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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도둑의 최후 (410/733)

<제28화> 도둑의 최후2021.03.10.

1660082064323.jpg“데 마레 가문 아가씨들은 재주도 많지요! 차녀께선 신학에 성취가 뛰어나시더니 장녀께선 작곡을 하시는군요!”

이사벨라가 제출한 악보를 받은 대성황당의 찬송 담당 수녀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리아드네와 병렬적으로 배치된 것이 불쾌했던 이사벨라는 억지웃음을 흐흥 지어 보였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세레토의 사도 사건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거기와 동급으로 여겨질 수 있으면 이건 남는 장사 아닌가?

1660082064323.jpg“스코어 악보네요. 저희가 나눠서 연습하고 있다가, 다 같이 모여서 연습하는 날에 작곡가님 한 번 모실게요. 상상하신 게 잘 구현되고 있나 와서 한 번 보아 주세요.”

담당 수녀에게 5월의 작약처럼 흐드러지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낸 이사벨라는 그날 친구들을 모아 제대로 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 별것도 아닌 배다른 여동생이 저잣거리의 칭송을 지나치게 받고 있었다. 누가 산 카를로의 진정한 또래들의 여왕인지 보여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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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사벨라는 작년에 데뷔탕트를 치른 어엿한 숙녀였으므로, 자기 이름으로 본인의 다른 데뷔탕트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었다. 데뷔탕트의 또 다른 특전은 교회, 왕궁, 친구의 집 등 점잖은 장소라면 어머니의 동행 없이도 당일치기 방문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사벨라가 작곡한 미사 브레비스의 첫 합주가 이루어지는 대성황당은 데뷔탕트 친구들을 초대하기에 제격인 장소였다. 합주를 감상하고, 친구들과 함께 멀지 않은 추기경 관저로 이동해서 오후의 차를 마시고, 여느 때와 같이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을 받고 약간의 칭찬을 돌려준 뒤에 충만한 기분을 느끼며 해산하면 되는, 그런 하루였다. 물론 이사벨라라면 껌벅 죽는 루크레치아는 큰딸의 작곡이 처음으로 합주 되는 역사적인 날에 엄마가 빠질 수 없다며, 반드시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이사벨라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서 간섭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루크레치아는 결국 이사벨라의 사교 모임에 따라오게 되었다. 자기의 곡이 합주 되는 모습을 꼭 눈으로 보고 싶었던 아라벨라도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 함께 가게 되었다. 대성황당에는 이사벨라의 친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발데사르 후작 영애 줄리아가 그중 가장 저명한 집안의 딸이었고, 세 살 위인 카스틸리오네 남작가의 카멜리아는 여러 가지 롤을 수행하기 위해 발탁된 ‘친구’였다. 그녀는 이사벨라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였고 카스틸리오네 남작은 양잠 사업으로 봉토에서 나오는 돈 외에도 수입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정혼자가 있었다. 신분이 낮은 카멜리아는 이사벨라가 자기의 ‘친구’들인 아름다운 영애들을 꽃다발 모아놓듯 전시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약혼자인 콘타리니 백작 영식 오타비오와 그의 친구들을 함께 데려올 때만 이사벨라의 환영을 받았다. 오늘도 오타비오와 그의 친구들이 카멜리아를 통해 초대를 받은 참이었다. 그중에는 알폰소 왕자를 제외하고는 산 카를로 아가씨들의 최대 주목을 받는 사교계 대어인 체자레 데 코모 백작도 끼어 있었다. 초대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대성황당의 맨 앞줄에 꽃장식을 하고 다과 테이블을 세팅해 놓고 느긋하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사벨라는 제일 먼저 도착한 카멜리아를 보고 반색을 했다.

16600820643245.jpg“카멜리아! 일찍 도착했네요.”

1660082064323.jpg“아니에요, 데 마레 영애.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16600820643245.jpg“아이, 편안하게 부르시라니까요. 제 첫 작곡이니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은 우리 카멜리아를 부르지 않으면 제가 또 누구를 부르겠어요.”

살갑게 카멜리아를 맞이한 이사벨라는 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눈과 눈을 맞추고 상대한테 집중할 때의 이사벨라는 같은 여자라도 반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 와중에 발데사르 후작 영애 줄리아도 도착했고, 카멜리아의 약혼자인 오타비오와 그의 친구들도 속속 도착했다. 대성황당의 맨 앞줄 초대석은 나름 북적이기 시작했다.

