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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복수의 다짐 (479/733)

<제97화> 복수의 다짐202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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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의 손톱자국 남은 손을 다시 제 자리에 곱게 올려놓았다. 고사리손 두 개를 예쁘게 교차시켜 놓고 아라벨라의 뺨을 한 번 더 쓸어내려 주었다. 살아 있을 때의 감촉과는 달랐지만, 다시는 만지지 못할 뺨이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단상 위에 서서 몸을 홱 돌렸다. 그녀의 눈에서 이글대는 분노가 타올랐다.

1660082513077.jpg“이 아이가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아리아드네가 제일 먼저 질문한 대상은 공손히 시립하고 있던 집안 하녀였다. 아라벨라를 처음 발견했다던 하녀여서다.

16600825130774.jpg“조, 조금 소란했는데, 쿵!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까 아라벨라 아가씨께서 바닥에…….”

아리아드네는 차갑게 비웃었다. 사람이 혼자 떨어질 리가 있나.

1660082513077.jpg“떨어지시기 직전에 이사벨라 아가씨와 싸운 것 아니냐.”

이사벨라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 뒤로 곧바로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는 깜짝 놀란 채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16600825130783.jpg‘저 계집애가 어떻게 알았지?’

16600825130787.jpg‘밖에 나가 있다가 지금 막 귀가했잖아! 누구한테 들을 새가 있었나? 아니, 애초에 목격자가 있었나?’

아리아드네는 눈빛 교환을 하는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 모녀를 보더니, 단상 위에서 망설임 없이 내려와 성큼성큼 이사벨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사벨라의 뺨을 갈겼다. - 짝! 무방비로 얻어맞은 이사벨라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홱 돌아갔다. 그녀는 왼뺨을 그러쥐고는 아리아드네에게 원망하는 눈길을 던지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16600825130787.jpg“뭐 하는 짓이야!”

아리아드네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고 마주 소리를 질렀다.

1660082513077.jpg“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16600825130787.jpg“무슨 소리 하는 거야?!”

1660082513077.jpg“네가 아라벨라를 밀었잖아!”

16600825130787.jpg“!”

아라벨라는 이사벨라와 몸싸움을 하다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행위는 살인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완전범죄라고 생각했다.

16600825130787.jpg“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뭘!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모함을 할 수가 있어?!”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금수만도 못한 이사벨라에게 일갈했다.

1660082513077.jpg“너!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를 강제로 잡아서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이사벨라는 가기 싫어 몸부림을 쳤지만 괴력이라도 생긴 듯한 분노한 아리아드네의 악력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이사벨라를 끌고 간 곳은 아라벨라가 누워 있는 관 앞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의 손을 들어올려 이사벨라의 눈앞에 댔다. 다친 지 얼마 안 되는 손톱자국이 보였다.

1660082513077.jpg“이 집에서 너 말고 누가 감히 아라벨라한테 손톱자국을 낼 수 있겠어?”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얼굴 코앞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고 으르렁댔다.

1660082513077.jpg“네가 아라벨라와 싸우다가 수틀리니까 밀어 버린 거잖아. 그래놓고 애가 혼자서 놀다가 떨어져? 끔찍한 모함? 이 금수만도 못한 것아!”

이사벨라는 단 하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었다.

16600825130787.jpg“내가 밀었다고? 네가 봤어?”

봤다. 하지만 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가 잠시 침묵한 사이 기세를 타서 발악을 했다.

16600825130787.jpg“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이사벨라의 적반하장에, 아리아드네는 거칠게 답했다.

1660082513077.jpg“아라벨라의 시체가 증거야!”

16600825130787.jpg“그건 손톱자국일 뿐이라고!”

이사벨라는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16600825130787.jpg“그래, 내가 오전에 아라벨라와 좀 싸운 건 사실이야. 손톱자국은 그때 났어. 하지만 싸운 장소는 내 방이고! 난 계단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어!”

과연 이사벨라였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서 방어하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대는 말들은 지금으로서는 어차피 거짓이라고 증명할 수가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목격자는 없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16600825130787.jpg“아리아드네! 네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애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어떻게 이런 지독한 모함까지 할 수가 있니?”

이사벨라는 태세를 전환해 데 마레 추기경에게 상체를 돌린 채 아버지를 상대로 가련하게 호소했다.

16600825130787.jpg“아버지, 아라벨라는 제 친동생이에요. 저는 이렇게 다짜고짜 살인자라고 욕먹을만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사벨라는 다시 아리아드네에게 몸을 돌려 간곡하게 물었다. 그녀의 자수정 색 눈이 반짝였다.

16600825130787.jpg“아리아, 넌 내가 그렇게 미워?”

