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왕관의 무게2021.08.22.
델피아노사 경의 뒤늦은 보고를 모두 들은 레오 3세는 문진을 들어 책상 위에 거칠게 내리쳤다. - 쿵!
“내가 우습지?”
마르그리트 왕비는 육중한 문진의 충격음에 깜짝 놀라 몸을 떨었고, 레오 3세의 처사에 익숙한 델피아노사 경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담담하게 고했다.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폐하.”
“그런데! 내가 우스운 게 아니면, 왜 이런 일이 나한테 보고가 안 들어오지?”
그는 문진을 쾅쾅 내려치며 말했다.
“내 궁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 눈에 띄지 않고 쥐새끼처럼 처리하는 게 자네의 일 처리 방식인가? 누구를 위해 숨겨준 거야? 알폰소인가?”
레오 3세는 이글대는 눈으로 델피아노사 경을 노려보았다.
“왕은 나이가 들었다, 이제는 왕자 라인을 타야겠다, 뭐 이런 건가 치프리아노?”
그 말을 들은 치프리아노 델피아노사 경은 책상 옆에 일어서 있는 레오 3세 앞에 몸을 던지다시피 부복했다.
“그럴 리가요, 폐하! 이 델피아노사는 폐하의 충복입니다!”
그는 쉰을 넘어 예순을 향해 가는 왕이 분기탱천하지 않게 단어를 잘 골랐다.
“국왕 폐하께서 이리도 정정하신데 어찌 차기 왕을 논한단 말입니까!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 델피아노사,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로 미력한 능력으로나마 국왕 폐하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거늘 미쳤다고 차기 왕을 찾겠습니까!”
델피아노사 경은 절절하게 애걸복걸했다.
“차기 왕 옆에는 어려서부터 자리잡은 옛 심복들이 있겠지요. 제가 가 봤자 굴러들어온 돌입니다! 제가 국왕 폐하 옆자리 말고 대체 어디로 가겠습니까! 통촉하시옵소서, 폐하!”
젖먹던 힘까지 다한 델피아노사 경의 호소가 마음에 들었던지, 레오 3세의 칼날은 다음 사람을 찾아갔다. 다음 타깃은 바로 옆에서 벌을 서고 있던 마르그리트 왕비였다. 왕은 똑바로 서서 왕비를 노려보며 무섭게 추궁했다.
“당신은 애를 도대체 어떻게 키운 거요!”
왕의 분노는 계속되었다.
“당신의 자랑은 항상 아들이었지. 알폰소, 알폰소 우리 잘난 아들. 그래, 그거 하나는 나도 인정했어! 모난 데 없이 동글동글한 착한 우리 아들! 뭘 시켜도 잘해 내는 착실한 우리 아들! 근데 이 아들놈의 새끼가 이렇게 결정적일 때 어?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 문제로 사고를 쳐?”
레오 3세는 마르그리트 왕비를 노려보았다.
“갈리코의 대공녀가 왔는데 그 앞에서 추기경의 서출 딸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 체자레가 덮어줬기에 망정이지, 들으면 당신도 상황이 뻔하게 그려지지 않소! 대공녀는 내버려 두고 외간여자랑 단둘이 밀회를 즐긴 거 아니오! 어떻게 대공녀가 방문해 있는 그 새를 못 참아? 지금 갈리코 왕국과의 협상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흔들며 외쳤다.
“당신의 존재 의의가 도대체 뭐요? 남자를 기쁘게도 하지 못해, 국민에게 사랑받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친정에서 원조를 넉넉하게 끌어오지도 못해!”
마르그리트 왕비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당신이 잘하고 있다는 건 후계 양육 단 하나였는데 그걸 이렇게 망쳐? 당신이 그렇게나 잘 키웠다고 으스대던 잘난 아드님이 똥오줌 못 가리고 이렇게 중차대한 상황에서 국가 대사에 재를 뿌리느냔 말이오!”
왕의 분노는 점점 더 상승하더니 선을 넘었다.
