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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선 넘지 마라 (472/733)

<제90화> 선 넘지 마라202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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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0824708426.jpg“보통 학사과정이 12월 초순에 마감되니 성적은 지금쯤이면 모두 확정되었겠구나. 지금이 1월 하순이니, 슬슬 성적표가 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

루크레치아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1660082470843.jpg“우리 아들, 상 같은 건 받았니? 역시 우리 아들이니까 수석 졸업 같은 건 아주 쉽겠지?”

이폴리토는 웃느라 드러난 루크레치아의 앞니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기껏 베르가모 농장에 유배당해 있는 걸 모셔왔더니 친아들을 사지로 모나! 하지만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말을 눙쳤다.

16600824708434.jpg“하하! 어머니 아들인데 당연하지요. 그런데 수석 졸업은 아니고, 제가 우등 졸업에 인기투표로 졸업식 축사를 읊게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는요.”

16600824708426.jpg“원래는……?”

부모님의 질문에, 이폴리토는 극적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6600824708434.jpg“지금 파두아에서는 대학이 위치한 도시를 옮겨야 하니 마니 하는 논쟁이 한창인데요, 지금 그것 때문에 학생들이 스트라이크 중이라 학사과정이 완전정지입니다.”

대학도시 파두아가 원래 비과세였던 대학 관련 시설과 교직원에게 매기는 세금을 신설하기로 했고, 이에 대해 파두아 대학 측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학사과정이 중지되었다거나,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시험 치기 싫었던 일군의 학생들이 ‘이랬으면 좋겠다’고 공상하던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폴리토는 짐짓 비장하게 열변을 토했다.

16600824708434.jpg“글쎄, 파두아는 우리 덕분에 시골 깡촌에서 사람 사는 도시가 됐으면서 이제는 은혜도 모르고 세금을 물리겠다고 하지 뭡니까! 학문하는 선생들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뭐 하는 짓인지 원! 역시 군주가 없는 자유도시는 근본이 없어요.”

루크레치아가 눈을 크게 뜨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캐물었다.

1660082470843.jpg“그래서, 네 학사 학위를 안 준대?”

16600824708434.jpg“어머니 아들이 그만 불의는 눈 뜨고 못 넘어가지 않습니까.”

데 마레 추기경도 아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폴리토는 관심에 취한 상태로 식탁을 주먹으로 쿵 쳤다. 음식들이 달그락거렸고, 여동생들이 놀란 눈으로 이폴리토를 쳐다보았다.

16600824708434.jpg“그래서 제가 학생 대표로 학사일정 거부를 조직했어요. 저희 과는 단체로 기말시험을 안 쳤습니다.”

루크레치아는 대경실색해서 아들을 걱정했다.

1660082470843.jpg“그러면 지금 여기 있지 말고 파두아에서 추가 시험 공고를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냐?”

16600824708434.jpg“어머니.”

이폴리토는 그윽한 눈으로 루크레치아를 응시했다.

16600824708434.jpg“어머니 아들이, 어머니가 그렇게 되셨는데 어떻게 파두아에 앉아서 자기 공부에만 신경을 씁니까.”

루크레치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인생 헛살지 않았다. 남편이 가차 없이 그녀를 내쳤어도 그녀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그녀의 아들이 있었다. 이폴리토는 고귀하고 숭고한 기치의 대변인이 된 이 기세를 몰아 오늘의 목표를 입 밖으로 꺼냈다. 사실, 목적적이었다기 보다는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허세가 추동한 말이기도 했다.

16600824708434.jpg“아버지,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셨는데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시게 하면 안 될까요? 어머니가 잘못하신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반성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용히 앉아 있던 이사벨라가 눈시울을 훔쳤다. 언니와 엄마의 부산스러운 상봉 덕에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볼 기회조차 못 얻었던 막내 아라벨라도 약간 시큰해진 콧잔등을 비볐다. 데 마레 추기경은 약간의 헛기침을 한 번 더 했고, 이를 고민의 흔적이라고 받아들인 이폴리토가 한 번 더 밀어붙였다.

16600824708434.jpg“그게, 방법은 나빴지만 다 우리 식구 잘되라고 기원한 거였답니다. 엄마의 의도는 나쁘지 않아요. 성품은 착한 분이에요.”

그놈의 ‘사람은 괜찮다’는 말. 아리아드네는 속으로만 혀를 쯧쯧 찼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 분위기에서 나서서 초를 치자니 대역죄인이 될 판이었다.

