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버려진 분수대에서의 밀회2021.07.18.
알폰소는 자신의 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고, 그녀를 찾아가고 싶은 자기의 발을 꾹 잡아 눌렀고, 의무를 다하기 위해 걸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것이 그녀라니, 천신께서 선물을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리, 맞지?”
아리아드네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따스한 훈풍은 알폰소에게도 전달되었다.
“응!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라리에사 대공녀는 어떻게 하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리아드네는 그녀가 라리에사 대공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폰소에게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알량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네가 나에게 말하지 않고 있으니 나도 같이 모르는 척해 줄게. 모든 게 해소되면 없었던 일인 것처럼 나에게로 돌아와.’
엄밀히 따져서 알폰소가 아리아드네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기 때문에 아리아드네는 이것이 자기 혼자서 앞서나가는 생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그래서 절대로 입 밖에 본인의 생각을 내지 않고, 꼭꼭 포장해 가슴 속 깊은 곳에 꾹 묻어 두었다. 하지만 알폰소를 보자마자 만면에 떠오르는 미소와 온몸에 도는 활기는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정원 안에서 헤매다가 여기까지 도착했어.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네가 있지 뭐야.”
알폰소의 머릿속에선 라리에사는 이미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어머니의 경고도 잊었다. 그들은 서로의 근사한 외양에 대한 이야기, 가면무도회에 대한 이야기, 이후의 일정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11월 중순이 되면 궁정 전체가 타란토로 떠나. 너는 와본 적이 없지, 타란토?”
“응, 추기경 예하와 ‘어머니’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나는 가본 적이 없어.”
데 마레 추기경은 천애 고아 출신이라 타란토에 딱히 가족이나 영지가 없었다. 루크레치아의 친정 식구들은 안 보는 게 나은 상대들이었다. 게다가 그는 산 카를로 교구를 관리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황청 소속 성직자였기 때문에, 겨울에도 에트루스칸 궁정을 따라 남쪽 별궁으로 내려갈 상황이 아니었다.
“너도 함께 가면 참 좋을 텐데. 왕자궁은 초대장을 보낼 수 있어.”
여기까지 말한 알폰소는 혀를 깨물었다. 아,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인데. 하지만 너무나 그녀와 함께 남쪽 별궁에 가고 싶었다. 건조한 공기 사이로 느껴지는 바다 내음과, 사시사철 푸르르지만 북쪽의 활엽수와는 다르게 채도가 낮은, 진녹색과 올리브색 사이에 있는 남부에만 있는 관목들. 모두 다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보고 동그랗게 놀란 아리아드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그 호기심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계속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초대장?”
하지만 정작 아리아드네 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궁이 지금 미혼의 영애, 그러니까 외간여자를 남쪽 별궁에 초대할 처지가 아닐 텐데. 알폰소는 급하게 수습했다.
“좀,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왕자궁 명의의 초대장 발송은 어려울 수도 있어. 그렇지만 타란토에는 내 육촌 비앙카가 있잖아.”
알폰소는 아리아드네를 앞에 놓자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직 비서관 베르나르디노에게도 꺼낸 적이 없던 그의 초기 구상을 털어놓았다. 항상 신중한 알폰소답지 않은 일이었다.
“타란토의 비앙카는 주인 없는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데다가, 우리가 남부 별궁으로 갈 때는 언제나 항상 같이 와서 시간을 보내. 비앙카의 초대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타란토의 별궁에 방문할 수 있어.”
알폰소 왕자와 타란토의 비앙카 사이는 육촌남매치고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알폰소는 다정다감한 친척 오빠였고, 비앙카는 순한 친척 여동생이었다. 즉, 알폰소의 데 마레 영애를 초대해 달라는 부탁쯤은 들어줄 만한 관계였다. 그래서 아직 타란토의 비앙카의 의견을 듣지는 않았지만 알폰소는 우선 아리아드네에게 먼저 아이디어를 던졌다. 역시, 전혀 알폰소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밝게 웃었다. 타란토의 비앙카는 그녀도 꼭 만나보고 싶었던 차였다. 그때쯤에는 발로아의 대공녀도 본래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다! 꼭 초대해 줘!”