1660082513077.jpg“아리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 썩어빠진…….”

아리아드네가 가증스러운 이사벨라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오른손을 위로 올리며 뭐라고 퍼부으려던 순간, 데 마레 추기경이 나섰다.

16600825142507.jpg“아리아드네. 거기까지 해라.”

아리아드네는 추기경을 홱 돌아보았다. 추기경은 침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16600825142507.jpg“네가 아라벨라의 일로 크게 상심한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아라벨라와, 너와 마찬가지로 이사벨라도 가족이야. 고작 그 정도의 증거로 이사벨라가 아라벨라를 죽였다고 펄펄 날뛰는 건 너답지 않아.”

아리아드네는 이를 악물었다. 추기경의 말이 맞기야 맞았다. 아리아드네는 항상 순종하는 딸이었다. 회귀 전에는 당연했고, 회귀 후에도 겉으로는 합리와 이성의 가면을 쓴 채 아버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거였다.

1660082513077.jpg“가족이면 가족처럼 지켜줘야지요!”

아리아드네는 거칠게 추기경을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1660082513077.jpg“나다운 게 뭔데요, 아버지?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굽신굽신 다 넘기는 거? 무슨 일이 일어났든 다 양보하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이해하는 거?”

그녀는 속사포처럼 퍼부었다.

1660082513077.jpg“그 결과가 뭔데요! 그러다가 아라벨라가 죽었지 않습니까!”

16600825142507.jpg“불행한 사고였다!”

데 마레 추기경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마주 높였다.

16600825142507.jpg“증거가 없지 않으냐!”

1660082513077.jpg“아버지께서 있는 증거를 보지 않으려 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데 마레 추기경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

16600825142507.jpg“막내는 이미 죽었고 네가 지금 몰아붙이는 네 언니는 살아 있어! 가족끼리 어디까지 갈 테냐!”

1660082513077.jpg“하!”

아리아드네는 코웃음을 치며 데 마레 추기경을 비웃었다.

1660082513077.jpg“이 상황에서도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잘난 ‘데 마레 가문’에 갈 충격파를 가늠하시는 건가요? 막내는 이미 죽었으니 되살릴 수 없지만, 큰딸이 막내를 죽였다고 소문이 나면 큰딸까지 잃는 거니까요!”

데 마레 추기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이때 루크레치아가 끼어들었다.

16600825130783.jpg“거기까지가 제 명이었나 보지.”

아리아드네의 입가에 분노의 흔적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흐려진 아라벨라의 시야, 아라벨라에게 들린 마지막 단어들.

16600825130783.jpg- “제 언니에게 대들더니 자업자득이다.”

16600825130783.jpg- “잘하는 것도 없는 게 허구한 날 사고만 치고! 진짜 내가 너를 왜 낳았을까? 속상해 진짜!”

16600825130783.jpg- “너만 없었어도 내 인생이 이거보다는 나았어! 이거보단!”

아라벨라는 저 끔찍한 폭언 중 그 어느 하나라도 들을 만큼 잘못한 것이 없다. 루크레치아는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한다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전혀 다하지 못했다. 아라벨라가 마지막으로 보고 들은 것은 결코 저딴 이야기들이어서는 안 됐다. 아리아드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1660082513077.jpg“야!!!”

그녀는 루크레치아에게 덤벼들었다. 빛살같이 덤벼들어 가시같이 마른 팔뚝으로 루크레치아의 멱살을 잡은 아리아드네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1660082513077.jpg“네가 어미야! 네가 사람이야! 세상에 운명이 어디 있어! 세상에 그런 개 같은 운명이 어디 있어! 정해진 대로만 살다가 가는 게 삶이야? 말도 안 돼! 절대 납득 못 해!”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에게 매달려서 오열하듯이 절규했다.

1660082513077.jpg“아라벨라의 운명은 절대로 저따위가 아니야! 열 살에 죽어버리는 운명 따위가 아니라고! 아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불운하게 태어나면 그냥 ‘분수에 맞게’ 살다가 죽어야 돼? 노력을 해도, 열심히 해도 바뀌지 않는 게 어디 있어! 난 용납 못 해!! 다 바꿔버릴 거야!!”

데 마레 추기경이 집사 니콜로에게 눈짓을 했다. 하인들을 데려와서 아리아드네를 알아서 치우라는 거였다. - 사그락. 아리아드네의 울부짖음만이 대회랑을 메우고 있는 와중에 하인들 서너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기색을 알아차린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를 붙들고 있던 손을 던지고 추기경 바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660082513077.jpg“아버지. 다 보여요. 지금 둘째 딸이 컨트롤이 안 되고 있다, 저 둘째를 믿을 수 있을까 머리 굴리시는 거요.”

