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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화> 넘지 말아야 할 선 (490/733)

<제108화> 넘지 말아야 할 선2021.12.15.

16600825841468.jpg“라리에사 드 발로아.”

  알폰소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생생한 분노가 느껴졌다.  

16600825841468.jpg“선 넘지 마시오.”

  라리에사는 생경한 알폰소 왕자의 태도에 더럭 놀라 그의 앞에서 부리려던 강짜를 멈췄다. 하지만 그의 말이 너무나 서운했다! 선을 넘지 말라니!  

16600825841477.jpg“지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는 건가요? 나는 당신의 비가 될 여자예요! 두 왕국이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요!”

16600825841468.jpg“그리고 그 계약서의 서명란은 아직 비어 있지.”

  알폰소는 라리에사에게 하려고 했던 더 험한 말을 잇새로 악문 채, 정제된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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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0825841468.jpg“당신이 뭐라도 된 듯이 굴지 마.”

  충격받은 라리에사는 비틀, 균형을 잃었다. 이곳은 사암으로 만든 돌 건물이었고 쓰러진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알폰소는 팔짱을 낀 채 라리에사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6600825841477.jpg‘세상에, 내가 쓰러질 뻔했는데 잡아주지도 않았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라리에사는 오직 알폰소 왕자를 만나기 위해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드높은 프리노약 산맥을 넘어 에트루스칸 왕국까지 왔다. 그녀는 귀한 신분이기도 했다. 왕가의 직계는 아니지만 아마 이번 협상으로 인해 그녀에게는 왕위계승권마저도 인정될 것이다. 원칙적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는 자는 국경을 넘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와 닿자 라리에사는 분노가 폭발했다.  

16600825841477.jpg“우리는 맺어질 운명이고! 나의 아버지이자 왕가의 충성스러운 수호자인 외드 대공과 갈리코의 국왕 폐하이신 필리프 4세께서 그걸 원하셔요!”

  결혼 협상에서 에트루스칸 왕국이 제시한 교섭조건에 대해서는 그녀도 들은 바가 있었다.  

16600825841477.jpg“에트루스칸이 정녕 갈리코의 화포 없이 중앙 대륙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나요?”

  - 쾅! 사암으로 지은 타란토 겨울 궁전의 복도가 깨질 듯한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차마 여자를 때리지는 못한, 분노한 알폰소가 발을 구른 것이다.  

16600825841468.jpg“라리에사 드 발로아.”

  그는 매섭게 라리에사 대공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16600825841468.jpg“너는 군주의 딸이 아니고 협상장에 올라온 카드에 불과해.”

  라리에사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나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종류의 시시껄렁한 대사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결국 내 것이 될 텐데 의미 없이 뻗대지 마라’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라리에사는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알폰소를 바라보았다.  

16600825841468.jpg“에트루스칸 왕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의 그 잘난 아비는 물론이고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당신의 8촌 오라버니인 필리프 4세조차도 언감생심이야.”

  발로아 대공이나 갈리코의 국왕일지라도 에트루스칸의 왕위계승권자에게 명령, 아니 협박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16600825841468.jpg“주권국은 타국에게 종속되지 않아. 일국의 주권은 군주만이 대표할 수 있어. 나의 군주도 아닌 네가, 그렇다고 나의 백성조차도 아닌 네가, 그 어떤 알량한 권위를 등에 업더라도 에트루스칸은 이래야 한다, 에트루스칸은 저래야 한다, 나에게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해.”

  알폰소는 분노로 파랗게 빛나는 눈으로 라리에사를 노려보았다.  

16600825841468.jpg“내가 대공녀를 지금 당장 곤장을 쳐서 국경 밖으로 내쫓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 당신이 에트루스칸의 손님이기 때문이고, 둘째로, 내가 당신을 안쓰럽게 여기기 때문이오.”

  알폰소는 라리에사를 거절하기로 결심한 이후로,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라리에사는 그와의 혼담을 믿고 이 먼 타국까지 건너왔다. 혼담이 성사되지 않고 돌아간다면 그녀는 명예에 흠집이 나리라.  

16600825841468.jpg“이 알량한 동정심이 사그라들기 전에 내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라고, 다음번에 우리가 만날 때에는 ‘선’이 어딘지 제대로 숙지하고 오시길 바랍니다.”

