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5화> 내 탓이 아니야 (477/733)

<제95화> 내 탓이 아니야2021.10.31.

16600824992457.jpg

  아라벨라는 유유히 복도로 나가, 관심 없는 척하며 2층을 한 바퀴 싹 돌아보았다.

16600824992701.jpg‘없다!’

그 어디에도 이사벨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사벨라의 방 안에서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고, 루크레치아가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1층 방도 고요했다. 소녀들의 응접실과 어머니가 원래 쓰던 2층의 안방 앞에서도 얼쩡거려 보았으나 그곳에도 역시 언니와 엄마 모두 없었다.

16600824992701.jpg‘그럼 됐어, 들어갑니다아.’

아라벨라는 마지막으로 하녀들이 있나 없나 까지 주의 깊게 살핀 후 이사벨라의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사벨라는 요새 수수한 드레스만 입고 화장도 연하게 하고 다녔지만, 하던 가락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화장대는 여전히 값비싼 화장품들과 기기묘묘한 화장 도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6600824992701.jpg‘진짜 예쁘다!’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의 방에 잠입한 목적도 잊고 이사벨라의 화장대에 놓인 장미 볼연지를 집어 들었다. 아라벨라는 볼연지를 엉뚱하게 입술에 발라보고는 그 여리여리한 발색에 감탄했다. 거울 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좀 이사벨라 언니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다 큰 아가씨 같기도 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16600824992701.jpg‘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한참을 거울 속 자기 모습에 도취해 있던 아라벨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이사벨라의 화장대 근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감쪽같이 도로 넣어 놓을 수 있도록 물건을 뺀 순서를 기억하는 손놀림이었다.

16600824992701.jpg‘어디 보자, 이 근처였던 거 같은데…….’

화장대 아래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하나씩 뒤지던 아라벨라의 손에 이사벨라의 부분가발이 잡혔다.

16600824992701.jpg‘찾았다!’

이사벨라와 아라벨라의 머리카락 색깔과 꼭 같은 밝은 아마빛의 인모 가발 끝에는 가발을 두피 근처에 고정시킬 수 있도록 만든 물렁물렁한 철제 죔쇠가 달려 있었다. 아라벨라는 그 철제 죔쇠를 빛에 비추어 보았다. 거무튀튀한 색이었지만 빛을 받은 부분은 유난히 하얬다. 아라벨라는 철제 죔쇠를 구부렸다가 도로 일자로 펴보았다.

16600824992701.jpg‘은을 주로 하고……. 납을 섞은 건가?’

그 크기의 금속조각치고는 무게가 유독 무거웠다. 납이 들어갔을 때의 특성이었다. 금속의 무른 정도도 아리아드네의 방에서 본 것과 거의 같았다.

16600824992701.jpg‘이거 맞는 거 같다. 아리 언니한테 가져다 줘야지!’

아라벨라는 철제 죔쇠를 보고 좋아할 아리아드네를 생각하며 자기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귀한 댁 영애들이 입는 실내용 드레스에는 주머니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아라벨라는 철제 죔쇠가 달린 인모 가발 한 조각을 손바닥 안에 쥔 채 잽싼 손놀림으로 다시 이사벨라의 물건들을 원위치시키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높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천장을 울렸다.

16600824992735.jpg“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16600824992701.jpg“으악!”

아라벨라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꿇어앉은 아라벨라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이사벨라가 우뚝 서 있었다.

16600824992735.jpg“배신자가 말이야. 굴러온 돌한테 가서 붙었으면 거기에나 착 붙어 있을 것이지, 이제 쥐새끼처럼 내 방에까지 기어들어 와서 물건을 뒤져?”

아라벨라는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느끼며 몸을 납작 숙였다. 변명을 해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사벨라가 이렇게 성질이 뻗쳤을 때는 빨리 도망가는 게 최고였다.