그녀는 눈과 눈을 마주하고 똑바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1660082513077.jpg“막내를 죽인 첫째보다 그 첫째에게 화내는 둘째가 더 컨트롤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아버지는 지금 상황판단 크게 잘못하시고 계신 겁니다. 누구한테 배팅할지 고민 제대로 해보시지요.”

아리아드네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명령받은 대로 움찔움찔 다가서고 있던 집사 니콜로와 그 휘하의 하인들을 싸늘하게 일별했다.

1660082513077.jpg“가까이 오지 마. 내 발로 올라가.”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돌려 남아 있는 집안 식구들에게 선언했다.

1660082513077.jpg“내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장차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아라벨라에게 손댄 자들은 지옥에 처박고 말 것입니다. 그 반대급부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치 않습니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사벨라와 루크레치아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1660082513077.jpg“죗값을 치를 준비나 하시지!”

아리아드네는 발을 구르며 대회랑을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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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마레 추기경은 엉망인 집안 꼴에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 * * 데 마레 추기경은 둘째 딸의 ‘아라벨라에게 손댄 자들을 지옥에 처박고 말겠다’라는 선언이 아라벨라의 사인을 정확하게 규명해서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리겠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기경은 반쪽뿐인 합리의 세계만을 헤아리고 있었다. 시간을 넘어온 아리아드네에게는 증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황금률이 그녀에게 진실을 보여주었다. 받아내어야 할 것이 얼마인지는 모두 계량되었다. 핏값의 집행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방에 들어와서 분노에 불타는 얼굴로 그녀를 따라 들어온 산차에게 중얼거렸다.

1660082513077.jpg“산차, 네 혈육인 말레타 얼굴을 보고 싶으면 미리 봐 두어라.”

산차가 조심스레 물었다.

16600825157945.jpg“아가씨, 말레타는 갑자기 왜요?”

1660082513077.jpg“난 아라벨라의 목숨값을 받아내고야 말 거야. 거기서부터 터진다. 말레타는, 아니 이폴리토는 균열이자 약한 고리이고, 루크레치아의 업보가 터진다면 이폴리토 때문에 저지른 악행에서 터질 거야.”

아리아드네는 손에서 피가 나도록 이불잇을 움켜쥐었다.

1660082513077.jpg“피와 살점이 터질 거야. 살육의 잔치가 열린다.”

16600825130774.jpg- “포르토 상인의 고사를 알고 있나? 순살코기 1 파운드. 살만 가져갈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채권 추심이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린다면 그것은 새로운 죄. 내가 받아내야 할 것을 다 받아낼 수는 없어. 손해 보더라도 착하게 살아라.”

아리아드네는 집시 여인의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1660082513077.jpg‘내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받아낼 것은 모두 받아내고야 말 거야! 금화를 가득 안고 복수에 성공한 길 잃은 혼이 고분고분 착하게 굴어 천국에 들어가는 바보 같은 영혼보다 백번 낫다!’

복수를 다짐하고 나자 밀려 들어온 것은 상실감이었다.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를 산 채로 뜯어 그 피를 마시더라도 아라벨라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라벨라의 웃음, 아라벨라의 작은 손, 아라벨라의 고집, 아라벨라의 체온. 그리고 가장 진하게 남는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1660082513077.jpg‘나 때문에. 나한테 철제 죔쇠를 가져다주려고. 도대체 나 따위가 뭐라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조금만 더 단호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무리를 해서라도 루크레치아를 독살하고, 이사벨라를 영영 수녀원에 처박았다면 아라벨라는 아직 살아 있을 텐데……! 1023년 2월 1일. 아라벨라가 죽은 날. 원래 자기 명보다 약 9개월 덜 살았다.

1660082513077.jpg‘내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아라벨라는 9개월여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기껏 회귀까지 했는데, 사랑하는 타인의 삶을 더 좋게 바꿔줄 수 없었다. 아니, 도리어 해를 끼쳤다. 아리아드네는 오랜만에 무력감에 휩싸여 방에 틀어박혀서 기운이 다할 때까지 울었다.

1660082513077.jpg‘과연 운명이라는 물건을 바꿀 수는 있는 걸까……?’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아리아드네는 그녀가 바꾸었던 미래들을 생각했다. 이미 죽어버렸어야 했을 산차는 그녀의 옆에 있었고 10년은 더 악행을 저질렀을 잔 갈레아초 할멈은 온데간데없었다.

1660082513077.jpg‘할 수 있어.’

그녀는 다짐을 되새겼다. 할 수 있었다. 해내야만 했다. 오늘까지만 슬퍼하고 내일은 일을 할 것이었다.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는 죗값을 치를 것이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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