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진실에 눈감은 대가2021.08.15.
마퀴즈 컷의 붉은 루비를 보자마자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방 문간에 서 있던 산차에게 고갯짓을 했다. 산차는 자신의 아가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바로 알아듣고 한달음에 아리아드네의 서재로 뛰어갔다.
“이건 또 뭐냐?”
빨간 루비를 발견한 데 마레 추기경의 한탄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어떤 집 영식의 이름이 나올지 반쯤 포기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것은 이사벨라가 아닌 아리아드네였다.
“사교계에는 지금 캄파 후작의 팔찌에서 빠진 붉은 루비가 이사벨라 데 마레에게 있다는 소문이 돌아요.”
데 마레 추기경은 기겁해서 대번에 이사벨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자신의 장녀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는 소문이 돈다는 사실까지는 들었으나 이런 최신 디테일까지는 듣지 못했던 터였다. 세상에. 물증이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이사벨라는 표정 관리를 못 한 채 일그러진 얼굴로 빨간 루비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곧바로 원망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라벨라였다.
“야! 너 왜 함부로 남의 물건 만져!”
이사벨라는 화장대로 달려가 아라벨라에게 제멋대로 손찌검을 했다.
“아야!”
“너 왜 남의 물건 뒤져! 앙?!”
어깨를 호되게 맞은 아라벨라가 비명을 질렀고 분노한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이사벨라의 소프라노 톤은 이 모든 게 지긋지긋한 데 마레 추기경의 노호성에 묻혔다.
“애먼 동생 괴롭히지 말고! 그만—!”
소리를 지른 추기경은 이사벨라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말해봐! 이게 캄파 후작의 물건이 맞느냐.”
이사벨라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거짓말이었고 반대로 그렇다고 대답하게 되면 할 말이 없었다. 어느 쪽을 택하게 되건 거짓말은 필수였다. 그리고 이사벨라는 거짓말을 두려워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이판사판이다.’
“말도 안 되는 모함이에요!”
이사벨라의 단호한 부정에 아리아드네는 입꼬리를 올리고는 웃었다. 어쩜, 인간이 저렇게 근시안적일까. 아리아드네의 보석함에서 목적한 물건을 꺼내온 산차가 그것을 아가씨의 손에 건넸다. 플뢰르-드-리스 문양의 녹색 토파즈 팔찌였다. 팔찌를 건네받은 아리아드네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버지, 이것이 캄파 후작의 팔찌입니다.”
‘체자레 백작의 팔찌’라거나 ‘왕의 아들 둘을 동시에 유혹한 숙녀의 팔찌’같은 좀 더 멋진 이름이 붙을 수도 있었던 이 불우한 팔찌에는 이제 ‘캄파 후작의 팔찌’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하나하나가 반 캐럿 크기인 마퀴즈 컷의 짙은 녹색의 토파즈가 풍부한 광채를 흩뿌리며 군집을 만든 와중에, 센터피스가 들어갈 황금 난집은 알이 빠진 채 텅 비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침착하게 은쟁반 위의 빨간 루비를 집어 난집에 집어넣었다. - 달칵. 빨간 루비는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완벽하게 세로로 길쭉한 황금 난집에 맞아들어갔다.
아리아드네는 의기양양하게 이사벨라를 쳐다보았다.
“천신님께 맹세코?”
좌중이 고요한 가운데 데 마레 추기경이 성큼성큼 이사벨라에게 걸어가 단호하게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 짝!
“악!”
이사벨라의 눈앞에 별이 핑글 돌았다. 태어나서 맹세코 처음으로 맞아보는 따귀였다. 그 누가 데 마레 추기경의 금지옥엽인 고귀한 이사벨라 데 마레에게 감히 손을 댔겠는가.
“아무 데서나 그렇게 쉽게 천신에 대한 맹세를 팔고 다녔느냐?”
데 마레 추기경이 잠긴 목소리로 이사벨라에게 호통을 쳤다.
“아무 남자한테나 웃음을 팔고, 호의를 건네고, 잘해준다고 헤실헤실 붙어먹었어?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어?”
아버지가 정말로 자기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사벨라의 동공이 커졌다. 이것은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누명이었다.
“아니에요! 오해예요! 이건 끔찍한 오해예요!”
이사벨라는 ‘가슴 가리개’ 위에 로브만 달랑 걸친 몰골을 한 채 도리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전 정말로 천신께 맹세코 캄파 후작과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요!”
