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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잘 지은 자식 농사 (471/733)

<제89화> 잘 지은 자식 농사2021.10.10.

아들 새끼 키워놔 봤자 하나도 소용이 없다더니! 데 마레 추기경은 화가 나서 아들을 꾸짖었다.

16600824656843.jpg“너,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

아버지의 질책에 이폴리토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1660082465685.jpg“아이, 아버지. 엄마가 원래 좀 그런 분이신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폴리토의 웃음은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거스르면서도 여유만만해서 나오는 종류의 웃음이 아니었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건 절대로 아버지는 자기를 궁극적으로는 미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랑받는 자식의 확신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16600824656855.jpg‘올 것이 왔군.’

이폴리토는 아버지의 싫은 기색에도 굴하지 않고 데 마레 추기경을 설득했다.

1660082465685.jpg“엄마는 악의는 없어요. 그냥 정이 많아서 가족 일이 되면 좀 앞뒤 분간 못 하고 그러시는 거지. 그런 분인 거 아버지가 모르셨던 거 아니잖아요.”

확실히, 루크레치아에게 악의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밉다거나, 그를 괴롭히려고 사고를 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생각이 매우 짧아서 추기경의 집 안에서 흑마법의 흔적이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려를 못 했을 뿐이다.

1660082465685.jpg“이사벨라도 얼토당토않은 소문 때문에 그렇게 되고. 당시 엄마가 제정신이 아니셨을 거예요. 엄마가 좀 순진한 구석이 있죠. 그러니까 귀여운 거잖아요?”

이사벨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추기경은 침음성을 울렸다. 큰딸이 자기 방에 감금당한 지 벌써 석 달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꺼내줄 때가 되기는 했다. 멍청한 짓을 해서 평판에 흠이 좀 가기는 했지만 그의 장녀는 누가 뭐래도 산 카를로에서 제일가는 미녀였다. ‘산 카를로 제일의 재원’은 하고 다니는 짓거리 때문에 어려울지 몰라도 얼굴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골방에서 꺼내서 이름에 묻은 오명을 털고 다시 시장에 내놓으면 전처럼 왕자비 자리를 노릴만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괜찮은 혼처를 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혼기를 넘기기 전에 팔아치울 수 있느냐의 여부는, 그러니까 처녀의 나이는 혼처의 등급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정말로 수녀원에 영영 보내버릴 작정이 아니라면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를 빨리 시장에 다시 선보여야 했다.

16600824656843.jpg“확실히 이사벨라가 오래 반성을 하고 있기는 하지…….”

집안 관리를 하는 아리아드네로서는 이사벨라의 근신 중 태도가 몹시 불량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사벨라의 행태에 대한 원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이사벨라가 반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증거를 내밀어 이 판에 초를 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데 마레 추기경이 이사벨라를 풀어주려고 하는 명분은 이사벨라의 ‘반성’이되 실질은 그녀가 반성하고 있는지 여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막을 수 없다면 착한 척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다. 착한 척은 이사벨라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16600824656855.jpg“아버지. 안 그래도 어머니께서 시설도 열악한 베르가모 농장에서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실지 걱정이 되던 참입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리아드네 쪽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인자한 표정으로 찬찬히 말을 이었다.

16600824656855.jpg“제가 지내봐서 알지만 베르가모 농장은 여기보다 북쪽이잖아요? 북부의 겨울은 매섭습니다. 그리고 시골 건물들은 겨울에는 단열이 안 돼서 정말 추워요. 어머니 건강이 걱정돼요.”

아리아드네는 사려 깊어 보이게 잠시 말을 끊었다가 약간의 눈웃음을 띈 채 데 마레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영롱하고 가련하게 반짝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16600824656855.jpg“게다가 이사벨라 언니도 이폴리토 오빠가 돌아오신 이후로 얼굴 한 번 못 봤어요. 가족끼리 인사는 해야지요. 아버지 생신에 모두 모여 회포를 푸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를 다시 봤다는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버지에게 상큼하게 웃어 주었다. 이폴리토는 노골적으로 네가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왼쪽 눈썹을 위로 치켜세운 채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드네는 예의 인자한 미소로 이폴리토도 다시 한번 일별해 주었다.

16600824656855.jpg“오라버니는 아직 돌아온 이후로 언니를 찾아보지 않으셨지요?”

1660082465685.jpg“어, 어. 아버지 명을 어기고 이사벨라와 만날 수야 있나.”

16600824656855.jpg“그럼요. 남매보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더 중요하지요.”