* * * 알폰소와 아리아드네가 버려진 분수대에서 환담을 나누는 동안, 버려진 분수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두 불청객이 있었다. 그 불청객 중 첫 번째는 이사벨라 데 마레였다. 이사벨라는 근신하는 동안 서신 수발조차도 금지당해서 가면무도회 직전에야 친구들과 연락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디서 만날지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날짜가 촉박한 탓에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에 가면무도회 날짜가 도달해 버렸다. 이사벨라는 그때까지 오간 편지의 뉘앙스에 비추어보아, 약속장소는 대무도회장의 입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사벨라가 대무도회장의 입구에 갔을 때 그녀가 만나야 했던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와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오간 데가 없었다. 대신 이사벨라가 딱 마주친 건 줄리아 데 발데사르와 나머지 친구들 무리였다. 하필이면 얼굴을 반만 가리는 콜롬비나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혼자 있는 상태에서 그 치들과 딱 마주치다니 운수도 나빴다.
“⋯⋯!”
이사벨라를 먼발치에서 발견한 그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는 자기들끼리 속삭이기 시작했다. 최소한 이사벨라는 그들이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내가 너희를 무시하는 거지 너희들이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기세를 가득 담아 코웃음을 흥! 하고 쳐 주고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팔랑팔랑 대무도회장을 나와 버렸다. 대무도회장을 홀로 나온 다음에는 남들 눈에 띄기가 싫어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연이었다. 이사벨라는 괜히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코를 훌쩍였다.
‘천하의 이사벨라 데 마레가 이게 무슨 꼴이람⋯⋯!’
얼굴을 드러내는 마스크가 아니라 그냥 꽁꽁 싸매고 올 것을 그랬다. 그랬다면 인파 사이로 숨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사벨라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정원을 따라 성질대로 쿵쿵대며 걷던 이사벨라는 앞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자 기척을 죽이고 몸가짐을 조신히 했다.
“⋯⋯타란토의 별궁에서 먹는 포도는 정말 별미야.”
“정말?”
웬 남녀 한 쌍이 시시덕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여자의 옷차림도 눈에 익었다.
‘아리아드네? 알폰소 왕자?’
이사벨라의 눈이 순간 눈알이 튀어 나갈 정도로 커졌다. 마음에 거슬려 죽을 것만 같았다. 이사벨라는 황급히 관목 블록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타란토 별궁 뒤에는 오래된 포도나무밭이 있어. 너무 고목이 되어서 이제는 포도주용으로 수확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고목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포도가 제일 달아.”
“바닥에 떨어진 다음에 먹어도 돼?”
“음, 어차피 껍질은 안 먹을 거니까?”
이사벨라는 귀에 불을 켜고 저것들이 조금이라도 음란한 대화를 하기만 하면 뛰쳐나가서 두 남녀의 평판을 망쳐버리겠다고 벼르며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지만 알폰소와 아리아드네의 대화는 건전하기 짝이 없었다.
‘아, 속 터져!’
* * * 불청객 1호가 정원의 엄폐물 뒤에 숨어서 대화를 엿듣는 것과 정반대로, 불청객 2호는 당당하게 정원을 통과해서 분수대로 직진해 왔다. 체자레는 오늘 완벽한 ‘흑사병 의사’의 차림을 하고 가면무도회에 나타난 차였다. 흑사병 의사는 코가 긴 부리처럼 내려간, 지옥에서 올라온 새 같은 모양의 가면이었는데, 보통은 흰 가면에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지만 그의 것은 콜레지오니에서 맞춘 물건인지라 눈가로부터 시작해 가면 전체에 검은 에나멜과 오닉스로 작고 정교한 플뢰르-드-리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입 부분은 검은 벨벳 천으로 감쌌고 머리부터 발끝까지도 모두 검고 붉은 벨벳으로 덮어서 그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의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에 자신감도 있었지만, 제 인기가 외모 탓이 아니라는 것 역시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런 탓에, 정체를 가리는 가면을 쓰고도 이성에게 어필이 될는지 여부를 시도해보는 것은 체자레가 매해 성 미카엘 축일 가면무도회마다 해 보는 유희였다. 게다가 올해에는 좀 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체자레 백작은 그간 연락하던 여성 동지들의 편지를 모두 씹고 답장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던 탓에, 체자레 백작은 무도회에 참석했다가는 원한에 휩싸인 ‘옛 친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더럭더럭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답장이 없어 상심한 ‘친구’의 눈물 바람이라도 마주칠까, 그 누가 봐도 체자레 백작이라고는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차림을 골랐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한 체자레는 혹여 ‘친구’들 중 하나를 만날까 봐 인적이 없는 정원 속으로 파고들었다. 왕비궁 쪽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숨바꼭질 장소 중 하나였다. 13살에 산 카를로 시내의 저택을 받아 독립하기 이전의 어린 체자레는 산 카를로 왕궁 깊은 곳의 ‘정부의 숙소’ (the Mistress’s Quarters)에서 루비나 백작 부인과 함께 지냈는데, 모종의 이유로 루비나 백작 부인이 소리를 지르며 크게 화를 낼 때면 어린 시절의 그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왕비궁으로 숨어들었다. 모든 곳에 눈이 닿아 있는 루비나 백작 부인으로부터 숨으려면 왕비궁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게다가 마르그리트 왕비는 서자를 박대하는 것을 귀부인으로서의 기품을 잃는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체자레가 왕비궁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잡히더라도, 대여섯 살 먹은 남자아이가 아무리 미워도 마르그리트 왕비는 겉으로나마 아이를 점잖게 타이르고 간식이라도 먹인 후 루비나에게 돌려보냈다. 그럴 때마다 루비나는 친아들이 제 만행을 왕비에게 일렀을까 봐 전전긍긍했고, 어린 체자레는 자신을 혼낸 못된 엄마가 벌을 받는 것 같아서 신이 나서 왕비궁으로 도망치는 짓을 반복하고는 했다. 어린 체자레가 그 짓을 그만두게 된 것은 알폰소가 좀 더 크고 나서였다. 여섯 살 난 체자레가 루비나 백작 부인에게 라틴어 받아쓰기를 세 개 틀렸다고 체벌용 채찍으로 서른 대를 두들겨 맞았던 어느 날, 그는 평소처럼 왕비궁으로 달아나서 흙장난을 하고 놀다가 왕비궁의 정원에서 만난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어디서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대로 치댔다.