“정원에 숨어서 사생아랑 붙어먹기라도 했을지 누가 알아! 그게 잘 키운 아들놈이 할 짓이야?!”
마르그리트 왕비는 레오 3세의 이 말에는 고개를 들고 분연히 국왕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이제껏 묵묵히 남편의 폭언을 듣고만 있었으나 이런 이야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짙은 갈리코 억양이 묻어나는 에트루스칸어였다.
“나는 내 아들을 믿습니다.”
“어절씨구?”
“나는 내 아들을 그렇게 파렴치하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청회색 눈에 푸른 분노를 뿜어내며 남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해가 있었을지언정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입니다. 대공녀 본인은 아직 못 깨달은 것 같지만, 그 수행원들이 곧 상황 파악을 할 테니 대비를 해야겠지요. 바깥일은 어쩔 수 없이 국왕께서 정리를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비가 돼서, 자초지종조차 알아보지 않고 다짜고짜 어찌 그런 말씀을!”
“뭐야?!”
“나는 뒷수습을 위해 내 아들과 대화를 해 보겠습니다. 장담컨대, 우리 아들은 현명하게 잘 헤쳐나갈 겁니다.”
자기 할 말만 한 마르그리트 왕비는 레오 3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대로 왕의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레오 3세는 크게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허!”
왕의 내전을 떠나 왕비궁으로 돌아온 마르그리트 왕비의 앞에는 왕자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미 어머니의 내실에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 있었다. 알폰소는 창백한 안색의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마마마. 부왕께서 많이 화가 나셨나요? 고초를 겪으신 건 아니죠?”
알폰소는 ‘어머니가 뒤에 남아 있으라고 이야기를 하셨더라도 내가 따라 들어가서 어머니를 지켜드렸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하며 안쓰럽게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반대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마마마. 어제는 라리에사 대공녀와 약간 다툼이 있어서 그녀가 정원으로 나가 버렸고, 저는 대공녀를 찾으러 다니다가 아리아드네를 만났을 뿐이에요.”
왕자는 의심 많은 아버지가 머릿속으로 본인과 아리아드네가 주연이고 배다른 형과 대공녀가 조연인, 장르가 불순한 드라마를 한 편 썼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야기가 복잡하지만 저는 예에 어긋나는 일은 일절 행하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오해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지만, 어머니가 잘못 생각하시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일이었다. 아버지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은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으나 어머니조차도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많이 슬플 것이다. 왕자는 조바심이 나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아들아, 이 어미는 네가 예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으리라고는 믿는다.”
알폰소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하지만 이것은 모자간의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네 마음을 들여다보자. 너는 네 영혼이 정말로 라리에사 대공녀 앞에서 순결하다고 맹세할 수 있느냐?”
알폰소 왕자는 이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녕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갓 만난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을지언정 지금 마음에 담은 다른 여성이 없는가? 아들의 침묵은 부정이나 다름없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부드럽게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는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인 아리아드네지?”
잠시 말을 잊었던 알폰소는 결국 고개를 끄덕여 어머니의 말을 긍정했다. 왕비는 벽난로 옆에 있는 자신의 안락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왕비는 무릎을 톡톡 쳤고, 그녀의 몸은 다 컸지만 아직 마음이 여린 아들은 안락의자 발치에 깔린 깔개 위에 주저앉아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묻었다.
“좋은 아이야. 똑똑하고, 침착하고. 심지가 곧지.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름 휘어지지 않고 자랐어.”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마르그리트 왕비가 말했다.
“그렇지만 이 일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란다. 엄마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해 주마.”
아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왕비의 시선은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에게는 정인(情人)이 있었단다.”
알폰소는 몹시 놀라 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왕비에게 정인이 있는 것은 국왕에 대한 반역죄로 다스릴 수 있는 중죄였다. 놀란 아들의 얼굴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놀란 얼굴로 보지 마라. 결혼 전 일이야.”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정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의 비약일 수 있으니. 베르트랑 수사님은 끝내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셨단다.”
