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각성2021.01.27.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루크레치아의 새된 목소리에 아리아드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난 못 하겠어. 너무 힘들어.”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걸음을 완전히 멈춰 섰다. 안절부절못하는 하녀에게 아리아드네는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프구나. 뒷간에 들렀다 가야 할 것 같으니 너는 가정교사 선생님께 가서 둘째 아가씨는 좀 늦으실 거라고 일러라.”
“하오나 아가씨……!”
“너한테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거다. 그냥 가서 그렇게 이르기만 하면 돼.”
아리아드네는 차고 있던 못난이 진주 귀걸이 한쪽을 끌러서 하녀의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귀걸이였지만 선심을 쓸 때는 써야 했다.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는 네 주인한테도 입조심 하고. 얼른 가.”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녀는 진주 귀걸이를 받자 욕심이 났는지 이내 수긍을 하고 아리아드네가 시킨 대로 그대로 자리를 떴다. 아리아드네는 회랑의 기둥 뒤에 몸을 딱 붙이고 추기경의 응접실에서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당신 또 왜 그래. 애초에 아리아드네를 데려오자는 것도 당신 생각이었잖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계집애가 어찌나 되바라지고 고집이 센지 그 수발을 들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어이없어하면서도 루크레치아를 달래는 데 마레 추기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체자레 백한테는 또 뭐라고 할 거야. 대미사에서 만날 때마다 은근슬쩍 운을 띄우고 있단 말이야.”
“애초에 이사벨라를 달라고 한 놈인데 고작 아리아드네 같은 애를 들이민다고 해서 순순히 떨어져 나가겠어요? 당신이 알아서 좋은 방법을 생각 좀 해 봐요! 그런 거 잘 하잖아! 난 쟤랑 못 살겠어요.”
“당신이 쟤랑 못 살겠으면 그냥 체자레 백한테 시집을 빨리 보내버리는 방법도 있소.”
- ‘……!’
여기까지 엿들었을 때, 갑자기 복도의 먼 쪽 끝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서 응접실 문에서 후다닥 떨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있던 체를 해 보였다. 인기척의 주인은 청소를 하러 지나가는 하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아리아드네에게 목례를 하고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면서 지나갔다.
‘휴.’
십 년 감수했다. 체자레에게 미리 시집을 보내버린다니, 등골이 오싹했다. 아리아드네는 그냥 몸을 낮추고 숨어 있는 것이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흘러가는 흐름에 몸을 맡긴다면 결론은 전생과 똑같이 날 것이었다. 그녀의 언니를 목숨과도 같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대체품으로 떠맡겨져 마치 낡은 가구처럼 그 옆자리를 지키고 그의 편익에 봉사하다가 때가 오면 비참하게 버려지는 삶.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였다. * * *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 부인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루크레치아에게 이사벨라는 자기의 분신, 더 완벽한 버전의 본인, 반드시 잘 되어야 할 금쪽같은 내 공주였지만 데 마레 추기경에게 이사벨라는 그가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은 ‘소유물’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분명히 어느 정도까지는 이사벨라를 사랑했다. 이사벨라의 행복을 바라고 이사벨라의 웃음과 평온한 일상을 위해서 약간의 희생을 할 의향도 있을 것이었다.
‘거기까지지.’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이 어디까지 냉정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의 그의 행적을 상기하고 엄습해오는 냉기에 몸을 한 번 떨었다. 팔뚝에 난 솜털들이 모두 빳빳이 서 있었다. 혈통 좋은 말은 경주에서 우승하기 위해 키우는 것이고 사냥개는 사냥감을 잡아 오기 위해서라면 다칠 수도 있는 것처럼, 그에게 딸의 본질이란 영원무궁토록 지속될 ‘데 마레 가문’에 봉사하기 위해 팔려갈 상품이었다. 잘 팔리도록 가르치고, 가꾸고, 예뻐하고 나면 아름답고 명성 높은 딸과의 교환으로 가문에 작위, 토지, 금화, 영광이 있을 것이었다. 딸이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부차적인 지점에 불과했다. 데 마레 추기경이 이사벨라를 체자레 데 코모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유일한 이유는 체자레 따위에게 넘겨 주기에는 이사벨라의 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 “아이고, 우리 예쁜 딸! 역시 우리 집안 핏줄이다. 우리 집안 핏줄이라 우월한 거고, 잘났으니까 내 딸인 거다.”