16600824992701.jpg“미, 미안……. 다시는 안 뒤질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사과였다. 왜냐하면 분명히 다시 뒤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암. 하지만 이사벨라와의 거리가 멀어진 지금, 큰언니는 조금 남처럼 느껴졌다. 남의 물건을 뒤진 것은 객관적으로 나쁜 짓이다. 그래서 아라벨라는 저런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사벨라도 평소와는 다른 아라벨라의 사과에서 이상한 기색을 느꼈는지, 뱀처럼 집요하게 아라벨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16600824992735.jpg“뭘 훔쳐 가려고 뒤진 거야.”

아라벨라는 보통 이사벨라에 방에 들어오면 화장품 선반을 싹 쓸고는 했다. 색조화장품이 아라벨라의 최우선순위였다. 오늘 이사벨라의 화장품 선반은 비교적 깨끗했다. 뚜껑이 열렸다 닫힌 장미 볼연지를 제외하고는 손댄 것이 없었다.

16600824992701.jpg“아, 아무것도.”

아라벨라는 턱짓으로 이사벨라의 화장품 선반을 가리켰다.

16600824992701.jpg“깨끗하잖아.”

이사벨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화장품 선반과 아라벨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라벨라는 이사벨라가 고민하는 새를 틈타 재빨리 도망치기로 했다.

16600824992701.jpg“나, 난 이만 가볼게. 언니 미안!”

아라벨라가 얼른 후다닥 몸을 일으켜서 이사벨라의 방문 쪽으로 도망치는 와중에 이사벨라의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아라벨라의 귀를 찔렀다.

16600824992735.jpg“잠깐, 너 손에 쥔 거 그거 뭐야.”

아라벨라의 꽉 움켜쥔 왼쪽 주먹 안에서 머리카락 서너 가닥이 삐져나와 있었다. 밝은 금색의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화려하게 반짝였다. 아라벨라의 동공이 긴장으로 커졌다.

16600824992701.jpg‘이걸 그냥 내줘?’

순간 고민한 아라벨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이대로 나가면 다시 이사벨라의 방에 잠입할 기약이 없었다. 게다가, 이걸 내준다고 이사벨라가 아라벨라를 순순해 보내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못해도 몇 시간 동안 벌을 세우고 패악을 부린 후에야 풀어줄 것이다. 그러느니…….

16600824992701.jpg‘도망치자!’

아리아드네가 귀가한 다음에는 이사벨라는 아라벨라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방문을 잠그고 숨어 있든 저택 구석에 박혀 있든 시간을 때우면 아라벨라의 승리다. 아라벨라는 대뜸 문을 향해 달렸다. 이사벨라는 거칠게 외쳤다.

16600824992735.jpg“너 거기 안 서? 가만 안 둔다!”

아라벨라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2층 서쪽 날개의 복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살쾡이처럼 민첩하게 아라벨라의 뒤를 따라붙었다. 이사벨라는 아라벨라의 뒤를 쫓으며 아라벨라 손아귀의 머리카락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고서야 여동생이 뭘 훔쳐 갔는지 깨달았다. 머리카락이 달린 것을 보고 처음에는 보석 머리핀 같은 것을 집어간 줄 알았다. 하지만 흘러나온 머리카락의 양을 보니 저건 인모 가발이었다.

16600824992735.jpg‘잠깐만, 쟤가 저걸 왜 들고 가?’

인모 가발 전체도 아니고, 인모 가발 딱 한 조각이었다. 가발 한 피스로는 치장에 쓸 수도 없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샘플이나 증거를 주려고 가져가는 것 같지 않은가. 하필 아라벨라가 달리는 방향은 아리아드네의 처소 방향이었다. 이사벨라는 비로소 아라벨라가 저 인모 가발을 왜 가져가는지 깨달았다.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아리아드네의 옷에 장난질을 쳐놨던 그 철제 죔쇠의 증거를 찾아다 주려는 게 틀림없었다. 아리아드네의 옷에 달아두었던 후크는 인모 가발 장식에서 영감을 얻어 납 함량을 높인 똑같은 금속으로 만들었던 물건이었다.

