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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그가 떠났다 (458/733)

<제76화> 그가 떠났다2021.08.25.

어머니의 말뜻을 완전히 알아들은 알폰소 왕자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게 치켜뜬, 그의 모친을 꼭 닮은 청회색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16600823919313.jpg“너는 미래의 군주란다. 네 백성에게 지고 있는 의무가 있어. Prudentia(신중), temperantia(절제).

신중, 용기, 절제, 정의. 중앙 대륙의 예삽교를 따르는 군주들의 미덕이었다. 적절하게 행동할 것을 명령하는 ‘신중’과, 자제하고 욕구에 굴복하지 아니할 것을 요구하는 ‘절제’. 이 경우에는 한낱 여자에게 정신 팔리지 말고 국가의 필요를 위해 헌신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알폰소는 어머니에게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60082391932.jpg“라틴 제국 시절의 철학자 보니파시오에 말에 따르면, ‘군주의 아내 역시 군주’라고 하였습니다.”

왕자의 눈물 젖은 청회색 눈에서 열기가 튀었다.

1660082391932.jpg“군주의 옆자리에 선 자는 군주와 마찬가지의 지혜와 통찰을 가지고, 큰 그림을 보며, 관용과 덕으로 아랫사람을 다루고 담대함과 용기로 군주를 보좌해야 한다고요.”

그는 주먹을 꾹 쥐었다.

1660082391932.jpg“아리아드네야말로, 그 자리에 가장 걸맞은 사람입니다. 그녀에게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국력을 한 차원 높게 도약시킬 잠재력이 있어요.”

차마 전달하지 못한 말들도 있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의 아들이 그녀를 원해요. 지난밤, 체자레 백작의 청혼을 듣고 알폰소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 아리아드네는 누군가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 남자의 옆에 서고, 그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아이를 낳겠지. 그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벌어질 미래였다. 알폰소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1660082391932.jpg“발로아의 라리에사 대공녀는 제가 만나보았습니다. 그분께서도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계시겠지만, 제가 찾는 반려 상은 아니에요.”

그녀는 성급했고, 강퍅했으며,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팔라지오 카를로를 평화롭게 다스리고 에트루스칸의 내정을 도울 재목은 아니었다.

1660082391932.jpg“에트루스칸의 국모는 아리아드네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그녀가 내 옆자리에 서요. 그래야 다른 놈이 그녀의 머릿결을 훑고 피부를 만지는, 입술을 느끼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는 꼴을 보지 않을 수 있어요. 단호한 아들의 선언에, 마르그리트 왕비는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읽을 수 없는 표정에 알폰소 왕자는 긴장되어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마르그리트 왕비가 한참의 침묵 뒤에 꺼낸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16600823919313.jpg“아세레토가 쳐들어오면 갈리코의 원조 없이는 우리는 반년 안에 무너진다.”

아세레토는 에트루스칸 남단 끝의 아래에 있는 섬나라 대공국이었다. 섬나라는 항상 본토의 발전상보다 뒤떨어지기 마련이고 아세레토의 크기는 에트루스칸의 절반이 채 되지 않아서 본디 에트루스칸 인들은 아세레토를 자신의 경쟁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런 아세레토에게도 위협을 당할 만큼 현재 에트루스칸 왕국이 처해 있는 상황은 심각했다.

16600823919313.jpg“에트루스칸에는 변변찮은 함대가 없어. 바다의 평화는 포르토 공화국이 지키지. 자신의 돈으로. 우리가 아세레토에게 공격을 당하면 포르토 공화국이 원조를 와 줄까? 박수나 안 치면 다행이다.”

왕비는 크게 놀란 자신의 아들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16600823919313.jpg“아세레토가 새로 건조한 갤리 함대 이야기는 너도 들어보았지? 이 기세대로라면 아세레토의 갤리 함대의 숫자는 5년 안에 두 배로 늘어난다. 아세레토가 그 함대로 에트루스칸의 항구 세 개만 봉쇄하면 우리는 바로 전 국토가 강제 농성전을 당하는 꼴이 된단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날 선 미래에 대한 예상은 멈출 줄을 몰랐다.

16600823919313.jpg“아세레토가 남쪽에서부터 상륙해 올라오면 육군이 그들을 막아 주어야 해. 그 역할은 오롯이 타란토 공작이 했었지. 이제 그는 죽어서 어머니도 없는 열두 살 난 타란토의 비앙카가 혼자 타란토를 지키고 있어.”

1660082391932.jpg“타란토 공작 외의 다른 남부 귀족들은요?”