- 짝! 이사벨라의 눈앞에서 별이 한 번 더 튀겼다. 이번에는 뒤에서 보고만 있던 루크레치아였다.
“네가……. 네가 이렇게 이 어미 얼굴에 먹칠을 해? 내가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니!”
루크레치아는 숫제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키운 딸인데, 애지중지 키운 딸인데! 네가 캄파 후작 같은 불한당의 노리개가 되다니!”
“아 엄마 아니라고!”
이사벨라의 입에서는 짜증이,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줄줄 울면서 소리쳤다.
“내가 도착했을 때 캄파 후작은 이미 그 여자랑 엉겨 붙어 있는 상태였다고요! 난 그저 구경만 했을 뿐이야!”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여기에는 움직일 수 없는 물증이 있었다.
“그럼 그 망할 루비는 도대체 왜 네 수중에 있는 게야!”
실체적 진실을 따지자면 ‘캄파 후작의 팔찌’와 캄파 후작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사벨라가 몰래 주운 팔찌’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체자레 백작이 만인 앞에서 거짓말로 ‘캄파 후작의 팔찌’가 왜 캄파 후작에게 가 있었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해버린 이후로 사람들은 이 팔찌가 정말로 캄파 후작이 도박에서 따서 지니고 있던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루비는…….”
이사벨라는 이번에야말로 진실을 고할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그러려면 인정해야 하는 뼈아픈 진실과 자신의 악행이 너무나 많았다.
‘사실은 체자레 백작이 아리아드네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명을 뒤집어 썼어요.’
체자레 백작이 아리아드네를 구하기 위해 희생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이사벨라로서는 참 힘든 일이었다. 그 혼처는 원래 이사벨라의 것이었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 아버지에게 알려진다면 그는 옳다구나 할 것이다. 당사자가 달라진 약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면 어쩌지. 그리고 무엇보다, 입 밖으로 내서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이 팔찌는 캄파 후작이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고 제가 버려진 분수대 옆에서 몰래 주운 거예요.’
구질구질하게 아리아드네의 팔찌를 자신이 횡재했다며 주워왔다는 사실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게 왜 캄파 후작 옆에서 나왔냐구요? 아리아드네를 캄파 후작의 내연녀로 꾸미기 위해 제가 그 현장에 던졌거든요.’
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버지는 자기를 죽여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로 죽이지야 않겠지만, 사고를 친 귀족 영애들의 종착역인 수녀원에 처박아버릴지도 모른다. 이사벨라는 이미 데뷔탕트 무도회 때 한 번, 사냥대회 때 한 번 아버지에게 경고를 받았다. 삼세번이 데 마레 추기경의 한계다. 절대로 들킬 수 없었다.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루비만 빼서 제 손에 쥐여주고 갔어요. 비밀로 해 달라고요.”
끝까지 잡아떼기로 결심한 이사벨라는 다시금 샘솟는 눈물을 훔치며 도리질쳤다.
“정말로, 저는 캄파 후작의 내연녀 같은 게 아니에요! 그런 못생기고 배 나온 아저씨 따위! 정말 아니라고요!”
이사벨라가 간과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이사벨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말이 돼? 그 여자는 손힘이 무슨 천하장사라도 돼서 팔찌에서 보석 알만 빼서 네 손에 쥐여주고 갔다고?”
그 루비는 이사벨라가 손장난을 치다가 ‘또각’하고 난집에서 빠진 것이었다. 졸지에 아버지의 기준에서는 천하장사가 되어 버린 이사벨라는 속으로 물건을 허접하게 만드는 콜레지오니의 욕을 한바탕했다.
“그리고, 도망가느라 바쁜데 뇌물을 줄 거면 팔찌를 통째로 주지 미쳤다고 거기 서서 루비를 알만 빼서 네 손에 쥐여주고 가겠느냐?”
하지만 우기는 것은 이사벨라가 가장 잘하는 짓이었다.
“몰라요! 보석만 쥐여주고 갔는데 내가 그 여자 속을 어떻게 알아요!”
데 마레 추기경의 논리정연한 지적 중 진짜는 더 뒤에 있었다.
“그리고, 그럼 너는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뻔히 다른 사람인 걸 알면서, 동생이 핀치에 몰렸는데도 고작 보석 따위가 탐이 나서 입을 다물어?”