16600824992735.jpg“이 쥐새끼가!”

저 물건이 들키면 큰일 난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미 이사벨라가 가면무도회에서 아리아드네의 평판을 망치려 들었던 일로 그녀를 석 달 동안이나 근신시켜 놨던 차였다. 결국 아리아드네에게 별일이 안 일어났는데도 그랬다. 그 기준으로 본다면 아리아드네의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아리아드네 드레스의 가슴팍을 찢어버린 것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16600824992701.jpg‘죽어도 안 돼! 들키면 큰일 나!’

이사벨라는 데 마레 대저택의 중앙 계단 근처에서야 막냇동생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16600824992735.jpg“거기 서!”

  - 덥석! 이사벨라는 중앙 계단이 시작하는 꼭대기에서 아라벨라의 손목을 움켜쥐는 데에 성공했다.

16600824992735.jpg“그거 내놔.”

16600824992701.jpg“시, 싫어!”

16600824992735.jpg“당장 내놔, 이 쥐새끼야!”

16600824992701.jpg“싫다고!”

이사벨라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라벨라의 왼손 주먹을 강제로 잡아 열려고 손톱으로 잡아 뜯으며 고함을 질렀다.

16600824992735.jpg“넌 도대체 누구 동생이야? 굴러온 돌에 붙어서 친언니 인생을 망치려 들어?”

아라벨라도 할 말이 있었다. 이사벨라가 왜 기겁했는지 전혀 모르는 아라벨라 입장에서, 지금 사태는 욕심 사나운 이사벨라가 고작 인모 가발 한 조각을 나누어 쓰기 싫어하는 상황에 불과했다.

16600824992701.jpg“친언니면 친언니답게 굴든가! 언니가 나한테 잘해줘? 나랑 놀아줘? 맨날 소리 지르고 욕하기나 하고, 국왕 폐하라도 그렇게 굴면 폭군이야!”

아라벨라는 정치학 시간에 가정교사에게 배운 어려운 단어를 끼워 넣어 보았다. 그건 이사벨라의 화를 돋웠다.

16600824992735.jpg“쥐방울만 한 게 어디서 개겨……!”

이사벨라는 철제 죔쇠를 강제로 뺏으려던 것을 포기하고 아라벨라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아라벨라를 때리려고 높이 치켜들었다.

16600825021894.jpg

  루크레치아가 아랫사람들을 때릴 때 항상 취하는 자세였다.

16600824992701.jpg“어, 어?”

이사벨라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빼려고 있는 대로 힘을 주고 있던 아라벨라는 갑자기 자기를 붙들고 있던 이사벨라의 손이 사라지자 자신이 평형을 잃은 것을 느꼈다. 아라벨라는 뒤로 넘어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팔을 허우적댔다. 그들은 데 마레 대저택의 중앙 계단 시작점에 서 있었다. 아라벨라가 아리아드네가 산 카를로의 추기경 관저로 왔던 첫날, 이사벨라를 밀어 떨궜던 바로 그 계단이었다.

16600824992701.jpg“어으아아아!”

아라벨라의 손짓이 점차 격해지고 있었다. 아라벨라는 팔을 허우적대며 뒤로 넘어가려는 무게중심을 필사적으로 잡았다. 중심을 잡느라 급한 아라벨라의 왼손 주먹이 느슨해졌고, 아라벨라의 주먹 안쪽에서 금빛 머리카락에 연결된 철제 죔쇠가 반짝 빛났다. 아라벨라의 시선이 이사벨라의 시선과 마주쳤다. 이사벨라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뒤로 넘어가려는 아라벨라를 잡아주느냐, 아니면 저 철제 죔쇠를 뺏느냐. 이사벨라의 선택은 간명했다. - 덥석! 이사벨라는 본능적으로 아라벨라의 손아귀에서 철제 죔쇠를 잡아챘다.

16600824992701.jpg“어, 어?!”

왈칵 달려든 이사벨라 때문에 간신히 유지하던 무게중심을 놓친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와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 그대로, 계단 뒤로 넘어갔다.