데 마레 추기경은 항상 이사벨라의 아름다운 외모와, 영리한 머리와, 사교계에서의 인기를 칭찬했다. 전생의 기억까지 탈탈 털어 보아도 그런 결과에 닿기까지의 이사벨라의 노력이라던가 이사벨라의 성품에 대해서 칭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가 잘났기 때문에 이사벨라를 예뻐했다. 장녀 이사벨라는 데 마레 추기경의 재산 목록 1순위였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추기경의 직위가 그 중요도에서 이사벨라보다 앞에 있을 것이 틀림없으니 재산 목록 2순위였다. 이사벨라의 뒤로는 국왕배 경주에서 우승한 애마와, 추기경의 보주에 박힌 메추리 알만 한 에메랄드가 나열될 것이고 거기서 쭉 더 내려가다 보면 아리아드네가 나올 것이다. 그는 가장 좋은 소유물에 걸맞은 대가를 유일한 왕위계승권자인 알폰소 왕자와의 혼인을 통해 받고 싶어 했다. 그뿐이었다.
‘이사벨라의 가치가 나보다 높아서 아버지가 그녀를 귀애하며 왕자비로 만들고자 하는 거라면……. 그저 내 가치가 이사벨라보다 더 높아지기만 하면 된다.’
명성을 떨치고, 외모를 가꾸고, 산 카를로에서 가장 뛰어난 규수가 된다면 알폰소 왕자에게 진상될 데 마레 가문의 처녀는 이사벨라가 아니라 아리아드네가 될 것이었다.
‘산 카를로에서 가장 뛰어날 필요도 없다. 이사벨라보다만 높으면 된다. 내가 올라가지 못한다면 이사벨라의 가치를 훼손해 버리면 충분하다.’
- “덩치 큰 여자는 싫대. 널 안으면서 항상 날 안는 상상을 했대. 네 가슴은 젖소처럼 쳐졌다더라. 왕비는 나야.”
이사벨라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아리아드네는 무심코 아직은 편편한 자신의 가슴팍을 만졌다. 이사벨라를 해하는 데에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1등인 딸은 알폰소 왕자에게, 2등인 딸은 체자레 데 코모에게. 어차피 제3의 길은 없었다. 갑자기 무역 천재가 되어서 포르토 공화국의 갤리선을 타고 동방 향신료를 수입하러 떠나거나, 장자이자 루크레치아의 아들인 이폴리토를 제치고 대신 작위를 물려받을 수도 없었다. 설령 크게 양보해서 루크레치아도 결국엔 첩에 불과하니 적서의 구별을 하지 않기로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장자선순위에 있을 이폴리토와 이사벨라는 독살해 버린다고 쳐도 이 집안 자체에 물려받을 작위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세습되는 귀족 작위가 없었고 그들은 그저 고위 성직자인 아버지를 둔 일가족일 뿐이었다. 결국에 그녀에게 남은 옵션은 아비가 일시적으로 누리는 권력에 편승하여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그의 부와 지위를 함께 누리는 것뿐이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알폰소와 체자레 둘밖에 없다면, 그리고 승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체자레를 피할 기회라면, 그렇다면 이것은 반드시 이겨야 하는 레이스였다. 아리아드네는 2층의 회랑을 성큼성큼 걸어가 소녀들의 응접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뒤늦은 입장에 한창 갈리코 어 교습에 열중하던 가정교사 로마니 부인과 이사벨라와 아라벨라가 일제히 문간을 쳐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완벽한 궁중식 예법으로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Good afternoon, Madam Romani.”
[“좋은 오후입니다, 로마니 부인.”]
에트루스칸 어 화자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갈리코 왕국 악센트였다. “Sorry to interrupt, shall we continue?”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계속 진행하시지요.”]
아라벨라가 입을 떡 벌리고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너 갈리코 어 왜 이렇게 잘해?”
아리아드네는 조그만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어깨너머로 좀 익혔어.”
언제나 온화한 로마니 부인이 놀라 아리아드네에게 말을 걸었다.
