려고 했는데, 끝나고 나서 눈치를 보니 뭔가 이상하니 안 돌아오고 저기서 버티는 거예요. 돈도 걸 수 있어요.”

16600819921833.jpg“너 월급이 몇 푼이나 된다고.”

16600819921845.jpg“말이 그렇다고요. 히히.”

말레타와 함께 쓰던 방은 자연스레 산차가 혼자 쓰게 되었다. 일전에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를 두고 준엄하게 꾸짖었었다.

16600819931427.jpg- “난 후환은 좋아하지 않아. 아빠께서 가르쳐주셨지. 모든 가능성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게 안전하다고. 안 그러니 사랑하는 내 동생아?"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는 끼고 앉아서 그런 삶의 지혜들을 가르쳐 주었던 모양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전혀 그런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부모의 가르침은 없었으되 운명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고, 아리아드네는 시간이 준 경험으로 자신을 스스로 가르쳤다. 운명이 그녀를 인도하고 있었다. 배울 시간은 많았다. 이번에야말로 후환은 깨끗하게 치워버리기로 했다. 전생에서부터 싹수가 노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레타를 포섭하려고 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아리아드네는 기왕 찝찝한 사이가 된 것, 기회가 닿으면 말레타를 영원히 제거해 버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복수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 아리아드네는 말레타를 일단은 풀어두기로 했다. 그녀의 최후가 되기에 알맞은 재앙이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었다. 산차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감시할 인원이 없어지자 둘은 아리아드네가 다른 두 명의 자매들과 함께 가정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를 제외하면 껌딱지처럼 착 붙어서 시간을 보냈다. 루크레치아는 한 번 시원하게 발작을 하더니 응어리가 다 풀렸는지 아리아드네와 산차에 대한 추가적인 징벌은 내리지 않았다.

16600819921833.jpg““미스 로시” 말이야. 본인은 뒤끝 없는 성격이라고 생각할까?”

마르그리트 왕비 덕에, 루크레치아의 별명은 ‘미스 로시’가 되어 있었다.

16600819921845.jpg“그러지 않겠어요? ‘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앞에서 해, 옹졸한 거 없어, 시원시원한 성격이지.’ 이러는 사람들.”

산차는 토악질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16600819921845.jpg“꼭 본인 같은 사람들끼리만 모아서 어디 탑 같은 데에 가둬뒀음 좋겠어요. 일주일째에 서로 맨손으로 찢어 죽이려고 들걸.”

  - 똑똑. 안주인 뒷담화를 신나게 하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둘은 사람에게 들킨 야생 다람쥐처럼 조용해졌다.

16600819921845.jpg“아리아드네 아가씨. 가정교사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노크를 한 사람은 이사벨라의 하녀들 중 하나였다. 이사벨라와 아라벨라와 함께 라틴어와 갈리코 어를 배울 시간이었다.

16600819921833.jpg“산차, 나 다녀올게!”

아리아드네는 산차를 뒤로 하고 이사벨라의 하녀를 따라 2층의 소녀들의 응접실로 내려갔다. 아리아드네의 방은 3층 구석에 있었으므로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가족들이 거주하는 2층에 내려올 일이 잘 없었다. 회랑을 따라 걷는 와중에 데 마레 추기경의 응접실에서 루크레치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6600819918072.jpg“저 아이, 꼭 여기에 데리고 있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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