16600823919313.jpg“다른 귀족들은 의심 많은 네 아버지가 손수 사병을 해체해서 수도로 끌고 오지 않았느냐.”

레오 3세가 꾸준히 봉건영주의 힘을 빼고, 사병을 가질 권한을 축소하는 정책을 편 것을 일컫는 것이었다. 레오 3세 치하에서 구 귀족들은 자신의 땅을 직접 다스리는 영주에서 수도의 궁정에서 복무하는 궁정 귀족, 즉 왕의 신하로 변모했다.

16600823919313.jpg“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봉건영주는 이제 몇 남지 않았어. 그중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자를 찾자면 멸종 상태나 다름없지. 그뿐이냐?”

마르그리트 왕비는 자신의 친정인 모국에도 전혀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16600823919313.jpg“가장 큰 문제는 북쪽의 갈리코 왕국이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 갈리코 왕국은 3년 전부터 가에타 지방을 돌려내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3년 전이라면 마르그리트 왕비의 오라버니인 샤를 7세가 서거하고 조카인 필리프 4세가 왕위를 승계한 시점이었다.

1660082391932.jpg“그건 어머니께서 영유권을 받으신 땅이지 않습니까.”

16600823919313.jpg“난 필리프를 잘 알아. 그 아이는 갈리코의 국경선이 가장 팽창했을 때를 기준으로 그 안이 전부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 필리프는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서는 전쟁을 망설이지 않을 거다.”

어린 시절을 모두 보아 온 친조카에 대한 냉철한 평가였다.

16600823919313.jpg“다행히, 이번에는 필리프가 무슨 변덕이 났는지 국경으로 기사단을 보내는 대신에 수도로 결혼 사절단을 보냈구나.”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16600823919313.jpg“난 이 결혼 협상의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야. 결정 권한은 네 아버지에게 있지. 하지만 네 아버지가 이번 제의를 거절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녀의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6600823919313.jpg“아세레토는 그나마 반년이지, 갈리코가 쳐들어온다면 산 카를로가 넘어갈 때까지 두 달이면 끝이다.”

왕비는 왕자인 아들에게 상기시켰다.

16600823919313.jpg“너에게는 의무가 있지 않니?”

군주에게는 신중과 절제와 용기와 정의 중 그 무엇보다 앞서는, 자기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고 배부르게 먹일 의무가 있었다. 군주는 때때로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거나 신실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도전을 회피하거나 성질머리가 잔인할 수도 있었다. ‘비겁한 군주’가 되거나, ‘포악한 군주’가 될 뿐이다. 하지만 백성을 지키고 먹일 의무를 저버리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었다.

16600823919313.jpg“사치는 강한 자만 부릴 수 있단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알폰소 왕자는 고개를 떨궜다.

16600823919313.jpg“엄마와 아버지가 윗대에서 더욱 강건한 나라를 만들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마지막 말은 쐐기를 박아넣는 것이자 결론의 선고였다. 알폰소 왕자는 말이 없었다. 그의 타고난 의무를 지키려면 그의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책임을 다하려면 그의 마음을 여기에서 멈춰야 했다. 차라리 자신의 영광을, 영예와, 명예와, 가진 것과 누리는 것들을 다 버려야 사랑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면 알폰소 왕자는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지고 있는 것은 의무였다. 군주는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알폰소 왕자는 군주의 장자로 태어나 눈 뜨고 숨 쉰 일분일초를 모두 군주가 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1660082391932.jpg“어마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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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참이 지난 후 입을 연 알폰소 왕자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1660082391932.jpg“어마마마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마지못해, 혀끝에서 단어를 한 음절 한 음절 떨궜다.

1660082391932.jpg“……당신의 아들은.”

무거운 다짐이 뚝뚝 떨어졌다.

1660082391932.jpg“미래의 왕위계승권자로서, 스스로 의무를 다하여 자신의 백성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 * 왕자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간 뒤, 시녀인 카를라 부인이 휘장이 드리워진 왕비의 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벽난로 앞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왕비에게 따듯한 마실 것을 건넸다.

16600823919313.jpg“뱅쇼로군.”

16600823934459.jpg“예. 날씨가 밤에는 제법 쌀쌀하기에 고향의 맛을 내어 보았지요.”

마르그리트 왕비는 끓인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금 벽난로에서 춤추는 불씨를 바라보았다. 카를라 부인은 왕비를 위로했다.

16600823934459.jpg“마음이 아프시지요.”

16600823919313.jpg“아들한테 미안하지. 미안하고말고.”

그녀는 두 손으로 따듯한 잔을 감싸 쥐었다. 치밀어 오르는 한기를 버티려는 듯했다.