“억양이 완벽해요. 어디에서 배웠나요?”
“어려서 같이 자란 사람 중에 갈리코 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말만 할 줄 알고 문법이나 올바른 표현은 몰랐는데 선생님과 공부를 하고 나니 빠르게 잡히는 것 같습니다. 다 선생님 덕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누구냐고 추궁이 들어오면 댈 알리바이를 가늠해 보면서, 공을 살짝 로마니 부인에게 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마니 부인은 학생의 빠른 성취와 본인의 교수력에 감탄을 했고, 아라벨라는 루크레치아의 대폭발에서 자기를 감싸 줬던 것까지 더해서 아리아드네를 새삼 다시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다.
‘주인공은 나인데, 저게 왜 설치지?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가는 건 용납할 수 없어!’
* * * 이사벨라는 다시 로마니 부인의 가장 총애하는 학생이 되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학업에 매진했지만, 기초가 부실한 나머지 갈리코 어는 물론이고 라틴어, 역사, 신학, 궁정 예법 등등 공부와 관련된 그 어떤 과목에서도 아리아드네를 이기지 못했다.
“완벽해요!”
궁정 예법 담당인 델루카 부인은 혀를 내둘렀다. 궁정 예법은 외울 것이 양피지 책으로 삼백 페이지가 넘었고, 암기 사항을 모두 외우고 나서도 목례의 적당한 깊이, 시선을 옮기는 알맞은 속도, 느긋하게 아름다운 몸가짐 등등 몸이 외워야 할 것들이 많아서 사교계에 실제로 나가 보아야 급격하게 느는 과목이었다. 집에서 백날 외워봤자 다음 주에는 또 버벅대기 마련이었다.
“아직 데뷔탕트조차도 치르지 않았지요?”
“사교계는 왕비 폐하의 미사에 한 번 초대받은 것을 제외하면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델루카 부인은 영민한 제자의 습득력에 다시금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건…… 재능이에요!”
‘죄송합니다. 경험입니다.’
* * * 그렇다고 딱히 이사벨라가 예체능에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도 예체능에는 별 재능이 없어서 둘은 엎치락뒤치락했지만, 막상 이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어린 아라벨라였다.
“류트 연주가 환상적이에요! 강약도 잘 잡고 박자도 완벽해요!”
음악 선생인 만치니 양이 아라벨라를 극찬했다. 의기양양한 어린 아라벨라를 노려보는 이사벨라에게도 상냥한 만치니 양은 마른걸레 쥐어짜듯이 애써 찾아낸 칭찬을 건넸다.
“이사벨라는 만돌라를 참 소중하게 다루는 것 같아요.”
‘아아악!’
내면의 비명을 누르지 못한 이사벨라가 ‘소중한’ 만돌라를 내던지고 쿵쿵대며 방문을 쾅! 닫고 나간 것은 덤이었다. 그런 이사벨라에게도 본인의 재능을 한껏 뽐낼 기회가 있었으니, 그것은 각종 사교계 이벤트와 한 달에 한 번씩 참석하게 되는 대미사였다. 수도 산 카를로에서 가장 큰 성황당인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서 올리게 되는 대미사 제전은 데 마레 추기경이 집전하는 것이 관례였고,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이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모여서 설교를 들었다. 귀족만이 대성황당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평민은 바깥의 광장에 운집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귀족을 상대로 한 설교가 끝나면 데 마레 추기경이 그들을 상대로 간단한 말씀 한두 마디를 해주고는 흩어지고는 했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내부는 호화와 사치와 아름다움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이사벨라는 거기에서 단연코 가장 눈에 띄는 보석이었다.
“얘들아! 준비해라! 7시까지는 마차를 타고 집에서 나서야 해! 우리는 절대로 늦으면 안 돼!”
아리아드네가 알고 있는 그 사건은 바로 오늘 일어날 것이었다. 트레베로 공의회 주간은 저번 주였다.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은 이미 났을 것이었고 오늘의 대미사가 산 카를로에서 트레베로 공의회의 뚜껑을 여는 날이 될 것이다. 이사벨라가 독점하는 대미사에서의 주목과 아버지의 총애를 빼앗아 올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