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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체자레 백작의 선물 (444/733)

<제62화> 체자레 백작의 선물2021.07.07.

알폰소 데 카를로는 본인이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남자였다. 그의 타고난 성향이 그랬다. 하지만 그는 오늘 본의 아니게 아리아드네와 가면무도회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파기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16600823009398.jpg“네? 발로아 대공녀가 산 카를로의 가면무도회에 온다고요?”

본인이 직접? 갈리코 왕국에서 에트루스칸까지? 타국의 왕족이 방문하는 것은 거의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알폰소는 국왕의 응접실에서 레오 3세와 마르그리트 왕비와 함께 오찬을 들고 있는 중이었다. 국왕 부부는 궁정 예법상 원칙적으로 매주 토요일 점심을 함께 먹어야 했으나 레오 3세는 이를 잘 지키지 않아서, 부모님 두 분과 다 같이 점심을 먹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알폰소 왕자의 질문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16600823009404.jpg“에트루스칸의 모든 성일 대축일 행사와 그 전야제는 명물이지 않니. 그 중 성 미카엘 축일의 가면무도회에 발로아 대공녀가 꼭 와보고 싶어 했다고 하더라. 평생에 한 번 있을 기회이지 않니?”

먼 친척 아가씨가 흠을 잡히지 않도록 어떻게든 보듬어주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레오 3세가 껄껄 웃으며 답했다.

1660082300941.jpg“대공녀가 이렇게까지 몸이 달아서 에트루스칸 왕국에 시집을 오고 싶어 하다니, 알폰소 네 명성이 국경을 넘은 게로구나!”

진실은 에트루스칸과의 지참금 및 신부대 협상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자 신부 본인을 보내어 에트루스칸 측의 호감을 사려는 갈리코 왕국 측의 계획이었다. 에트루스칸 측에서는 이것이 라리에사 대공녀의 언니인 아름다운 수잔느가 신부 후보였을 때 세워졌던 계획을 게으르게 답습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과연 라리에사로도 같은 효과가 날지는 의문이었다. 알폰소는 이국의 공녀에게 ‘몸이 달았다’는 묘사를 하는 레오 3세의 단어 선택에 거북함을 느꼈다. 그녀 또한 군주의 방계 혈육이자 어찌 되었건 귀한 남의 집 딸이었다. 하지만 레오 3세에 대해서는 머리카락 한오라기마저도 싫어하는 마르그리트 왕비조차도 지금 발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기 아들을 후하게 높여주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가 부모님의 태도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느끼던 차에, 마르그리트 왕비가 아들에게 당부했다.

16600823009404.jpg“네가 가면무도회 때 다른 계획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발로아 대공녀는 너를 보러 오는 손님이야. 가면무도회 때에는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코트해야 한다.”

1660082300941.jpg“암, 암. 그래야지!”

16600823009404.jpg“발로아 대공녀는 우리 말도 서툴고 당연히 사람들도 잘 모를 테니 가면무도회 때에는 네가 계속 옆에 붙어서 챙겨주어야지.”

알폰소는 가면무도회 때 당연히 선약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전에도 아리아드네를 콕 집어 마르그리트 왕비로부터 한 소리 들었던 차에, 레오 3세까지 있는 자리에서 ‘아리아드네와 만나기로 했으니 라리에사 대공녀를 에스코트할 수는 없다’는 철없는 발언을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을 짚자면, 사실 이것은 국빈행사였다. 왕족으로서 나라를 방문하는 국빈을 에스코트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기도 했다. 혼나는 것은 부차적인 일일 뿐이었고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에 빠진 소년이기 전에 백성의 아버지가 될, 왕국의 왕위계승권자였다. 알폰소는 무거운 마음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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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0823009398.jpg“네, 어마마마. 아바마마. 가면무도회에서 발로아 대공녀를 잘 에스코트하겠습니다.”

  * * * 「친애하는 아리아드네에게, (중략)…… 갈리코 왕국에서 국빈 방문이 있을 예정이야. 이번 가면무도회에서는 내가 그분을 안내하는 공무를 맡게 되었어.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었는데 미안해. 나중에 따로 편지할게. -아쉬움을 담아, 알폰소.」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의 사죄 편지를 받고도 의외로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알폰소는 ‘갈리코에서 국빈이 온다’고만 이야기했지만 아리아드네는 산 카를로에 온다는 갈리코의 국빈이 발로아의 라리에사 대공녀라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16600823009435.jpg‘괜찮아,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야.’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의 정략결혼은 기밀 사항이었다. 현재의 산 카를로에서는 아주 소수의 사람만 혼담이 오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발로아의 귀빈이 라리에사 대공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외교 계통에 끈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전생에서도 똑같이 일어났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라리에사 대공녀는 산 카를로에서 성 미카엘 축일의 가면무도회에 참가했다가, 알폰소 왕자에게 완전히 반해서 사랑에 푹 빠진 상태로 귀국을 했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나서 그들의 혼담은 물거품이 되고 알폰소 왕자는 결국 이사벨라와 결혼하게 된다.

