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아세레토에서 온 사도 (1)2021.02.07.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짙은 색 드레스를 얌전하게 차려입은 아리아드네는 앳된 외모나 수수한 차림새와 어울리지 않는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대성황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모았다.
“마누엘 복음서는 제19장 17절에서 예사크의 곤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 성신과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고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산드로 복음서는 제7장 21절에서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의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고 명명백백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대체 누구시기에 예사크의 곤을 당대에 모신 여섯 사도 중 둘인 성 마누엘과 성 산드로보다 더 진실을 잘 안다고 스스로 칭하는 것입니까!”
대성황당 안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웅성대는 군중들의 소요로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세레토의 사도는 감정적 동요 없이 온화하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저는 시골 섬마을 구석에서 성신의 말씀을 구도하는 촌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신께서는 계속 아버지였던 것이 아니고, 그가 혼자 계시며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성신께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분의 아드님을 무에서 만들었습니다. 논리 필연적으로,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위대하신 성신께서는 구경인 탈출기 제3장 14절에서 ‘나는 창조하는 주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동시에 ‘나는 유일한 신이다’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사크의 곤께서는 성신의 아드님이시자 위대한 선지자이시지만 성신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신성은 유일하신데 어찌 그 아드님이신 분께서 그와 동일한 위치에 올라가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모시는 것은 유일하고 전능하신 성신님 아닙니까?”
부드럽지만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다. 아세레토의 사도를 향한 아리아드네의 공세는 매서웠다. 논리 정합성에서 전혀 흔들림이 없었고, 공격하며 근거로 대는 성황서의 구절은 미리 외워둔 것처럼 정확했고 적재적소를 찔렀다.
“파올로 복음서는 제3장 16절에서 예사크의 곤을 일러 ‘아버지 성신의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하여 예사크의 곤께서 성신의 위격(persona)이시자 그분의 아들임을 밝혔습니다! 당신이 여섯 사도 중 한 사람인 성 파올로보다 위에 있습니까? 아세레토의 사도께서는 신경을 부정하시는 것입니까?”
- ‘신경을 부정하는 건 있을 수 없지.’
- ‘예사크의 곤께서 성자(聖子)이심을 부정하는 걸까요?’
- ‘바다 건너 무어인들이 하는 주장과 비슷하지 않소.’
- ‘이단……인가요.’
- ‘내버려 둬도 됩니까?’
관중석의 소요가 더욱 심해졌다. 평민들은 바깥 광장에 모여 있을 따름이고 대성황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대성황당 안에 평민과 귀족이 섞여 있기라도 했으면 진작에 누군가가 제단에 오물을 던지고 예배석에서는 신도들끼리 주먹다짐이 났을 분위기였다. 오른쪽 꼭대기의 발코니석으로 레오 3세의 비서관이 황급히 뛰어 올라가 커튼을 열어젖히고 문안을 올렸다.
“헉, 헉, 국왕 폐하. 아래층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람들을 내려보내서 끌어내게 할까요?”
레오 3세는 말이 느리고 뼈대가 큰, 60이 다 되어가는 노인이었다. 두껍고 숱이 많은 흰 눈썹 아래로 형형한 푸른 눈이 번득였다.
“둘 중 누구를 끌어낸단 말이냐?”
“예? 그야 당연히 저 난입한 소녀지요.”
레오 3세는 빙긋이 웃었다.
“아세레토의 사도를 끌어냈으면 끌어냈지 저 굴러들어온 떡을 왜 끌어내느냐? 뉘 집 영애인지 기특하기가 짝이 없구나.”
발코니석에서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알폰소 왕자가 대답했다.
“아리아드네예요.”
“뭐?”
함께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가 아들 대신 대답했다. 남편과 거의 말을 섞지 않는 그녀는 아들을 대변할 일이 있을 때만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입니다.”
알폰소 왕자가 거기에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제 친구예요.”
국왕은 티 한 점 없는 아들을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친구를 두었구나.”
즐거워하는 국왕을 보고 비서관은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국왕 폐하, 아래층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뭔가 하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 * *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레오 3세의 비서관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저기가 어디라고 쟤가 저기를 나가 있어!”
데 마레 추기경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아세레토의 사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루도비코 법황이 트레베로 공의회를 열어 아세레토의 사도를 굴복시키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아세레토의 사도의 추종자들의 세도 만만치 않았다. 루도비코 법황이 데 마레 추기경을 트레베로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은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추기경에게 몹시 굴욕적인 일이어야 했으나, 데 마레 추기경은 내심 이를 반겼다. 트레베로 공의회에서 어느 파가 이길지 가늠을 할 수가 없어서 어느 한 편을 들기가 몹시 부담스러웠는데, 법황의 조치 덕에 명분을 가지고 중립을 지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지키고 있던 중용이었는데 신학을 배운지 두 달밖에 안 된 그의 열다섯 살짜리 사생아, 그것도 계집아이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아세레토의 사도와 논박을 하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던 데 마레 추기경이 평사제들을 불러서 아리아드네를 끌어내고 아세레토의 사도에게 소란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할 마음을 굳힌 찰나였다. - 덜컹! 배랑의 주 출입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거대한 나무문을 열어젖힌 자들은 작은 삼각형의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특이한 흰 모자와, 평사제복 위의 어깨에 걸친 휘장에 있는 검은 십자가 문양을 본 누군가가 외쳤다.