알폰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아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마르그리트 왕비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구나. 찬찬히 들어 보렴.”
마르그리트 왕비의 눈매가 아득해졌다. 그녀는 다시 몽펠리에 궁전을 뛰어다니는 열여섯 살 꽃다운 처녀가 된 듯했다.
“베르트랑 수사님은 공주전의 사제셨어. 어렸던 나는 그분의 웃는 얼굴, 진중한 미소, 신실한 믿음에 반해서 사랑의 열병을 앓았어. 한창 네 아버지와의 혼담이 오갈 때의 일이었다. 네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았는데 첫눈에 마음에 들지 않았어. 잘생기고 못생긴 것을 떠나서 그 눈빛이 싫었어. 부녀자로서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는 말이고 훌륭한 어머니로서도 실격인 말이겠지만, 나는 사실 네 아버지를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단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넘어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좋아하지 않아. 이런, 이야기가 옆으로 샜구나. 그래서 난 베르트랑 수사님께 달려가서 내 사랑의 열병을 고백했단다. 우리 같이 도망치면 안 되냐고, 너른 벌판에서 농사를 짓고 양을 치며 살자고. 철이 없었지. 베르트랑 수사님은 그때 나에게, ‘공주님께는 천신께서 주신 소명이 있다’라고 하시더구나. 또한, 자신에게도 소명이 있다고 하셨지. 자신의 소명은 갈리코 왕국의 공주님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소명이고,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내 조국을 위해 헌신할 소명이라고 하셨어. 조국의 영달을 위해, 나라에서 정해준 남자와 혼인을 하고, 그의 왕궁을 다스리며, 그의 아이를 낳고 그의 핏줄을 이을 소명이, 의무가, 책임이 있다고 말이야.”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마르그리트 왕비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담담해 보였다. 자신의 의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모습이었다. 이는 낙담이나 포기와는 또 달랐다. 그저 자기가 선 곳에서 매일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차분하고 평온한 태도였다.
“사실 나는 농사를 짓지도 못하고, 양을 칠 줄도 모른단다. 상업을 부흥시킬 줄도 모르고 군사를 이끌 줄도 모르지. 부가가치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주제에 국민들의 혈세로 일 년에 적으면 2000 두카토(약 20억 원), 많으면 5000 두카토(약 50억 원)가 넘는 액수를 예전에는 공주의 비용으로, 이제는 왕비의 예산으로 쓰고 있어. 이런 나를, 왕궁은, 아니 백성은 도대체 왜 부양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먹는 이 기름진 음식과 내가 걸치는 호화로운 의복은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녀는 희미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특정 공간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공간 너머로 그녀의 의무와, 옛 백성과, 완수해야 할 책임을 생각했다.
“나에게는 내 조국으로부터 많이 받은 만큼 많이 돌려줄 의무가 있었어. 베르트랑 수사님께서는 신께서 주신 그 소명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며, 아무리 싫어도, 힘들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계속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거룩한 희생이라고 하셨단다. 난 아직도 그 가르침을 마음속 깊숙이 새기고 있어. 네 아버지와 오찬을 함께 나눌 때마다, 왕궁 안에서 루비나와 마주칠 때마다, 갈리코 억양을 고치지 못하는 외국인 왕비라고 도는 험담을 들을 때마다, 아니 어쩌면 매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뜰 때마다 나는 늘 베르트랑 수사님의 가르침을 되새긴단다. 싫어도 참고, 못하겠어도 버텨라.”
- ‘매일의 인내가 쌓여서 영원을 만든다. 부서지지 않는 인간의 투지야말로 정녕 고귀한 것이니라.’ 마르그리트 왕비의 귀에 저 복음서 외경의 잠언이 들리는 듯했다. 잠언의 내용은 베르트랑 수사의 목소리로 울렸다. 언제나, 그녀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20대 초반의 그 생생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목소리로.