16600820643245.jpg“오타비오, 언제나 그렇듯이 너무 재밌으세요.”

이사벨라가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카멜리아의 약혼자를 치하했다. 카멜리아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지만 그녀는 감히 이사벨라에게 항의를 하지는 못했다. 친하지도 않은 남의 약혼자에게 ‘콘타리니 영식’이나 존칭을 붙인 ‘시뇨르 오타비오’가 아닌 맨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분명히 선을 넘은 짓이었지만 그것은 이사벨라가 제일 잘하는 짓이었고, 남자들이 몰랐다고 하면서도 내심 아주 좋아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16600820643245.jpg“그런데, 체자레 백작은 늦으시네요?”

이사벨라는 안달을 내는 티를 최대한 가리며 오타비오에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은근슬쩍 던져 보았다.

1660082064323.jpg“체자레 백작이 제시간에 나타나는 꼴을 어디 보셨습니까. 지금도 느지막이 일어나서 몸단장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안 나타날 친구는 아니니까 일단 우리끼리 진행하시죠.”

이사벨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강단 뒤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연주자들이 손을 풀며 준비를 시작했다. 지휘자가 손을 들자 일제히 현을 켜며 곡이 시작했다. - 빰밤밤-. - 디리링. - 단다라란-. 여러 가지 음향이 얽혀들며 하나의 음률을 만들어냈다.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음률은 강렬해지기도 했고, 속삭이는 듯이 부드러워지기도 했다. 이사벨라는 희열을 느꼈다. 내가 쓴 곡을 따라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명령을 듣는다니! 취미로는 지휘자나 되어 볼까? 정말로 본인이 쓴 곡은 아니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합리화가 끝나 있었다. 한참 아름답게 진행하던 도중, 거의 끝나갈 때가 다 되어서 갑자기 다른 악기들이 모두 침묵을 하고 파이프 오르간 솔로가 시작됐다. 갑자기 뚝 끊긴지라 음악적 아름다움을 논하기에도 민망한 진행이었다. 대략 열여섯 마디 정도를 파이프 오르간이 솔로로 진행을 하더니 갑자기 또 맥락 없이 나머지 현악기들이 모두 합류를 했다. 음악을 잘 몰라서 후반쯤 가게 되니 지루해서 하품을 하려고 했던 이사벨라마저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고개를 반짝 들게 했던 사건이었다. 아라벨라는 구석의 어두운 곳에서 턱을 괴인 채로 착잡하게 자기 곡이 첫 번째로 현실 세계에서 진짜로 연주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귀는 신이 났지만 감정적으로는 신이 나지 않았다. 저 앞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본인이었다. 파이프 오르간을 대가로 받았으니 남는 거래였다, 라고 생각하고 치워야 하는데 기분은 여전히 눅진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파이프 오르간의 독주가 시작됐다. 아라벨라는 오른손 엄지를 입에 물고 말았다.

16600820643272.jpg‘헉!’

악보가 잘못 전달된 것이 틀림없었다. 아라벨라가 쓴 미사 브레비스의 원곡에는 파이프 오르간 솔로 파트는 없었다.

16600820643272.jpg‘편곡 전의 진짜 원곡인 류트 솔로곡의 악보가 미사 브레비스 편곡 버전의 스코어 악보에 잘못 끼어들어 간 거야!’

아라벨라가 손톱을 씹는 사이에 강단 위의 지휘자가 이사벨라에게 질문을 하는 모양이 보였다.

1660082064323.jpg“데 마레 영애, 합주가 끝났습니다. 잘 들으셨나요? 저희가 연주를 하다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요, 중간의 파이프 오르간 솔로는 왜 들어간 건가요?”

이사벨라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게 둘러댔다.

16600820643245.jpg“그 부분의 멜로디를 강조하고 싶어서요.”

1660082064323.jpg“아⋯⋯. 대담한 음악적 도전이네요.”

되려 당황한 것은 지휘자였다. 음악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의 귀에는 아무리 들어도 이것은 작업 과정의 오류였기 때문이다. 숙련된 하프 주자인 발데사르 후작 영애 줄리아도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 옆자리에 앉은 영식에게 귓속말을 했다. 당연히 이사벨라가 빈 부분을 채워줄 거로 생각했던 지휘자는 더듬거리면서 이사벨라에게 부탁했다.