16600823919313.jpg“그중 가장 미안한 것은 아들에게 가증을 떤 부분이라네. 내가 백성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닌데 말일세.”

카를라 부인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양모 숄을 가져와 마르그리트 왕비의 양어깨에 덮어 주었다.

16600823934459.jpg“모두 왕자님을 위하셔서 하신 일 아닙니까.”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16600823919313.jpg“내 남편은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아. 그에게 비록 선택권이 하나밖에 없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폰소가 가는 길이 편하거나 안전하지는 않을 거라네. 내 아들은 자기를 보호해 줄 힘이 필요해. 랑부예 구휼원에 잘 묻어 놓았네. 때가 되었을 때 부디 도움이 되기를.”

16600823934459.jpg“힘 있는 장인도 왕자님께 천군만마가 되어 줄 것입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카를라 부인에게 물었다.

16600823919313.jpg“아 참, 이번에 라리에사 대공녀를 수행하고 온 수행원들로부터 그대 가족의 이야기는 들었나?”

카를라 부인은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16600823934459.jpg“모두가 왕비 폐하의 성은이옵나이다. 르사르트 요새의 간수가 대공녀의 수행인 편에 제 아버지와 오빠들로부터 편지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카를라 부인의 가족은 3년 전, 마르그리트 왕비의 오빠인 샤를 7세가 서거하고 왕비의 조카인 필리프 4세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그만 반역죄에 연루되어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왕의 차자이자 인덕이 높았던 루이 왕자를 옹립하려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의 살아남은 가족들은 모두 다 악명 높은 르사르트 요새에 수용되어 있었다. 본디 지체 높은 귀족이었던 그녀가 작위 없이 이름만 불리는 이유였다.

16600823919313.jpg“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어서 미안하네.”

마르그리트 왕비 역시도 왕위계승전에서 장남인 필리프가 아닌 차남, 루이의 편을 들었다. 이는 그녀가 필리프는 그 변덕스러운 성미와 냉혹한 성품으로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타국의 실권 없는 왕비로서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지만 승리한 필리프 4세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고모를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 현재의 마르그리트 왕비에게는 조카에게 사면을 권할 발언권이 없었다.

16600823934459.jpg“아닙니다. 저 같은 것까지 잊지 않고 챙겨주셔서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그나마 갈리코 왕국이 발로아 대공 외드의 딸을 알폰소와 결혼하도록 내어준 것은 필리프 4세가 고모에게 보내는 화해의 제스처였다. 알폰소의 결혼이 잘 끝난다면 친정과의 사이도 좀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미리 꺼내어 놓았던 주머니를 카를라 부인에게 건넸다.

16600823919313.jpg“큰돈은 아니네만 조금 챙겨 두었네. 대공녀가 돌아가는 인편에 챙겨 보내게.”

객관적으로도 아주 많은 돈은 아니었다. 그저 르사르트의 간수에게 약간의 뇌물을 쓰고, 식구들에게 겨울을 날 만한 식량과 연료를 대줄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카를라 부인이 스스로 부담하지 못할 정도의 돈도 아니었다. 하지만 카를라 부인은 눈물까지 보이며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16600823934459.jpg“저 같은 게 뭐라고…….”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연신 반복했다.

16600823934459.jpg“저따위 미천한 것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시다니요. 황공합니다, 왕비 폐하. 황공합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카를라 부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여 주었다.

16600823919313.jpg“자네가 미천하다니. 자네가 없었으면 내 이 외로운 땅에서 어찌 견뎠을까.”

왕비는 조금 웃었다.

16600823919313.jpg“어찌 보면 자네가 나의 자매이자 가족이나 마찬가지라네. 스스로 비하하지 말게.”

마르그리트 왕비가 자신을 자매라고 칭하자, 카를라 부인은 몸부림마저 치며 오열했다. 왕비가 시녀를 위로하려 했지만 시녀의 목멘 울음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가을밤이 지났다. * * * 그 다다음 주에는 레오 3세의 궁정 전체가 짐을 싸서 타란토 영지에 자리 잡고 있는 남쪽 별궁으로 여행을 떠났다. 매해 떠나는, 겨울맞이 여행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갈리코로 돌아갔었어야 했을 라리에사 대공녀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그동안 산 카를로에 눌러앉아 있다가, 따듯한 곳에서 요양한다는 핑계로 레오 3세의 궁정과 함께 타란토의 별궁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전생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리아드네에게 타란토의 비앙카를 통해 초대장을 보낼 테니 꼭 함께 남쪽 별궁을 보러 가자던 알폰소 왕자의 초대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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