“나는 결국 에트루스칸 왕국으로 시집을 왔단다. 지참금으로 가에타 지방의 영유권을 가지고 말이야. 그 대가로, 내 신부대로 에트루스칸 왕궁은 갈리코 왕국에 황금 2만 두카토를 보내고, 추가로 8만 두카토를 대여해 주었단다. 그 10만 두카토의 황금은 브리앙 왕조가 40년간 항쟁해오던 카페탄의 잔당을 무찌르고, 내전을 끝내고, 갈리코 전 지역을 일통하여 통일 갈리코 왕국을 세울 군자금이 되었다. 나의 아비는 통일 갈리코 왕국의 왕이 되었고, 나의 오라비와 조카가 그것을 물려받았고, 나의 옛 백성은 전란의 참화가 사라진 기름진 땅 위에서 안심하고 농사를 짓고 자식을 낳을 수 있게 되었단다. 나는 사적으로 아주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의 국가를 위한 소명은 다했다. 이제는 네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것만이 나의 행복이란다.”
그녀는 사랑했던 사람이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지금은 더께가 앉아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전할 수 있지만 처음 전해 들었을 때에는 결코 이렇게까지 평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베르트랑 수사님은 내가 결혼을 해서 에트루스칸으로 떠나기 직전에 십자군 전쟁에 종군수사로 자원하셨어. 그는 원래는 공주전 파견이 끝나면 몽펠리에 중앙 대성황당으로 배치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그가 참전했던 부대는 예사크에 접근해보지도 못한 채로 풍토병과 굶주림으로 전멸했다고 한다. 그분은 라트갈린 지역의 동쪽 광야 어딘가에서 돌아가셨다고 하더구나. 그분은 행복하셨을까? 모른다. 소명을 다하셨다고 안도하며 돌아가셨을까? 어미는 그분이 그러셨을 거라고 믿는단다. 천신의 품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성호를 그은 마르그리트 왕비의 과거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점점 현재의 옷을 입었다.
“아리아드네는 좋은 아이야. 영민하고 침착하지. 하지만 네 소명이 가는 길에 함께 있는 아이가 아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침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발로아의 대공녀는 대포 기술과 함께 온다고 하더구나. 정확히는 완제품 대포 20문과 화약 45 리브라(약 15 킬로그램)가 그녀의 지참금이다.”
마르케즈 백작이 미레이유 공작과 르비엥 백작을 상대로 악전고투 끝에 얻어낸 숫자들이었다. 화약 45 리브라(약 15 킬로그램)는 1년 치의 포병 부대 훈련에 소요되는 양이자, 1회의 진짜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양이었다.
“화약의 제조기술은 결국 얻지 못했어. 대신 결혼생활이 1년 길어질 때마다 매해 화약 45 리브라 씩, 최장 3년간 더 추가. 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아들 하나당 일시불로 화약 180 리브라(약 60 킬로그램), 딸이면 90 리브라(약 30 킬로그램) 추가해주기로 했다. 마르케즈 백작의 말에 따르면, 잘 받아낸 조건이라고 하더구나. 갈리코 왕국은 발로아 대공녀의 배에서 에트루스칸의 후계자를 얻으려는 거겠지.”
어머니가 전하는 이야기의 참뜻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시작한 알폰소 왕자의 혈색이 점점 더 창백해져 갔다.
“에트루스칸은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나라이지 군사 강국이 아니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몰랐어. 봉건영주의 사병은 와해시킨 주제에 중앙정부의 군사력을 직접 쌓지 않았지. 그간 국방을 콘도티에로(용병대장)들에게 외주로 돌린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단다. 우리는 매우 부유하며 동시에 몹시 연약하다. 이리떼의 먹이가 되기 안성맞춤이지.”
어머니는 아들을 봐주지 않았다. 연민을 가득 담아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이 나라에는 강건한 군대가, 발전된 기술이 필요해. 너는 갈리코의 화포를 얻지 않고 이 나라의 다음 대를 강력하게 이끌 수 있느냐? 네게 그럴 능력이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