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9화> 루크레치아의 억울함 (441/733)

<제59화> 루크레치아의 억울함2021.06.27.

그는 자노비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16600822847208.jpg“오늘 사냥터에서, 국왕 폐하와 온 산 카를로, 심지어 외국인들까지 보는 앞에서, 내 자식이자 당신의 자식이어야 할 아리아드네보다 당신이 친조카인 자노비를 두둔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생각이 많아지더군.”

데 마레 추기경은 연극적으로 손을 허공에 떨쳤다.

16600822847208.jpg“그건 남들이 보기에 숫제 이런 이야기 아닌가? ‘데 마레 추기경은 완전 호구로군. 추기경의 식솔보다 자기 친정집이 더 중요한 여자를 부인이랍시고 다른 내연녀도 안 두고 애지중지해왔어.’”

루크레치아는 파리하게 질려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사벨라도 겁을 먹어 울던 소리도 숨을 죽인 채였고, 유일하게 자노비만 가뜩이나 나쁜 머리로 자기의 불행에 침잠해 이게 무슨 소리인지 감을 못 잡고 있을 따름이었다.

16600822847208.jpg“나는 앞으로 데 로시 가에 가는 일체의 원조를 끊을 생각이오.”

데 마레 추기경은 진한 녹안으로 루크레치아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16600822847208.jpg“이 남자 뭐 하는 소리야, 어차피 친정집에 돈 못 보내게 했으면서, 라고 생각하고 있지 지금?”

루크레치아는 정곡을 찔린 듯이 움찔하며 다시금 바닥을 보았다.

16600822847208.jpg“당신이 알음알음 장난질을 쳐서 로시 가에 보내주는 걸 알고 있었어. 굳이 일일이 파헤쳐내봤자 꼴만 우스워지니까 그냥 귀엽게 봐서 넘어가고 있었지. 그런데 이제 끝이야. 이 배은망덕한 것들에게는 내 돈 단 1 두카토, 아니 1 플로린조차 아깝소.”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를 돌아보았다.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깜짝 놀라 고개를 얼른 숙였다.

16600822847233.jpg“아버지.”

16600822847208.jpg“아리아드네.”

그는 둘째 딸을 잠시 바라보더니 루크레치아에게 이야기를 마저 했다.

16600822847208.jpg“앞으로 아리아드네가 당신의 장부를 검사할 거요. 당신은 가계부를 꼼꼼히 작성한 뒤에 1주일에 한 번, 아리아드네에게 가져가서 검사를 맡으시오.”

16600822847247.jpg“……!”

루크레치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는 굴욕일뿐더러 루크레치아가 이 집안에서 독보적인 안방마님으로서의 권력을 휘두르기 힘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지출 내역이 이상한 것이 보이면 바로 아리아드네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없고, 반드시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만 지출이 가능해졌다.

16600822847208.jpg“아리아드네. 너는 어머니라고 봐줄 것 없이 장부에서 수상한 점이 보이면 모두 확인해서 나에게 가져와라. 로시 가문으로 나가는 감자 한 알, 양배추 한 통도 나는 참을 수 없다.”

그는 잠시 어림짐작을 하더니 덧붙였다.

16600822847208.jpg“아마 최소 월 20 두카토(약 2000만 원) 정도는 로시 쪽으로 나가고 있을 게다. 한 달에 그만큼씩 잡아 와. 틀어막아야겠어.”

아리아드네는 공손하지만 힘있게 고개를 숙였다.

16600822847233.jpg“예,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은 구석에 사지가 결박되어 꿇어앉아 있는 자노비에게 말을 전했다.

16600822847208.jpg“너는 이 이야기를 단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네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모두 전해라. 다 네가 분수도 모르고 데 마레 추기경의 딸에게 석궁을 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로시 가문이 다 같이 굶어 죽게 생긴 것은 모두 자노비 데 로시 때문이라고.”

자노비가 사지를 덜덜 떠는 가운데 데 마레 추기경은 집사 니콜로에게 손짓을 했다.

16600822847208.jpg“나가 봐.”

16600822864813.jpg“예, 예하!”

장정들이 우르르 자노비를 끌고 나갔다. 집안의 죄수를 가둬두는 북쪽 지하실로 끌고 가서 팔다리의 힘줄을 자르려는 것이었다. 자노비는 개돼지처럼 질질 몰이를 당해 북쪽 지하실까지 끌려갔다. 그가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데 마레 가문의 하인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가축을 도축할 때 사용하는 큰 칼을 들고 다가왔다.

16600822864817.jpg“아, 안 돼! 가까이 오지 마!”