“이단 심판관이다!”
성황청 직속의 이단 심판관들이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의 정문을 박차고 들어오고 있었다. 오십여 명 언저리의 건장한 사제들이 성황청의 정복을 입고 열과 오를 맞춰 들이닥쳤다. 데 마레 추기경은 본인 휘하에 있는 성직자가 아닌 다른 교구 소속의 성직자들이 떼를 지어 자신의 영역인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들어오자 크게 당황하여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데 마레 추기경, 우리는 트레베로에서 루도비코 법황 성하의 명을 받고 이단자를 처단하기 위해 왔소!”
맨 앞에 선 이단 심문관은 거만한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배에 힘을 주어 일갈했다.
“죄인 평사제 알레한드로는 어디 있느냐!”
아세레토의 사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아리아드네와 설전을 나누면서도 여전히 설교를 내리는 자리인 중앙 제단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아세레토의 사도의 표정에 드디어 균열이 나타났다.
“잡아라!”
- 와!
우두머리 이단 심판관의 명에 그의 휘하에 있는 사제들이 우르르 달려나가 중앙 제단 위에 있던 아세레토의 사도를 강제로 무릎을 꿇리고, 두 손을 뒤로 잡아채어 결박했다. 이단 심판관이 중앙 제단 꼭대기로 올라갔고, 반대로 아세레토의 사도는 중앙 제단 아래로 끌려 내려가 둘의 위치는 뒤바뀌고 말았다. 우두머리 이단 심판관은 손에 쥐고 온 두루마리 칙서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죄인은 들어라! 대륙력 1122년도에 개최된 트레베로 공의회는 공정한 토론을 거쳐 가장 사려 깊은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였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아세레토의 사도가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를 내리누른 건장한 사제들이 이를 악물고 반항을 제압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임을 부정한 아세레토 학파는 올바른 성황서의 해석을 그르친 이단임을 선언한다! 그 괴수인 죄인 평사제 알레한드로는 대중을 호도하고 기만한 죄를 물어 그 사제직을 박탈하고 이 자리에서 파문에 처한다!”
- ‘파문……!’
- ‘세상에나……!’
파문은 사회적 사형선고였다. 이제 성신의 신도는 누구라도 아세레토의 사도, 아니 파문자 알레한드로와 교우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에게 밥을 파는 상인도, 숙박을 제공하는 여관주인도 모두 천신님 보시기에 죄인이 될 것이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연인이 되어 심산유곡을 떠도는 삶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이단 심문관의 서슬이 거셌다.
“아세레토 학파를 추종하던 자 중 자신의 의견을 바꾸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수괴와 함께 파문될 것이며, 파문자 알레한드로를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돕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파문에 준하는 죄를 물을 것이다! 이상! 루도비코 법황!”
양피지 끝에 붉은 잉크로 서명한 루도비코 법황의 친필을 의미심장하게 둘둘 말며, 이단 심판관은 데 마레 추기경을 돌아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 당신도 파문자 알레한드로가 당신의 대성황당에서 당당하게 설교를 하고 있던 상황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오.”
데 마레 추기경의 진초록색 두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당했구나!’
애초에 아세레토의 사도가 산 카를로로 오게 된 것은 루도비코 법황 때문이었다. 성황청 측은 심지어 사도가 산 카를로에 방문할 날짜까지 친절하게 지정해 주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를 그저 본인을 트레베로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여 거부하지 않고 수락한 것이었는데, 루도비코 법황은 아세레토의 사도의 파문과 추기경을 그 사건의 종범으로 엮는 부분까지 모두 계산하고 수를 둔 것이 틀림없었다.
“심판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소. 아세레토의 사도는 내가 부른 것이 아니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이단 심판관에게 비굴한 어조로 변명을 늘어놓으며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무엇이 통할까? 뇌물? 읍소? 법황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직속 수하일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무것도 통하지 않을 거고. 나까지도 파문을 당하는 것 아닐까? 추기경의 머릿속이 노래지는 와중에 그의 왼손에 조그만 온기가 들어와 침착하게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아리아드네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는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이단 심판관을 제지했다.
“심판관 님. 잠시 제 말씀을 들어 주시지요.”
이단 심판관은 코웃음을 쳤다.
“아니, 여기 이 영애는 뉘 집 자식이길래 감히 주신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위를 가진 어르신들의 대화 중에 주제를 모르고 끼어드는 것이요?”
대회랑의 모든 눈이 그들을 주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