16600824992701.jpg“으아아아아아악!”

  - 쾅! 이사벨라는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먼저 나고, 그 뒤로 바닥에 떨어지는 쿵 소리가 날 줄 알았다. 일전에 그녀 자신이 계단에서 굴렀을 때는 그랬다. 하지만 아라벨라가 떨어진 뒤에는 몹시 크고, 대리석 마루를 강하게 울리는 단 한 번의 충격음만 들렸다. 이사벨라는 얼른 난간에 매달려 아래층의 상황을 내려다보았다. 아라벨라가 뒤통수를 1층 대리석 마루에 대고 그림 같은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부딪힌 다음에는 단말마조차도 지르지 못했다. 미동 따위도 없었다.

16600824992735.jpg‘피? 피가 나나?’

식겁한 이사벨라가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이사벨라가 선 위치에서 선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16600824992735.jpg‘죽은 건 아니겠지?’

이사벨라는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이사벨라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여부였다. 다행히도 아무도 아라벨라가 떨어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이사벨라는 간신히 근신에서 풀려난 차였다. 그녀는 지금 더 이상의 트러블을 감수할 처지가 못 됐다.

16600824992735.jpg‘내가 아라벨라를 밀었다고 누가 모함하면 아버지는 그걸 믿어버리실 거야!’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번에야말로 수녀원행이었다. 귀족 가문에서 여식을 수녀원에 보내버리는 것은 사형선고나 매한가지였다. 불구거나 백치인 딸이 있는 경우, 여식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추문이 있는 경우, 지참금을 대 줄 돈이 없는데 딸이 지나치게 많은 경우에는 딸을 수녀원으로 보냈다. 많은 경우 한 번 수녀원에 들어가면 가족조차도 찾아오지 않았고,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안에서 가족에게 버려진 여자들은 삯바느질을 해서 자기가 먹을 식량과 땔감을 구했다.

16600824992735.jpg‘안 돼, 그렇게 살 수는 없어.’

목격자가 없더라도 누군가가 이사벨라와 아라벨라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으면 끝장이었다. 둘이 싸웠다. 아라벨라가 계단 위에서 1층으로 떨어졌다. 왜 떨어졌을까. 이사벨라의 손바닥에 송골송골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급히 자기 매무새를 점검했다. 아라벨라가 자기를 할퀸 자국 같은 싸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구겨진 옷을 탁탁 털어서 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얼른 넘겨 정리했다.

16600825024626.jpg- “2층 물걸레질할 시간이야, 어서 올라가자.”

16600825024626.jpg- “오늘 제 담당은 동쪽 방이죠?”

1층의 부엌에서 하녀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사벨라의 눈이 커졌다. 여기 서 있는 이 상황 자체를 들키면 안 됐다. 그녀는 등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맵시 있는 발걸음으로 2층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자세는 발랐지만 발걸음은 몹시 쟀다. 서둘러서 자기 방으로 돌아온 이사벨라는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걸었다. 어차피 요사이 데 마레 추기경이 집에 있을 시간에는 이사벨라는 항상 문을 잠그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고는 했다. 그래, 아무 일 없었어. 평소와 똑같은 오후일 뿐이야. 아무 일 없었어.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이사벨라는 화장대로 달려가 인모 가발이 담긴 상자를 집어 들어 상자째로 방에 붙은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종이 상자에 벽난로의 불이 옮겨붙어 화르륵 타올랐다. 이사벨라는 그 위에 아라벨라의 손에서 빼앗아 온 인모 가발 조각 하나도 같이 던졌다. 머리카락에 불이 옮겨붙어 오징어 타는 냄새가 방 전체에 매캐하게 번졌다. 저게 모두 타고 나면 이사벨라는 재까지 싹싹 긁어 마당 한 편에 묻어버릴 것이다. 이사벨라는 환기를 시킬 생각조차 못 한 채 우두커니 서서 타오르는 벽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