- “왕비 폐하, 왕비 폐하께서는 제 적모시라면서요? 그러면 저도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마르그리트 왕비는 도자기 인형같이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지만 목소리만은 인자하게 답했다.
- “그것은 국왕 폐하께서 너를 아들로 인지하실지 여부에 달린 문제란다. 지금은 아니야.”
그게 무슨 함의를 농축하고 있는 말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던 체자레는 그 이후로도 왕비궁에 와서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사춘기를 맞이한 강아지처럼 엉겨 붙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자레는 레오 3세가 마르그리트 왕비와 어린 알폰소까지 셋이서 왕비궁의 정원을 산책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마르그리트 왕비와 레오 3세 사이의 분위기는 루비나와 아버지의 그것보다는 훨씬 냉랭했지만, 황금빛 새끼 강아지 같은 그들의 아들에 대한 태도는 꿀이 녹아떨어지는 듯이 달콤했다.
- “우리 아들! 내 후계자!”
마르그리트 왕비는 행복감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어리고, 무능하고, 통통한 알폰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체자레에게는 나눠주지 않는 종류의 시선이었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체자레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알폰소를 공중에 들어 올렸다 내리며 놀아주던 레오 3세였다.
- “⋯⋯!”
그는 알폰소를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맡기고, 성큼성큼 걸어와서 체자레를 앞에 두고 뺨을 쳤다. - 짝! 부지불식간에 싸대기를 얻어맞은 체자레가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 “아바마⋯⋯.”
-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감히 들어와!”
레오 3세는 준엄하게 호통을 쳤다.
- “썩 네 에미에게로 돌아가거라!”
- “저도 아버지 어머니와 놀고 싶⋯⋯.”
- “누가 네 어머니야! 누가 네 아버지고!”
레오 3세는 어린 체자레의 발언이 당시만 해도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뒤에 서 있는 마르그리트 왕비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두 배는 더 가혹하게 체자레를 몰아붙였다.
- “오냐오냐하니까 위아래를 모르고 덤벼드는구나! 부모 자식 놀이를 한다고 했더니 애가 이치를 몰라! 썩 꺼지거라!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체자레는 자애로운 마르그리트 왕비가 레오 3세를 말려주지 않을까 애타는 눈초리로 마르그리트 왕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예 체자레 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갑자기 어린 알폰소가 칭얼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나게 아버지와 놀다가 갑자기 어머니 손에 맡겨져서 서러워 눈물이 고인 어린 알폰소 왕자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 “으앙!”
- “우리 아들, 놀랐지? 울지 마, 어화둥둥 우리 아기야.”
체자레에게 나눠줄 온기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저 눈부신 금발의 아기의 것이었다. 자애로운 어머니도 다정한 아버지도 저 통통한 금색 덩어리가 가져가 버렸다. 그 뒤로 체자레는 루비나의 말도 안 되는 요구들에 순응하는 착실한 어린 아들이 되었다. 어머니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로 무섭게 혼을 내도 그의 편은 어머니뿐이었다. 왕비궁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오늘 그가 왕비궁 쪽으로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은 과거의 상흔이 가라앉기 충분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왕비궁에 도착할 때마다 항상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황금빛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인이, 그가 선물한 가면을 쓰고 그가 선물한 팔찌를 차고, 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남자와 다정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마주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