묘하게 놀리는 듯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표정과 말투는 진중하게 오라버니의 말씀이 모두 맞다는 듯한 태도여서 이폴리토는 긴가민가했다. 사실 빈정거리는 것이 맞았다. 용돈이 막히자마자 아버지 명을 어기고 루크레치아는 잘도 만나고 온 양반이 참 웃기는 소리를 한다며 아리아드네는 속으로만 혀를 쯧쯧 찼다. 루크레치아와 데 마레 추기경은 참 자식 농사를 잘못 지었다.

16600824656855.jpg“아버지 생신 만찬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가족끼리니까 소식당에서 오붓하게 먹어요.”

1660082465685.jpg“까투리 구이도 잊지 말고. 아버지는 바싹 익힌 걸 좋아하셔.”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를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16600824656855.jpg“여부가 있겠습니까.”

데 마레 추기경은 목소리를 골랐다.

16600824656843.jpg“흠흠. 아리아드네. 네가 수고해 준다니 참 든든하구나.”

아리아드네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예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 나한테 빚 하나 졌어.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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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루크레치아는 눈치를 보며 데 마레 대저택의 현관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원래 그녀가 총지휘하던 곳이었지만 벌써 어딘가 생경했다.

16600824656855.jpg“어머님, 오셨습니까.”

데 마레 대저택의 현관에서 아리아드네가 마치 대장처럼 사용인들을 모두 거느린 채 우뚝 서 있었다. 그녀는 공단으로 만든 호화로운 실내용 드레스를 차려입고 마차에서 내려 약간 낡은 모피 망토를 입고 들어오는 루크레치아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16600824656855.jpg“오시는 길은 괜찮으셨는지요.”

아리아드네의 옆에 서 있는 그녀의 몸종도 하녀장의 의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루크레치아의 심복인 지아다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저 사생아가 제 사람들을 채워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손가락에서 안주인의 황금 인장이 빛났다.

16600824664611.jpg‘저 망할 계집이……!’

원래도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를 미워했다.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를 향한 데 마레 추기경의 사랑이 완벽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생아였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그녀의 금지옥엽 이사벨라에게 주어져야 할 것들을 빼앗아갔다. 그 위에 이제 오만불손함이 더해졌다. 현관에서 마치 자기가 집안의 안주인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저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이유와 상관없이 아리아드네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16600824664611.jpg“흐읍!”

루크레치아는 크게 코웃음을 치려다가, 지금은 남편에게 단 하나의 꼬투리도 잡혀서는 안 되는 처지라 이를 악물고 고까움을 참았다.

16600824664611.jpg“……내 아들은 어디 있느냐?”

정신을 수습한 루크레치아가 제일 먼저 안부를 물은 사람은 이폴리토였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장남의 모습부터 찾았다. 그녀가 이 대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듬직한 장남 덕 아닌가.

1660082465685.jpg“어머니!”

시간 맞춰 등장한 양 2층에서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이폴리토가 루크레치아를 맞이하러 내려왔다.

16600824664611.jpg“이폴리토!”

어머니와 아들은 현관에서 얼싸안으며 해후를 누렸다. 루크레치아는 아들을 힘껏 껴안고, 등을 서너 번 토닥이고 난 다음에야 겨우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루크레치아의 눈에 마음에 차이 않는 것이 보였다. 이폴리토의 바로 뒤에 시립하고 선 말레타였다. 이폴리토와 말레타는 그새 화해를 한 양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리고 아들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어머니는 대번에 심상치 않은 기색을 포착했다.

16600824664611.jpg“얘는 왜 여기 있니?”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빙긋이 웃었다.

16600824656855.jpg‘걸려들었다.’

이폴리토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유롭게 대답했다.

1660082465685.jpg“제 전담 하녀입니다. 싹싹하고 똘똘하고 일 잘해요.”

말레타의 표정에 약간의 균열이 갔다. 제아무리 말레타라도 이폴리토가 어머니와의 첫 만남에 그녀를 여자친구라고, 혹은 미래의 안주인이자 당신의 며느리라고 소개해 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간명하게 ‘일 잘하는 하녀’의 포지션으로 내리깔 줄은 몰랐다. 루크레치아는 반대로, 아들이 하녀를 칭찬했다는 점에 분노했다. 분명히 둘 사이에 남녀로서의 기류가 흐르는데, 아들이 모친인 자신 앞에서 대놓고 저 계집애를 칭찬했다는 사실은 어머니인 자신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었다. 루크레치아의 귀에는 이폴리토의 칭찬이 ‘엄마가 뭐라고 생각하시든 나는 저 여자를 귀히 여길 거에요’, 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이폴리토는 자신이 순식간에 두 여자를 불만족스럽게 했으며 메울 수 없는 골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루크레치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1660082465685.jpg“어머니, 가족 식당으로 가시죠. 만찬이 준비되어 있어요.”