이사벨라는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누구누구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다, 도망치는 것을 내가 봤다 소리가 그렇게 힘이 들었느냐! 아니면 그렇게나 우애란 개념이 미비한 것이냐!”
‘아, 맞다. 이 버전 스토리로 진행을 해도 아리아드네에게 우애 없는 큰언니가 되는 건 마찬가지였구나.’
이사벨라는 속으로는 이를 갈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둘러댔다. 둘러대는 단어들은 입에서 본능적으로 술술 나왔다. 뇌가 아니라 혀끝에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 여자 얼굴을 못 봤단 말이에요! 누군지 봤으면 당연히 얘기했죠!”
바톨리니 백작 부인은 신실함과 봉사활동으로 이름이 높았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부설 보육원에도 자주 봉사를 오는 부인이었다. 이사벨라는 바톨리니 백작 부인의 이름을 대 봤자 아버지는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비밀은 혼자만 알고 있어야 그 가치가 더욱 높은 법이다.
“네가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르면 그 여자가 미쳤다고 너한테 입을 다물어 달라고 루비를 주겠니!”
“제가 본 줄 알았나 보죠! 너무 창졸간이라 둘 다 정신이 없었다고요!”
이사벨라의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핏대가 시뻘겋게 솟은 데 마레 추기경과, 바락바락 대드는 이사벨라와, 방 안 가득 널브러진, 이사벨라가 남자들 및 (이사벨라의 주장에 따르자면) 여자 한 명으로부터 받아온 각종 귀보석 내지는 액세서리까지. 뭐 하나 평온하고 멀쩡한 것이 없었다. 지친 데 마레 추기경은 이마를 짚었다.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어.”
루크레치아가 깜짝 놀라 눈치를 더럭더럭 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고 한탄했다. 쉰 목소리가 그르렁대는 것이 정말로 기력이 빠진 듯했다.
“이사벨라야, 이사벨라야. 크게 실망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구나.”
내가 뭘 잘못했냐는 듯이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가슴 가리개 위에 로브만 걸친 채 버티고 서 있는 이사벨라에게 데 마레 추기경은 나지막이 고개를 내저으며 선고했다.
“네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가 아니라는 건 내가 믿어주겠다. 내 자식 내가 믿어야지 누가 믿겠느냐.”
뒤에서 듣고 있던 아리아드네의 콧잔등에 주름이 갔다. 하지만 이를 발견하지 못한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산 카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솔직히, 네 이야기가 너무나 수상해서, 아니라고 강경히 대응할 건더기가 없구나.”
이사벨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냥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내연녀라고 까발리면 되잖아요 아빠! 하지만 바로 1분 전에 ‘그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내뱉은 말이 있어서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이사벨라는 이렇게만 주장했다.
“아빠! 아니에요, 제가 다 바로잡을 수 있어요!”
이사벨라는 친구들에게 은밀히 소문을 낼 작정이었다. ‘캄파 후작의 내연녀는 사실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다.’ 그쪽은 진짜였으니까, 소문을 일단 내면 증거가 딸려 나올 것이다. 그냥 사교계에 도화선 하나만 던지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데 마레 추기경은 이 애물단지 천방지축 큰딸을 더 이상 사교계 근처에 풀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용히 해라! 여기서 더 무슨 짓을 하겠다는 거냐!”
지금 저 아이는 개념이나 상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다. 개념이나 상식이 있는데도 저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라면 양심이 바닥까지 처박은 상태다. 데 마레 추기경은 1) 개념이 없다, 2) 양심이 없다, 두 가지의 가설 중 그래도 그나마 자신의 딸이 덜 쓰레기가 되는 1번 가설을 택했다. 개념이 없어서 치는 사고는 인간이 덜 나쁘다는 점에서는 악의로 비롯된 사고보다는 낫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교정이 안 된다는 점에서 접근할 경우 도리어 더 나쁠 수도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성직자였지만 타고나길 합리주의자였고, 그래서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기보다는 행동의 교정 가능성 여부를 따졌다. 쉽지 않았다. 그는 상식이 없는 큰딸이 재교육이 될 때까지는 남들 사이에 풀어놓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천만다행으로 산 카를로 궁정 사교계 전체가 조만간 남쪽 겨울 궁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넌 거기에 따라갈 생각일랑 말고, 사람들이 전부 타란토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집 안에서 근신하면서 꼼짝도 하지 말아라.”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