16600824708434.jpg“이제 복 기원은 대성황당에서 같이 기도드리는 쪽으로 하자고 제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다닐게요. 그러니 아버지, 한 번만 어머니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이폴리토는 가슴을 탕탕 쳤다. 그의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는 가벼운 마음에서, 멋있어 보이길래 꺼낸 말이었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이폴리토는 그의 장자로서, 차기 가주였다. 데 마레 추기경에게는 이폴리토의 다짐이 루크레치아가 사고를 치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겠다는 약속으로 들렸다.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이것이 루크레치아가 사고를 치더라도 차기 가주로서, 가문에 끼칠 피해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지고 또 그 피해를 최대한 누그러뜨리겠다는 이폴리토의 약속이라고 생각했다.

16600824708426.jpg“네가 정녕 책임질 수 있단 말이냐?”

그의 치켜든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16600824708434.jpg“그렇고말고요!”

아버지의 속을 상상도 못 한 이폴리토는 당당하게 호언장담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 딱 한 번 끄덕였다.

16600824708426.jpg“그럼 그렇게 된 것으로 해라. 네 어미는 네가 책임지고 보살펴 더는 잡음이 안 나도록 해라.”

그리고 추기경은 순백의 드레스를 걸친 채 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16600824708426.jpg“그리고 너. 너도 크게 반성한 것으로 알고 있겠다. 근신은 풀어주겠지만 당분간 외출은 금지다. 교회에 기도하러 가는 것만 허용하겠다. 알겠느냐?”

이사벨라는 창백한 낯으로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16600824719942.jpg“많이 반성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더 이상 아버지를 심려케 해 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6600824708426.jpg“오냐.”

이렇게 일을 정리한 데 마레 추기경은 내려놓았던 고기 나이프를 다시 집어 들었다.

16600824708426.jpg“그럼 이제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자꾸나. 아리아드네, 수고롭겠지만 모두의 잠자리를 봐 주렴.”

아리아드네가 고개를 숙이며 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이폴리토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16600824708434.jpg“그런데 말입니다 아버지.”

그는 의미심장하게 아리아드네의 손에 끼워진 안주인의 황금 인장을 바라보았다.

16600824708434.jpg“어머니께서 돌아오시면 이제 집안 관리는 어머니께서 해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엄연한 안주인이 계시는데 어린 여동생을 고생시켜서야 안 되죠.”

그 말을 들은 루크레치아 본인조차 깜짝 놀라서 데 마레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이거, 하루에 너무 많이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아닌가?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저 이복오빠의 머리가 나쁜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양반이었다.

16600824708426.jpg“흠…….”

그러나 아리아드네의 아버지는 그녀의 생각보다 양심이 없었다. 이폴리토의 제안을 단칼에 자르지 않고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생각을 해 본 데 마레 추기경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은 실무와 관련이 없는 의사결정권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둘에게 반반 나눠줄 테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안이었다.

16600824708426.jpg“확실히 아리아드네는 어리고 안주인의 인장은 어울리지 않기는 해.”

그 뒤에는 ‘딸 중에서도 사생아 배에서 난 둘째인’이 생략되어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16600824708426.jpg“하지만 네 어머니는 안주인으로서 실책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바로 복권되는 건 온당하지 않아.”

이번에는 이폴리토와 루크레치아, 이사벨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내와 자녀들을 번갈아 냉탕과 온탕에 빠뜨린 다음에, 데 마레 추기경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16600824708426.jpg“그러니까 네 어머니가 예산안을 짜면, 아리아드네가 그걸로 실제 집행을 하는 거로 하자.”

16600824720215.jpg“싫습니다!”

높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이폴리토나 루크레치아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것이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절대로 싫다, 안 한다, 못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둘째 딸을 바라보았다.

16600824708426.jpg“네가 웬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냐?”

그는 자기의 둘째 딸이 예나 지금이나, 자기 손에 들어온 황금을 절대로 내보내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6600824720215.jpg“예하.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지만, 반대로 책임을 지우시려면 권한도 주셔야 합니다.”

아리아드네는 날카로운 표정으로 루크레치아와 이폴리토를 번갈아 노려본 후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16600824720215.jpg“저에게 집안을 관리할 의무는 지우시면서 손발에 족쇄를 채우시면 전 일 못 합니다. 그냥 다 가져가세요.”

이폴리토가 벌떡 일어나 아리아드네에게 호통을 쳤다.

16600824708434.jpg“아버지께서 시키시면 시키시는 대로 '네, 네' 할 것이지, 쥐방울만 한 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아리아드네는 한마디도 양보하지 않고 반박했다.

16600824720215.jpg“오라버니는 집안 안살림에 간섭하지 마세요!”

그녀는 이어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호소했다.

16600824720215.jpg“애초에 제가 어머니께 안주인의 인장을 넘겨드릴 수 없다고 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오라버니 때문입니다.”

16600824708434.jpg“뭐야?!”

이폴리토는 이제 숫제 아리아드네를 두들겨 팰 기세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드네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16600824708434.jpg“너, 말 다 했어?!”