1660082064323.jpg“악보가⋯⋯. 지금 이 상태대로라면 파이프 오르간 독주가 시작하는 부분이 많이 어색합니다. ‘도’ 음계에서 갑자기 ‘라’ 음계로 튀어요. 보통의 연주자라면 이 부분이 한 손으로 커버가 잘 안 되어요. 의도하신 거라도 실제 연주 상황에서 적용이 어려워서요⋯⋯. 한 번 같이 쳐 봐 주시면서 혹시 수정 여지가 있을지 한 번 봐 주시겠어요?”

이사벨라는 이제야 비로소 당황했다.

16600820643245.jpg“저더러 치라고요?”

그녀는 악보를 제대로 읽을 줄 몰랐다. 이사벨라는 한 곡을 가지고 여러 날을 연습해야 간신히 따라칠 수 있는 오르간 초보자였다. 아라벨라의 미사 브레비스는 악보만 가져다가 내면 된다고 생각해서 열어보지조차 않았다. 악보를 한 번 훑어만 보았어도 종이 한 장이 다른 걸 알아채서 지금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하물며 연습을 했을 리도 없었고, 이사벨라는 지금 누가 때려죽인다고 위협을 하더라도 이 곡을 칠 수가 없었다.

16600820643245.jpg“전문 연주자가 그 스케일도 못 쳐요? 전문 연주자 맞아요?”

이사벨라는 되레 화를 내면서 당황한 눈으로 대성황당 구석에 앉아 있던 아라벨라를 찾았다. 대안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질책이었다. 하지만 이사벨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걸 조금 다른 종류의 허락이라고 생각한 아라벨라가 총알같이 튀어 나왔다.

16600820643272.jpg“아니에요!! 여기 흑연 없어요?”

사제 하나가 흑연과 오선지를 가져다주자 아라벨라는 거침없이 악보를 채워 나갔다.

16600820643272.jpg“스코어 악보에서 현악기 파트가 누락이 된 거예요. 일부러 비워둔 게 아니에요.”

일필휘지로 오선지 다섯 장을 신들린 것처럼 채워 나간 아라벨라는 파이프 오르간 독주의 도입부 부분도 야무지게 고쳐냈다.

16600820643272.jpg“음계가 튄 건 의도한 게 아니었어요. 그 스케일을 사람 손으로 어떻게 쳐요. 여기 한 토막이 빠져서 그래요.”

완성된 오선지 다섯 장을 지휘자에게 내밀며 수정된 악보가 들어갈 자리까지 지정한 아라벨라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초대손님들은 가열하게 수군대고 있었다.

1660082064323.jpg- ‘뭐야, 작곡가가 본인이 아니었어?’

1660082064323.jpg- ‘어쩐지, 이사벨라 데 마레가 음악을 잘한단 얘기는 처음 들어 봤는데 축성 미사에 연주도 아니고 작곡을 헌정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1660082064323.jpg- ‘다른 사람 것도 아니고 친동생 것을 훔치다니, 진짜 양심 없다.’

이사벨라의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쑥덕대는 와중에, 이사벨라의 험담을 하는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의 얼굴에서는 빛이 나는 듯했다.

16600820654398.jpg“그만!”

구석에서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루크레치아가 나섰다.

16600820654398.jpg“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 강단 중앙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루크레치아는 큰 키에 고급스러운 의복 덕인지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녀는 영식과 영애들을 둘러보며 당부했다.

16600820654398.jpg“이 악곡은 큰 애와 작은 애가 함께 작곡한 거예요. 악상은 주로 큰 애가 제공했고 작은 애는 디테일들을 잡았어요.”

루크레치아는 신나게 떠들던 몇몇을 주로 쳐다보며 말을 골랐다.

16600820654398.jpg“분명히 이사벨라의 기여도 있으니까. 아니, 주로 이사벨라가 만든 건 맞으니까. 어디서 잘못된 이야기들이 돌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루크레치아의 단호한 말에, 대성황당의 배랑 쪽에 기대어 있던 한 사람이 다가와서 웃었다.

16600820654414.jpg“그게 그렇게 됩니까? 아름다운 루크레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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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색 사슴 가죽 장화를 신고, 같은 색깔 장갑을 끼고, 물총새의 깃털로 장식한 모자로 멋을 제대로 부린 체자레 데 코모 백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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