16600823009435.jpg“괜찮아. 라리에사 대공녀라면 괜찮아.”

괜찮다고 되뇌었지만 서운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머리로는 알았다, 대공녀가 국민 방문을 하니 알폰소는 당연히 그녀를 에스코트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전생대로라면 정치적 이유로 알폰소 왕자와 맺어지지 않으니 그녀를 견제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달려와 주었으면 했다. 대공녀든 공주든 다 필요 없으니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까지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장 나조차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알폰소를 택하지 않고 있으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주머니쥐처럼 영활하게 두 눈을 굴리고 있으면서 그의 확신만을 원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짓인지. 심지어 알폰소는 그녀보다 잃을 것이 훨씬 많았다. 아리아드네는 서운한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기로 했다. 그건 사실 그녀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기약 없는 임에 대한 원망을 잊어버리기. 아리아드네의 서재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함께 있던 산차가 다가와서 물었다.

16600823013324.jpg“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요.”

아리아드네는 설명하는 대신에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산차에게 건넸다. 알폰소 왕자의 서신을 읽은 산차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16600823013324.jpg“우리 아가씨 어떡해……. 많이 기대하셨는데.”

아리아드네가 자기 입으로 기대가 된다거나, 꼭 가고 싶다거나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항상 옆에 붙어서 아리아드네의 모든 것을 챙기는 산차는 알 수 있었다. 가면무도회에서 만나자는 알폰소 왕자의 편지가 도착한 이후로, 아리아드네는 가면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맞추기 위해 마리니 부인을 불러서 평소보다 훨씬 오래 토의를 했고, 어떤 가면을 쓸지 하루종일 고심했고, 하루에 피부관리에 쓰는 시간을 늘렸고 머리를 하루에 두 번씩 빗었다.

16600823009435.jpg“아니야. 별일 아니야. 라리에사 대공녀가 올 거라는 사실을 감안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민망해하며 웃는 아가씨에게, 산차는 고개를 갸웃했다.

16600823013324.jpg“라리에사 대공녀요? 그 사람은 또 누구래요? 그 사람이 올지 말지 아가씨가 어떻게 아세요?”

산차는 알폰소 왕자의 편지를 들여다보았지만 거기에는 라리에사 대공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에게 모두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16600823009435.jpg‘사실, 나 회귀했어. 나는 미래를 알아.’

혼자서만 간직해야 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로 인해 자신의 행동이 수정되고 주변인들에게 그 사실을 납득시켜야 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회귀는 왜 일어났는지 모르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이를 확실히 알게 될 때까지는 조심, 또 조심하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산차에게도 비밀이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듯한 고독을 갈무리하며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씹었다.

16600823009435.jpg“그냥, 그런 사람이 있어.”

아리아드네는 말을 끊었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음 단어들을 이었다.

16600823009435.jpg“순전히 내 느낌인데, 그 사람은 왕자님의 반려가 아니야. 그러니까 산차, 괜찮을 거야. 난 마음 쓰지 않아.”

산차는 자신의 아가씨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일렁인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확신을 가진 사람의, 이단 종교의 광신도나 정치 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지는 류의 눈빛이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꺼려했겠지만 산차는 자신의 아가씨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건 상태였다. 아리아드네가 살인을 하러 간다고 해도 산차는 아가씨에 편에 설 수 있었다. 산차에게 있어서 아리아드네는 최상선이자 인생의 목적 그 자체였다.

16600823013324.jpg‘이해가 안 되더라도 아가씨는 끝까지 내가 보듬으면 돼!’

산차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리아드네는 산차의 기특한 속마음도 모른 채 라리에사 대공녀와 알폰소 왕자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괜찮았다. ‘그 사건’이 일어나면 갈리코 왕국과의 혼담은 자동으로 깨지고 데 마레 추기경의 딸 중 하나가 왕자비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적립한 이사벨라의 실적은 저번 생에서처럼 뛰어나지 않았다. 이사벨라가 저지른 각종 바보짓과 손상된 평판, 데 마레 추기경의 장녀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아리아드네가 쌓은 명성과 마르그리트 왕비와의 어느 정도 호의적인 관계, 무엇보다도 알폰소 왕자 본인과 쌓은 호감을 고려하면 알폰소 왕자의 왕자비로 선택될 데 마레 추기경의 딸은 아리아드네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잠깐의 라리에사 대공녀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시간은 그녀의 편이었다. 그저 기다리면 되었다. 그럴 것이었다.