아리아드네는 식당 입구에 시립해 있던 산차에게 눈짓을 했다. 아가씨가 무얼 원하는지 기민하게 알아들은 산차는 얼른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폴리토가 주먹을 휘두르기 직전에 데 마레 추기경이 자신의 아들을 제지했다.

16600824708426.jpg“그만! 너는 썩 제자리로 가서 앉지 못해?!”

아버지의 호통에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 이폴리토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씨근덕대고 있었다. 그는 눈에서 화염이라도 쏟아낼 듯이 배다른 여동생을 노려보았다. 닥쳐라, 닥쳐라,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닥쳐라……!

16600824720215.jpg“이폴리토 오빠가 지금 월 15 두카토(약 1500만 원)를 용돈으로 수령하고 계시는데, 저에게 매달 23 두카토(약 2300만 원)의 쌈짓돈을 추가로 요구하신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아버지?”

데 마레 추기경은 깜짝 놀라 이폴리토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여동생은 씹어먹을 것처럼 위협하던 이폴리토는 아버지 앞에선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그는 반쯤은 비굴하게, 반쯤은 유머를 섞어 눙쳤다.

16600824708434.jpg“그게……. 사나이 대장부라면 교우 관계도 있고, 밥도 사고 술도 사야 할 일이 왕왕 있지 않습니까. 저도 인맥 관리해야죠.”

하지만 배다른 여동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에서 먹이를 포착한 맹수처럼 그를 코너로 몰았다.

16600824720215.jpg“오라버니 친구라고 부를만한 귀족 자제들은 지금 모두 다 타란토로 내려가 있는데 한겨울의 산 카를로에서 무슨 인맥 관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아리아드네는 조소를 날리며 말레타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말레타는 식당 입구에, 전속 하인과 하녀들이 시립해서 서 있는 곳에 모여 있다가, 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당황해서 허겁지겁 자세를 가다듬었다.

16600824720215.jpg“아니면 오라버니의 인맥이라는 게 집안 하녀입니까?”

온 집안 식구들의 시선이 말레타로 모여들었다. 말레타는 하녀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말레타의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복장 때문이었다. 말레타가 입고 있는 것은 데 마레 가문 하녀의 복장이었지만 그 재질과 재단이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는 아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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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마레 가문의 하녀 복장은 겉에 입는 갈색 상의 안에 흰 블라우스가 살짝 비추는 형태였는데, 말레타는 그걸 형태만 남긴 채 다 자기 좋을 대로 개조한 상태였다. 갈색 상의의 목둘레선은 몹시 깊게 파여 상체의 대부분을 노출했고, 그 안에 받쳐입은 흰색 셔츠는 두꺼운 면 재질인 다른 하녀들과 달리 한겨울에도 안이 비치는 리넨 재질로 입었다. 그뿐이랴, 목에는 남양 진주로 만든 목걸이를 두르고 있었다. 하녀들이 간혹 차는 담수 진주 펜던트가 아니라, 엄지손톱만 한 남양 진주를 올올이 모아 체인으로 만든 귀부인의 목걸이였다. 매끄러운 표면에 우아한 광택이 깃든 모양이 루크레치아조차 감탄할만한 상등품이었다. 말레타의 꼬락서니를 보자마자 이폴리토의 돈이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를 깨달은 데 마레 추기경이 침음성을 흘렸다.

16600824708434.jpg“이게……!”

이폴리토는 살아 숨 쉬는 증거가 눈앞에 나타나자 부들부들하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만 이를 갈며 욕설 비슷한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드러난 아들의 민낯에도 불구하고 데 마레 추기경은 한 번 더 중재를 시도했다.

16600824708426.jpg“네 어머니가 신경을 써서 잘 감시하면 이폴리토의 씀씀이도 제어가 되지 않겠느냐?”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흘렸다.

16600824720215.jpg“어머니는 아들 일이 되면……. 아주 너그러워지시는 분입니다. 애초에 이폴리토 오빠의 씀씀이가 어쩌다가 저렇게 커졌겠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다시 한번 침음성을 흘렸다. 틀린 말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때 산차가 2층의 아리아드네의 서재에서 책 두 권을 들고 내려왔다. 한 권은 아리아드네의 장부였고, 다른 한 권은 조금 얇은 종이를 가죽 껍질에 철해놓은 것이었다.

16600824720215.jpg“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아리아드네가 차가운 미소를 띠며 산차가 가져온 책 두 권을 받아 그중 장부가 아닌 다른 얇은 한 권의 페이지를 펴서 데 마레 추기경에게 내밀었다. 그것 또한 하나의 장부였다. 표지를 보니 양장점이나 의상실에서 사용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장부의 내용을 들여다본 데 마레 추기경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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