  알폰소는 라리에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16600825841468.jpg“아직 내 약혼녀가 아닌 라리에사 드 발로아 대공녀님.”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복도를 떠났다. 타란토의 붉은 사암으로 만든 겨울 궁전의 복도에는, 망연자실한 처녀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 * * 말레타가 약속했던 ‘놀라운 비밀’은 도통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말레타가 말을 아끼려고 해서가 아니라, 강약조절을 못 해서 모두 한 번에 쏟아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16600825849059.jpg“이사벨라 아가씨는 요새 거래하시는 의상실이 없어요. 아, 의상실이 있긴 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사시고……. 콜레지오네 의상실과 거래를 하시다가 거절당하시자 얼마나 화를 내시는지! 감금당하기 직전에는 그나마 알페토로 옮기신 것 같았는데, 발데사르 후작영애가 알페토 단골이라 시간대가 겹치면 예약을 안 받아줘서 화를 내셨어요! 아, 감금당하신 이후로는 방에서 패악을 부리신다고는 하는데 전 일부러 그 근처로 안 가서…….”

횡설수설해서 알아듣기 힘들었고, 귀를 열고 듣는다손 치더라도 별 영양가가 없었다.

16600825849059.jpg“이사벨라 아가씨는 가슴이 작아요. 가슴 주머니로 만든 거고 순 다 뽕이에요!”

간혹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16600825849059.jpg“이폴리토 도련님은 엉덩이를 좋아하세요. 제가 엎드려서 이렇게 엉금엉금 기어가면…….”

전적으로 불필요한 정보도 있었다. 오라비의 잠자리 취향이라니, 아리아드네로서는 평생 몰라도 될 이야기였다. 산차도 뒤에서 표정을 찡그렸다.

16600825849059.jpg“이폴리토 도련님은 아버지가 달라서 그런지 거시기가 작아요. 아주 요만-해서 그걸 휘두르시면서 의기양양 해하면 아주 때리고 싶다니까요!”

대충 물 흐르는 대로 듣고 있던 아리아드네가 갑자기 말레타의 이야기를 끊었다.

16600825852781.jpg“잠깐만, 다시 말해봐.”

16600825849059.jpg“이폴리토 도련님은 거시기가 작아요……?”

말레타는 아리아드네가 구체적인 수치를 원하는 줄 알고 손을 들어 어림을 해 보였다. 반 뼘 정도 크기로 엄지와 중지를 벌리고 있는 말레타를 아리아드네가 다시 한번 제지했다.

16600825852781.jpg“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16600825849059.jpg“뭐였지……. 아, 이폴리토 도련님은 아버지가 다르다는 거요?”

16600825852781.jpg“그래! 그거.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말레타는 눈을 찡그렸다. 엄밀히 따지면 아무도 그녀에게 ‘이폴리토의 아버지는 데 마레 추기경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주워들은 이야기 중에서 말레타가 나름 재조합을 해냈던 것이었는데, 말레타는 본인이 정확하게 누구의 어떤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아리아드네의 눈치를 살폈다. 아리아드네 아가씨는 몹시 집중한 태세였다. 오늘 이 방에 들어온 이후 최초로 보여주는 흥미였다. 이건 잡아야 한다.

16600825849059.jpg“그게……. 이폴리토 도련님이랑 루크레치아 마님이 대화하는 걸 엿들었는데, 이폴리토 도련님이 ‘그래서 내 아버지는 누구야?’ 하시더라고요.”

이폴리토가 실제로 한 질문은 아라벨라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것이었지만, 말레타의 머릿속에서는 루크레치아의 대답과 섞여서 혼선이 왔다.

16600825849059.jpg“루크레치아 마님께서는 이폴리토 도련님을 철썩철썩 때리시면서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입 닥치고 살아!’와 비슷한 말을 하며 화내셨어요.”

디테일은 틀렸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해보면 그렇게 틀린 답만도 아니었다.

16600825852781.jpg“누군지는 못 들었어?!”

16600825849059.jpg“아뇨, 전 거기까지밖에…….”

아리아드네가 이것만 듣고 자기를 팽해버릴까 봐 무서워진 말레타는 까만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16600825849059.jpg“아가씨. 절 다시 저택으로 데려가 주시면 제가 이폴리토 도련님 옆에 착 붙어서 한 번 캐내 볼게요.”

