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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신분 격차 (431/733)

<제49화> 신분 격차2021.05.23.

딸의 결백 주장에 가장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은 역시 루크레치아였다. 이사벨라는 어머니가 자기 역성을 들어주는 상황과 가족 중 그 누구도 문제의 장면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최대한 이용했다.

16600822265238.jpg“말리지 않은 건 잘못했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내가 한 게 아니라고요!”

루크레치아는 울고 있는 큰딸이 안쓰러워 열성적으로 이사벨라의 편을 들었다.

16600822265243.jpg“예하께서는 어디서 들은 얘기이길래 그런 얘기를 친딸의 말보다 더 신뢰하십니까! 애가 우는 게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이사벨라는 숫제 루크레치아의 품에 아기처럼 파고들면서 엉엉 울었다. 열연하는 이사벨라와 핏대를 세우는 루크레치아 덕에 저녁 식사 분위기는 눈물범벅이 되어 뻗대는 이사벨라를 한 번쯤은 믿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성대하게 차려진 정찬은 가족 중 그 누구도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해산물 스튜와 트러플로 만든 리소토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가운데, 배가 너무 고팠던 아라벨라는 몰래 닭다리살 만두에 손을 뻗다가 그만 팔로 해산물 스튜 접시를 건드리고 말았다. - 쨍그랑! 해산물 스튜 접시가 엎어졌다. 붉은 토마토 해산물 스튜가 아라벨라의 드레스 위와 흰 식탁보 위에 어지럽게 튀겼다. 데 마레 추기경은 엄한 아라벨라에게 짜증을 냈다.

16600822265247.jpg“칠칠치 못하기는! 입맛이 없어, 입맛이! 에이!”

그는 큰 소리로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 위에 던지고는 올리브유에 적신 식전 빵 정도만 먹은 채로 저녁 식탁에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애꿎은 아라벨라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16600822265243.jpg“너 때문에 아버지가 들어가 버리셨잖아! 아끼는 식탁보인데 다 망쳐 버렸네!”

그리고 루크레치아 역시 울고 있는 이사벨라를 챙겨서 자기의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거북이처럼 목을 어깨 사이에 묻은 채로 주눅이 들어있는 아라벨라를 아리아드네가 간단하게 한마디로 위로했다.

16600822265255.jpg“네 잘못 아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아라벨라에게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6600822265255.jpg“진짜로.”

토마토 수프를 뒤집어쓴 아라벨라를 냅킨으로 간단하게 닦아 주며, 차게 식은 음식들 사이로 눈치를 보는 시종들에게 아리아드네는 간략하게 명령을 내렸다.

16600822265255.jpg“다음 요리 가져와요.”

저런 일들이 마음에 와닿게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바보짓이었다. 힘들 때일수록 잘 먹고, 잘 쉬고, 미래를 위해 충전해야 했다.

16600822265255.jpg“너도 이거 다 먹고 올라가. 조금 있다 나오는 고기도 놓치지 말고 꼭꼭 씹어먹어.”

아라벨라에게 음식 그릇을 밀어주며 아리아드네가 한 말이었다. 아라벨라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닭가슴살 만두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라벨라에게 한 말과 달리, 아리아드네는 카프레제 샐러드에 들어 있던 토마토 약간을 제외하고는 식사에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16600822265272.jpg“⋯⋯아리, 너는 안 먹어?”

16600822265255.jpg“나는 점심을 늦게 먹었어.”

아리아드네는 꼿꼿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손이 조금 떨렸지만,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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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엉엉 울며 어머니의 내실로 들어간 이사벨라는 드디어 마음을 터놓을 수가 있었다.

16600822265238.jpg“엄마, 아리아드네 그 미친 계집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16600822265243.jpg“뭐? 너한테 뭐라고 해?”

굴러온 돌이 자기의 보석을 건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루크레치아는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발끈하고 말았다.

16600822265243.jpg“그 망할 년이 도대체 뭐래?”

16600822265238.jpg“그게, 엄마, 걔가 날 담가버리겠다잖아!”

루크레치아는 멈칫했다. 이사벨라가 무슨 말을 하든 맞장구쳐줄 의욕이 충만한 그녀였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16600822265243.jpg“담가?”

16600822265238.jpg“엉!”

16600822265243.jpg“담이 세다 담력이 좋다 뭐 이런 걸 잘못 들은 게 아니고?”