16600823009435.jpg‘후.’

거기까지 생각한 아리아드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한 얼굴이었다. 알폰소 왕자와 결혼할 가능성을 셈해보고 안도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녀가 데 마레 가문으로부터 벗어나서 안전해질 수 있기 때문에 했던 안도인지, 아니면 알폰소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한 안도인지 그 재질을 정확하게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런 아리아드네와 산차를 멀리서 지켜보던 황금률이 ‘킥킥댔’다.

16600823013324.jpg- 과연 그럴 수 있을까?

  * * *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체자레 백작의 선물이 들어왔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이사벨라가 우편물 전담 하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짜증을 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릴 정도였다. 하인이 뭘 가지고 왔을지가 뻔했기 때문이다. 저번에 말안장을 한 번 받아 준 이후로 체자레 백작은 기가 살아서 끝 모를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이제 데 마레 추기경 관저는 빨간 장미로 가득 차서 숫제 온실 같을 지경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말안장을 받은 이후에 지나치게 많은 선물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이제는 부담스러우니 그만 좀 보내시라’며 거절의 말을 전했지만, 체자레는 막무가내였다. 계속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오늘 보내온 물건은 가면과 목걸이, 팔찌 일습이었다. 목걸이와 가면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덩어리였다. 가면은 얼굴 전체를 덮는 볼토(Volto) 마스크였는데, 흰 에나멜 재질에 금빛 플뢰르-드-리스(Fleur-de-Lis) 문양으로 장식을 넣어 멀리서 언뜻 보면 흰 에나멜로 만든 얼굴 부분은 진짜 얼굴이고 눈만 가린 황금색 마스크를 쓴 것처럼 보였다. 황금색 장식은 가면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가 황금 끈으로 머리 뒤에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귀걸이가 있을 자리에 매달린 얇은 황금 줄은 턱과 목으로 이어져서 정교한 황금 세공 목걸이가 되었다. 중간에 알알이 박힌 숲과 같은 진한 녹색의 토파즈는 일부러 맞춘 듯이 그녀의 눈 색깔과 정확하게 똑같은 색이었다. 가면은 황금색과 녹색만을 사용했지만 목걸이에는 대담한 붉은 빛을 가미했다. 목걸이 정중앙에는 남자의 엄지손톱만 한 진한 핏빛 루비를 세공하고, 쌀알만 한 토파즈들을 주변에 자잘하게 플뢰르 드 리스 모양으로 뿌렸다. 세트인 팔찌 역시 정중앙에 큰 붉은 루비를 배치하고, 그 주변으로 하나하나가 반 캐럿 크기인 녹색 토파즈를 황금 난집에 세팅해 황금줄로 엮어서 플뢰르-드-리스 모양으로 만든 것이었다.

16600823013324.jpg“아가씨, 이건 정말 너무 예뻐요!”

산차가 장탄식을 했다.

16600823013324.jpg“정말로 돌려보내실 거에요?”

아리아드네는 이미 가면무도회를 위한 가면을 주문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가 주문해서 도착한 물건은 여러모로 아리아드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튀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여자들이 가장 많이 쓴다는 모레타(Moretta) 마스크를 주문했는데, 모레타 마스크의 다른 이름은 ‘모레타 무토’(Moretta Muto), ‘벙어리 하녀 모레타’였다. ‘모레타 무토’는 별도의 고정쇠나 쇰쇠가 없이 미끈하게 뚝 떨어지는 디자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대신에 가면 안쪽에 작은 죔쇠가 달려, 착용자가 이로 그 죔쇠를 물고 있어야 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가면의 착용자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벙어리 하녀 모레타’가 아니었다. 전생의 아리아드네가 가면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에는 눈가만 가리고 입매는 그대로 드러내는 콜롬비나(Colombina) 마스크로 이미 유행이 바뀌었었기 때문에 모레타 무토를 쓰고 있는 동안은 말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은 주문할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파티 내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아리아드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회귀한 후의 본인의 가치 중 7할은 입과 혓바닥이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가면무도회의 날짜가 촉박했기 때문에 새 가면을 주문할 수 있을지 여부를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렇게 완벽한 대체제가 나타났다. 그리고 체자레가 보낸 볼토 마스크는 정말 매우 예뻤다. 산차가 한 번 더 권했다.

16600823013324.jpg“아가씨, 모레타 마스크 때문에 안 그래도 고민이셨잖아요. 그냥, 번거롭게 새로 주문할 것 없이 이걸로 하세요.”

게다가 알폰소는 라리에사 대공녀와 단둘이 가면무도회 내내 시간을 보낼 것이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굽이치는, 이름 모를 감정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왈칵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아리아드네도 동의했다.

16600823009435.jpg“그래, 말안장도 한 번 받았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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