데 마레 추기경이 사지의 힘줄을 끊으라고 할 때마저도 ‘설마 끊겠어’라고 생각했던 자노비는 도축용 칼을 보자 드디어 현실감이 들었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러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압도적인 완력이 그를 덮쳤고 도축용 칼이 그의 어깻죽지 힘줄을, 아킬레스건을 순서대로 찢었다.

16600822864817.jpg“으아아아악!”

개인적인 폭력을 어설프게 사용하려던 자가 집단의 폭력에 굴복하는 순간이었다. 더 강한 자의 압제로 인해 그의 미래가 끝났다. * * * 자노비가 끌려나가고 이내 지하실 쪽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울부짖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네 번 울려 퍼졌다. 루크레치아는 조카의 비명을 듣고는 파랗게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그녀에게 다정한 듯 무심한 듯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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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0822847208.jpg“여보. 거머리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좋은 핑계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는 훌쩍 루크레치아의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데 마레 추기경의 위로 아닌 위로는 전혀 그녀에게 위안이 되지 않은 듯했다. 루크레치아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아리아드네도 할 구경은 다 했으니 더는 앉아 있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해, 목례를 하고는 방을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루크레치아가 신들린 듯한,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16600822847247.jpg“너! 귀신 들린 년! 네가 오고 나서 잘 풀리는 게 아무것도 없어!”

전생의 본인이 귀신이라면, 지금의 아리아드네는 귀신 들린 년이 맞을 것이었다. 루크레치아는 항상 본능적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16600822847233.jpg“어머니. 장부 검사는 다음 주부터 시작할게요. 준비하시는 데에 시간이 걸리실 테니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16600822847247.jpg“아아아아아악! 너 거기 서! 되바라진 년! 찢어 죽일 년!”

루크레치아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아리아드네는 손톱만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루크레치아의 응접실을 떠나 버렸다. 이사벨라가 어머니 옆에 꼭 붙어 앉아 부들부들 떨면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았지만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 모녀가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방을 떠나기 위해 루크레치아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었고, 루크레치아에게 두들겨 맞을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자유, 이것이 쌉싸름한 권력이 선사하는 달콤하기 짝이 없는 맛이었다. * * * 방으로 올라온 아리아드네는 옷도 안 갈아입은 채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낮에 입고 있었던 사냥용 드레스는 갈아입고 씻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의 푸닥거리를 받아 주느라 아직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던 차였다.

16600822868595.jpg“아가씨!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주무셔야죠!”

산차가 다람쥐처럼 달려와 아리아드네를 잡아끌었다. 아리아드네는 침대에 뻗은 상태로 손을 휘저어 산차를 옆에 앉혔다.

16600822847233.jpg“아버지가 나더러 루크레치아의 가계부를 검사하래.”

16600822868595.jpg“어머, 아가씨! 너무 잘됐어요! 이제 칼날을 휘둘러 보시죠! 맛 좀 봐라!”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16600822847233.jpg“나 오늘 큰 것을 배웠어.”

16600822868595.jpg“뭔데요?”

16600822847233.jpg“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놈이라도 한 방이 있어. 언제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 내가 가진 패는 계속 숨겨야 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

아리아드네는 완전히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자노비를 도발했다. 하지만 자노비에게는 아리아드네에게 없는 야만적인 힘이 있었다. 사회 규범과 법이 엄정한 마당에 미치지 않고서야 폭력은 사용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나쁘고 인내심이 모자란 멍청이는 처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가진 것을 휘둘렀다. 사회적인 압력은 결국엔 부차적이었다. 갈등이 폭발할 때에 가장 원초적인 해결 방식은 물리력이었다. 산차는 고개를 갸웃했다.

16600822868595.jpg“근데 그러면 권력은 대체 언제 휘두르나요?”

산차의 말에는 어느 정도의 진실이 들어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전생에서의 태도, 즉 언제나 착하고, 언제나 공손하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그 입장을 항상 배려해주는 것과 지금 결심한 방향은 겉으로 보기엔 큰 차이가 없었다.

16600822847233.jpg“모아서. 상대방을 한 방에 죽여버릴 수 있을 만큼.”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가 로시 가문에 돈을 보내는 일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만둘 것이라면 예전에 그만뒀을 테였다. 쌓고, 쌓고, 쌓았다가 결정적일 때 함께 터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벨라의 ‘철제 후크’ 사건도 있었다. 언젠가는 이사벨라도 꼬리를 밟힐 것이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교훈을 기반으로 아리아드네는 더욱 강하고 위험한 사람이 될 것이었다. 실수하지 않고, 예측하지 못한 위험도 순발력으로 버텨내며, 다시는 타인으로 인하여 뭉개지지 않는 사람이.