루크레치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16600822265243.jpg“그 조용하고 음침한 애가 그런 욕을 했다고?”

이사벨라는 버럭 화를 냈다.

16600822265238.jpg“엄마도 나를 못 믿어? 걔가 X 같은 XX 이러면서 날 담가버리겠대. 밤길 조심하라잖아요!”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가 욕설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밖에서 데려온 차녀는 그 흔한 ‘젠장’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하녀의 배에서 태어나 시골 영지에 딸린 농장에서 자란 애치고는 하도 희한해서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16600822265243.jpg‘뭐, 그 어미도 차분하기는 했지.’

이사벨라는 어머니마저도 자기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짜증이 솟구쳤다. 거짓말을 할 때도 만인이 자기를 믿는데, 지금은 심지어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데도 그녀의 친엄마가 그녀를 믿지 않았다!

16600822265238.jpg“엄마, 정말 내 말 안 믿어요?! 표정이 왜 그래? 그 망할 놈의 계집애가 진짜로 그랬다니까!”

16600822265243.jpg“아니, 아니, 엄마는 당연히 우리 이사벨라 믿지. 정말 속상했겠구나.”

루크레치아가 뒤늦게 성심성의껏 사랑하는 큰딸을 달래주었지만 이사벨라는 이미 어머니의 영혼 없음을 알아챈 이후였다.

16600822265238.jpg“아악! 짜증 나! 망할 계집애, 가만 안 둘 거야! 엄마도 미워!”

  * * * 만족스럽지 못한 어머니와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은 이사벨라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의 무도회 이후 궁으로 귀가한 알폰소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호출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침을 꿀꺽 삼켰다. 올 게 왔구나. 마르그리트 왕비는 알폰소 왕자에게 갈리코의 공녀와 혼담이 오가고 있으니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귀띔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몰래 다른 아가씨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해서, 그녀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어 주려다가 파트너는 되지도 못하고 영애들과 싸움이 붙을 뻔했다니,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어머니의 최측근인 마르케즈 백작 부인이 보았다니 오늘은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마마마가 호통을 치실까? 눈물을 흘릴까? 알폰소는 어머니의 호통은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정말 싫었다. 고역이었다. 어머니를 그렇게까지 슬프게 했다는 죄책감과,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하는 반항심, 그리고 자기 검열이 한 번에 얽히는 감정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를 기다리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며 알폰소 왕자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기별을 가지고 온 왕비궁의 시종을 따라 어머니의 궁전으로 들어섰다. 긴 복도를 지나 몇 개의 방을 지난 후 검소한 트윌 휘장을 걷어내고 어머니의 내실로 들어가자 마르그리트 왕비가 일인용 안락의자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마르그리트 왕비는 벌써 벽난로를 때는 중이었다. 벽난로의 불씨가 일렁일 때마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춤을 췄다.

1660082227695.jpg“어마마마. 부르셨습니까.”

16600822276955.jpg“그래, 게 앉거라.”

마르그리트 왕비는 읽고 있던 보고서를 탁 덮어 옆의 협탁에 얹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16600822276955.jpg“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갔었다지.”

1660082227695.jpg“아리아드네예요. 어머니도 이름 아시잖아요.”

고집 있는 아들의 반항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호칭을 정정했다.

16600822276955.jpg“그래. 아리아드네.”

그녀는 협탁에 놓여 있는 보고서를 집어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알폰소 왕자는 그 내용을 대충 훑어보았다.

1660082227695.jpg“갈리코의 발로아 대공과 그 딸에 대한 보고서네요.”

16600822276955.jpg“맞다. 라리에사 데 발로아. 네 정혼 상대로, 지금 혼담이 오가고 있는 상태야.”

혈통의 고귀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왕족은 이웃 나라의 왕족을 만나 왕족끼리 혼인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교회법은 6촌 내의 혼인을 금지하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갈리코 왕국의 공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알폰소 왕자는 갈리코 왕국의 현 왕과 그 여동생인 공주와는 이종사촌 관계가 되었다. 자연히, 갈리코의 오귀스트 공주와는 교회법의 근친혼 금지 규정에 걸려 결혼이 불가능한 사이였다. 그래서 현재 갈리코 왕국에서 선보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혈통의 아가씨는 발로아 대공의 차녀이자 현 국왕 필리프 4세의 8촌인 라리에사 대공녀였다. 알폰소 왕자는 읽다 만 보고서를 자기 옆의 협탁에 올려놓았다. 마저 읽고 싶지 않았다.