마치 자기가 그 만찬을 준비하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이폴리토는 당연히 자기가 대장이라는 듯이, 맨 앞에서 가족들을 소식당으로 인도했다.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잰걸음으로 일행을 추월했다. 그녀는 일행을 앞질러나간 상태에서 이폴리토를 흘긋 쳐다보고는 맨 앞자리를 빼앗았다. ‘손님’을 모시고 식당으로 이동하는 행렬의 맨 앞은 ‘안주인’이 하는 게 옳았다. 이폴리토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들’은 안주인보다 뒤 순서였다. 안주인보다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가주밖에 없다.

16600824656855.jpg‘지긋지긋한 치들.’

가족 식당에는 또 다른 빌런이 도착해 있었다. 감금당해있던 자신의 방에서 석 달 만에 간신히 바깥 구경을 하게 된 이사벨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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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는 단순한 순백의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간 햇빛을 못 봐서 그랬는지 더욱 창백해진 상태였다. 눈가에는 희미한 눈그늘이 보였으며, 처연하고 우울한 기색을 띠는 모양새가 청순하기 짝이 없었고 여전히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아리아드네는 혀를 찼다.

16600824656855.jpg‘쟤는 갇혀 있어도 상하지를 않네.’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를 언뜻 바라보더니, 바로 두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감금이 그녀의 미모를 쇠락시키지는 못했어도 성질머리는 좀 죽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 편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 태도는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어졌다. 뒤이어 이폴리토와 루크레치아가 입장하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이사벨라는 그제야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서 외쳤다.

16600824670707.jpg“엄마!”

16600824664611.jpg“오! 우리 보석!”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는 감동의 모녀 상봉을 했다. 100일 가까이 떨어져 있다가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었다.

16600824670707.jpg“엄마! 엄마!”

달변가인 이사벨라로서는 드물게 단어를 찾지 못하고 엄마라는 단어만 부르짖었다. 이사벨라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오열을 했고, 루크레치아는 본인의 빈궁한 처지도 잊고 수척해진 딸을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 당사자가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라는 사실만 빼면 몹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이 광경을 보며 불편했던 것은 아리아드네뿐만이 아니었다.

16600824656843.jpg“크흠!”

가족 식당에 뒤늦게 입장한 데 마레 추기경이 헛기침을 했다.

16600824656843.jpg‘누가 보면 내가 나쁜 놈인 줄 알겠군.’

데 마레 추기경은 지금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는 사악한 흑마법을 사용한 애첩과 명예에 흠집이 난 문란한 딸을 정당하게 징계한 가장일 뿐이다. 하지만 저기에서 초상이라도 난 듯 울고 있는 모녀를 보니 그가 악당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이폴리토가 웃으며 재빨리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1660082465685.jpg“어머니, 왜 그렇게 세상에 떠나간 것처럼 우세요. 이사벨라야, 일어나라. 아버지 생신인 좋은 날인데 우리 맛있는 것을 먹고 기분 좀 풉시다. 자자.”

그 뒤로는 가족 식당에 모인 모두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정상적인 가족처럼 굴었다. 건강에 대한 질문, 요즈음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다만 루크레치아와 데 마레 추기경은 남녀 사이로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나 서로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레 피했으며, 주로 아이들의 안부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나눴다.

16600824656843.jpg“이폴리토, 그래. 공부는 잘 마쳤느냐.”

1660082465685.jpg“네네, 아버지.”

이폴리토는 순간 손바닥에 난 땀 때문에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는 긴장을 숨기고 태연하게 접시를 내려다보며 까투리 뒷다리를 계속 잘랐다.

16600824656843.jpg“군사학 학사지? 내 아들이 그 따기 힘들다는 파두아 대학의 군사학 학위를 받다니 자랑스럽기 그지없구나.”

1660082465685.jpg“그럼요,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이폴리토는 까투리 뒷다리를 입안에 욱여넣고 아버지에게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뿌듯하다는 표정의 루크레치아가 상냥하게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에서, 데 마레 추기경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16600824656843.jpg“그럼 네 학위는 언제쯤 집으로 오게 되는 것이냐?”

  - 꿀꺽! 이폴리토는 그만 안 씹은 고기를 한입에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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