16600822847233.jpg“피곤하다. 우리 이만 자자.”

아리아드네는 염원하던 안전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는 그날 오랜만에 길고 달콤한 잠을 잤다. * * *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의 가계부 검사에 죽을 듯이 저항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완고했다. 아리아드네가 어머니의 비협조를 두 번 고해바치자,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에게 아예 아리아드네와 공동으로 사인해야만 돈을 쓸 수 있게 만들어버리면 좋겠냐고 을렀다. 울고 빌고 화내봤자 아무것도 통하지 않자, 루크레치아는 결국엔 회계장부를 아리아드네에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장부의 상태는 처참했다.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돈이 줄줄 새고 있었다. 같은 것을 여러 지출 항목에서 중복으로 사는 경우도 있었고, 아직 재고가 남았는데도 새로 사는 경우도 많았다. 아리아드네는 장부를 들고 창고를 뒤지며 몇몇 품목만 임의 표본으로 선정해 장부와 재고의 상태를 대조해 보았다. 일부는 뒷돈을 빼돌리기 위해 허위로 계상된 것이었지만 일부는 정말로 헛돈을 쓴 케이스였다. 루크레치아는 무참할 정도로 이 방면에 재능이 없었다. 그녀는 있는 물건이라도 사고 또 샀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했다. 구매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스타일이었다. 덕분에 데 마레 가문의 창고는 유통기한이 지난 달걀, 썩어버린 감자, 좀이 슨 비단과 곰팡이가 핀 리넨 같은 것 따위로 가득 차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눈에 띄는 허위계상 사례만 몇 건 잡아내어 그달에 딱 20 두카토 어치를 맞춰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보고했다.

16600822868595.jpg“아가씨, 근데 사실 8월 16일 자 루크레치아 마님의 향유 구매 건도, 품목이 다를 뿐이지 샀다고 적어놓고 사실은 안 샀으니까 8월 3일 자 건초 대량 구매 허위계상 건이랑 똑같은 케이스잖아요. 왜 저건 봐주고 이것 하나만 추기경 예하께 말씀드리는 거예요?”

산차가 연두색 눈을 빛내며 물어보았다. 산차는 글을 얼추 다 떼더니 요새는 아리아드네에게 장부 읽고 쓰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16600822847233.jpg“쥐를 몰 때도 도망칠 구석은 뚫어 주고 몰아야지, 안 그러면 물린단다.”

아리아드네는 빙긋이 웃으며 산차의 질문에 답했다. 아리아드네는 일부러 루크레치아의 몸단장 용품이라던가 약재 등 사적인 지출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쥐덫을 놓을 시간이었다. 오후에 그녀는 집사 니콜로를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16600822868595.jpg“둘째 아가씨,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신이 왜 불려 올라왔는지 어리둥절한 집사 니콜로가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리아드네는 웃는 낯으로 니콜로에게 말했다.

16600822847233.jpg“내 자네에게 부탁이 하나 있어서 불렀다네. 별로 떳떳한 일이 아니라서 부탁할 사람이 자네밖에 없었어.”

니콜로의 얼굴에 기대감과 경계심이 동시에 어렸다. 떳떳하지 않다니, 뒷돈이 생길 듯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데 마레 가문의 집사 자리는 좋은 일자리였다. 그는 위험한 짓을 해서 밥줄을 끊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16600822868595.jpg“제가 아가씨를 높이 평가하고 성심으로 따르는 사실이야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추기경 예하에 대한 제 충심은 단단합니다요!”

16600822847233.jpg“추기경 예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네. 아버지께서는 탓하지 않으실 거야.”

그녀는 1 두카토 금화를 꺼내서 니콜로가 앉은 곳 바로 앞의 책상 위에 또각 올려놓았다.

16600822847233.jpg“큰일은 아니야. 루크레치아 마님의 측근 하녀에게 ‘라지오네 양장점’이 리베이트를 잘해준다고만 귀띔해 줘.”

16600822868595.jpg“예?”

니콜로에게는 별다른 위험부담이 없는 일이었다.

16600822868595.jpg“정말 그걸로 됩니까?”

16600822847233.jpg“자네의 말이 가장 믿음직할 것 같아서 자네의 입을 빌리려고 내는 금전이네. 난 액수가 작다고는 생각 안 하네.”

니콜로는 아리아드네가 책상 위에 올려둔 금화를 대번에 주머니 속으로 낚아채 갔다.

16600822868595.jpg“저만 믿으십시오, 아가씨!”

니콜로가 모르는 한 가지는,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뒤가 구린 짓은 별거 아닌 일로 시작하더라도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발을 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하나의 체스 말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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