1660082227695.jpg“그런데요?”

16600822276955.jpg“다음 달에 갈리코 왕국의 외교사절이 산 카를로를 방문할 예정이다. 네 혼담에 관해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논의하게 될 거야.”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16600822276955.jpg“어제 있었던 일들은 지나간 일이다. 묻을 수 있어. 하지만 갈리코 왕국의 사절이 와 있는 동안에는 절대적으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네가 어느 댁의 무슨 영애와 친밀하다는 류의 이야기가 안 들리게 해라.”

단호한 어머니의 말에 알폰소 왕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1660082227695.jpg“어머니, 아리아드네는 그냥 ‘어떤 댁의 무슨 영애’가 아니에요.”

왕비의 얼굴이 엄격해졌다.

16600822276955.jpg“그러면, 그 애와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엄연히 신분의 격차가 있어. 서출에, 추기경의 자녀야. 어차피 추기경의 자식이니 적출이라도 서출이라 그건 별 상관없겠구나. 하다못해 법황의 사생아라면 두 눈 질끈 감고라도 장가를 보내볼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추기경의 사생아와 왕자라니, 그건 아니야. 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하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들에게 단호하게 아들의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16600822276955.jpg“너는 네가 좋다고 어디 아무 여자나 데리고 야반도주해서 살 수 있는 그런 신분이 아니야. 에트루스칸 왕국의 유일무이한 왕위계승권자다. 진지해지기 전에 지금 정도에서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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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망설이는 것 같자, 그녀는 쐐기를 박았다.

16600822276955.jpg“여기서 더 질질 끌면 도리어 그게 상대방 아가씨한테 폐를 끼치게 되는 거야. 상대방 아가씨에게도 평판이 있고 혼기가 있어. 이루어질 가능성조차도 없는 너한테 메여서 결혼할 시기를 놓치면 그거야말로 아리아드네에게 네가 큰 잘못을 하는 거다.”

이번에야말로 알폰소의 얼굴에 당황하는 빛이 떴다. 그 지점은 왕자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노파심에 덧붙였다.

16600822276955.jpg“공식 행사에의 에스코트도, 주고받는 편지도 이제는 그만둬. 둘이 같이 있다가 남의 눈에 띄는 것도 상대방에게 민폐고, 희망 고문하는 것 역시 큰 실례다. 신사답게 행동해.”

  * * * 한 명은 아리아드네에 대한 어머니의 완고한 반대를 마주했지만 다른 한 명에게는 모친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이쪽의 문제는 이쪽에서는 여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16600822297096.jpg“오타비오. 자네는 자네 싫다는 여자 꼬실 때 무슨 방법을 쓰나.”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는 체자레 데 코모를 별 희한한 인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16600822297101.jpg“아니, 수도의 난봉꾼인 자네가 어찌 나한테 여자 꼬시는 방법을 물어보는 겐가? 자네가 여자 관련해서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어?”

체자레는 가지고 놀던 성냥을 픽 꺼서 쓰레기통에 던졌다.

16600822297096.jpg“난 여자를 꼬셔본 적이 없어. 항상 여자가 먼저 따라왔지.”

재수 없는 발언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체자레 데 코모는 산 카를로에서 제일 가는 인기남이었다. 누가 젊은 여자는 수줍다고 했는가. 그에게는 일상적으로 아가씨들이 보내는 연서와 선물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체자레는 그간 옆에서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는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의 자신감을 거듭 박살 내는 각종 진기록을 세워왔다. 부익부 빈익빈으로도 모자라서 팩트로 굳이 오타비오를 난도질하는 체자레의 질문에 오타비오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체자레는 태연자약하게 오타비오를 쳐다보았다.

16600822297096.jpg“왜, 못 볼 꼴이라도 본 것 같나?”

사실인 걸 어떡하나, 라고 중얼거리는 체자레를 오타비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곧 친우를 위해 중지를 짜냈다.

16600822297101.jpg“잘 모르겠으면 일단 기본부터 해 보는 게 어떻겠나.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네. 꽃만 가면 성의가 없다고 싫어하기도 해. 그러니까 꽃과 함께 선물을 보내. 백발백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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