아리아드네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말레타는 아직 자기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폴리토는 아마 다시는 말레타의 얼굴도 쳐다보고 싶지 않을 것이고, 루크레치아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살려서 집 밖으로 내보낸 것이 기적이다. 아리아드네는 말레타가 루크레치아의 새 하녀와 집안 장정들에게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차를 내보내면서 한 절반 정도의 확률로 말레타가 집 안에서 죽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16600825852781.jpg“넌 목숨이라도 건져서 그 집에서 나온 게 천운이야.”

아리아드네는 말레타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말레타는 이번에도 반 컵의 물에서 부정적인 면만 읽었다.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자기를 저택으로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말레타는 필사적으로 애걸했다.

16600825849059.jpg“아가씨께서 절 못 믿으실 수 있어요, 저도 이해해요. 하지만 전 아가씨께서 처음 데 마레 저택에 오셨을 때 적응을 도와드렸던 하녀잖아요? 이번에야말로 살뜰하게 챙겨드릴게요! 충성을 바칠게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충성심의 문제도 있기야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레타의 계획에서의 가장 큰 맹점은 말레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폴리토가 그녀를 옆에 두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레타의 착각을 굳이 교정해 줄 필요는 없었다.

16600825852781.jpg“조건이 있어.”

아리아드네의 말에 말레타는 고개를 들어 열정적으로 외쳤다.

16600825849059.jpg“네, 네! 뭐든지요!”

16600825852781.jpg“너, 데뷔탕트 무도회 때 내 후크가 터진 사건 기억나지.”

말레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리아드네는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얼굴에 띠운 채 말을 이었다.

16600825852781.jpg“인제 와서 널 징계하려는 게 아냐. 그거 이사벨라 언니의 짓, 맞지?”

여기까지라면 긍정할 수 있었다. 말레타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600825849059.jpg“맞습니다! 맞고요! 이사벨라 아가씨께서 아리아드네 아가씨가 쓰시는 ‘후크’에 손을 쓰셨어요! 마리아를 통해서 집어넣었지요!”

아리아드네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16600825852781.jpg“마리아도 한통속이었니?”

말레타는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16600825849059.jpg“아닙니다, 아니에요. 마리아는 그냥 추천받은 물건을 들고 갔을 뿐입니다. 걔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가져갔어요.”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여야 했다. 두 명이 있으면 몸값은 그만큼 떨어진다. 대체 불가능성이야말로 높은 인건비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특성 아닌가. 말레타는 어떤 측면에서는 머리가 매우 잘 돌아갔다. 그리고, 마리아가 자초지종을 몰랐다는 말은 사실이기도 했다.

16600825849059.jpg“이사벨라 아가씨가 ‘납을 섞은 은으로 후크를 만들어 오라’고 시키신 사실은 저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요!”

말레타는 ‘마리아는 이사벨라 아가씨의 옷자락 끝도 못 봤어요’라고 덧붙였다.

16600825849059.jpg“증언해 드릴게요. 데 마레 추기경 예하 앞에서 한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증언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웃었다. 말레타 이 친구, 말이 통하네.

16600825849059.jpg“대신, 절 이폴리토 도련님의 안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16600825852781.jpg‘……말이 통한다는 평가는 취소야.’

아리아드네는 이마를 짚을 뻔했다. 말레타는 욕심이 지나치게 많았다. 저것은 그녀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불가능했다. 이폴리토가 죽어도 싫다고 날뛸 것이야 자명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데 마레 추기경과 루크레치아 내외의 오랜 꿈은 이폴리토를 작위를 가진 상속녀와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야 데 마레의 이름으로 영원무궁한 영지와 작위가 생긴다. 데 마레 추기경 내외는 절대로 말레타를 이폴리토의 본부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말레타에게 곧이곧대로 다 알려줄 필요는 없다.

16600825852781.jpg“네 성과에 따라 결정하겠다.”

아리아드네는 활짝 웃었다.

16600825852781.jpg“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면 널 이폴리토 오빠와 결혼시켜야 한다고 아버지께 고하지. 나는 지금 집안의 장부 권한을 모두 들고 있으니 안주인이나 마찬가지야.”

하나의 거래에서 양자가 만족할만한 결과에 다다르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래야 거래가 지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양질의 거래를 계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거래처에나 들일 필요가 있는 수고였다. 아리아드네는 말레타와 그렇게 얼굴을 오래 맞댈 생각이 없었다.

16600825852781.jpg“증언을 어떻게 해야 추기경 예하를 잘 설득할지나 생각해 둬.”

아리아드네는 말레타에게 말했다.

16600825852781.jpg“집안에 네 자리를 만들어 줄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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