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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 (494/733)

<제112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목숨에는 목숨2021.12.29.

아리아드네는 스캄파 씨의 거실에 들어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집주인에게 인사했다.

1660082610264.jpg“스캄파 씨.”

허리를 깊숙이 숙인 아리아드네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1660082610264.jpg“저희 집 식솔의 행위로 따님께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조문조차 오지 않았다고 화를 냈지만 대귀족—혹은 그에 준하는 추기경의 가솔—이 직접 와서 평민인 그에게 허리를 숙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스캄파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16600826102649.jpg“갑,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일어나세요.”

그가 아는 대귀족이란 자기 멋대로 인사를 해 놓고는 인사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상대방을 참혹하게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급적 얽히지 않는 편이 좋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괴팍하게 구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16600826102649.jpg“이런 과공은 나도 원하지 않아요. 내 딸, 내 딸이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오.”

그의 희망 사항은 소박하되 이 상황에서는 가장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1660082610264.jpg“저도 그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 사람의 손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아리아드네는 스캄파 씨를 바라보았다.

1660082610264.jpg“핏값은 핏값으로 받으셔야 하는 법입니다.”

그녀의 짙은 초록색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1660082610264.jpg“저는 스캄파 씨께 알려드릴 일이 있어서 오늘 여기 왔습니다.”

부엌으로 달려간 스캄파의 노모가 허겁지겁 찻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난생처음 보는 높으신 분께 비굴하게 차를 올렸다. 아리아드네는 사양하려다가, 앞의 사람이 지나치게 손을 덜덜 떠는 것 같아 보이자 마지못해 찻잔을 받았다. 하지만 일단 받은 다음에는 미소지으며 차에 입술을 댔다. 표정은 자신만만했고 눈빛은 강렬했다.

1660082610264.jpg“데 마레 추기경께서 공식으로 발표하신 내용은 가짜예요.”

16600826102649.jpg“뭐라고요?”

1660082610264.jpg“죽은 하녀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고, 말이 와전되어 실수로 시체를 훼손한 것도 아닙니다. 의뢰인이 수급을 잘라오라고 시켰던 것이 맞습니다.”

16600826102649.jpg“이 무슨!”

스캄파 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16600826102649.jpg“이럴 줄 알았어! 그래놓고 금전을 주면서 나를 누그러뜨리려던 게지!”

하지만 아리아드네가 스캄파 씨를 제지했다.

1660082610264.jpg“다만 한 가지 두둔은 해야겠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셨어요.”

16600826102649.jpg“나보고 어쩌란 말이오!”

스캄파 씨는 울부짖었다.

16600826102649.jpg“당신네 일가가 내 일상에 들어온 이후로 되는 일이 없어! 쓸데없는 일거리가 생기더니, 사사건건 불평불만에, 이젠 내 딸까지 죽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추기경 본인은 몰랐으니 용서하라는 거요?!”

아리아드네는 침착하게 답했다.

1660082610264.jpg“그럴 리가요.”

그녀는 불타는 눈빛으로 스캄파 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맞았다.

1660082610264.jpg“따님을 죽게 만든 원흉에게 복수하셔야지요.”

아리아드네는 차를 옆의 협탁에 달칵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찻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에 스캄파의 노모는 깜짝 놀라며 움찔 떨었다.

1660082610264.jpg“목숨은 목숨으로. 핏값은 핏값으로.”

아리아드네는 스캄파에게 고정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1660082610264.jpg“스캄파 씨의 무남독녀를 죽게 만든 사람은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 루크레치아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이번 사건의 타겟을 명확하게 루크레치아로 잡았다. 이폴리토까지 도매금으로 엮을 수 있다면 최선이겠으나, 원흉이 두 명이라면 집중도가 떨어진다. 빨강머리 살인사건과 연관된 윗선이 누구냐는 점을 외부에 명확하게 알리고 싶다면 루크레치아를 선택하는 게 맞았다. 그녀는 최측근 하녀인 로레타를 내보냄으로 인해 부정할 수 없게 이 사건에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스캄파 씨는 새삼 분노가 밀려 올라오는지 소파에 앉아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리아드네는 신중한 눈빛으로 스캄파 씨를 바라보았다.

1660082610264.jpg“지역협동조합의 대표들은 현금을 받는 안을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돈은 없고 먹일 입은 많은걸요. 하지만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요. 목숨을 내놓으라고 협박해야 나오는 금화도 많아지는 법입니다.”

아리아드네는 낮은 목소리로 스캄파 씨에게 이야기했다.

1660082610264.jpg“내일, 파올라를 죽인 사람은 루크레치아라는 사실을 밝히고 루크레치아의 목숨을 원한다고 말하세요. 증거는 지역협동조합이 잡고 있는 그 하녀입니다. 루크레치아의 최측근이지요.”

아리아드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1660082610264.jpg“저는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에 왔다 간 사실은 절대로 비밀입니다. 하지만 스캄파 씨, 오늘 제가 말씀드린 대로 내일 진행하세요.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내 드리겠습니다.”

16600826102649.jpg“내가 원하는 결과가 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아리아드네는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1660082610264.jpg“피의 복수.”

아리아드네는 그리고 스캄파의 노모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1660082610264.jpg“그리고 최대한의 금화.”

아리아드네는 노모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1660082610264.jpg“손녀 따님의 일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많이 슬프시지요.”

스캄파의 노모는 당황해서 숨을 골랐다. 슬픈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1660082610264.jpg“금화는 필요 없고 목숨만 내놓으라고 하더라도, 데 마레 추기경 관저가 입을 씻진 않을 겁니다. 추기경 관저에서 내놓을 금화의 액수가 오늘 약속했던 300 두카토 밑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제가 약조하겠습니다.”

‘금화가 중하지 그깟 핏값을 받아서 어디다 쓰느냐’, 스캄파의 노모가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아들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16600826102649.jpg“그래, 높으신 분이 일 처리를 잘 해 주신다니 이 얼마나 좋으냐!”

아리아드네는 늙은 모자를 앞에 두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1660082610264.jpg“이만 가보겠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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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아드네는 흰 장미를 스캄파 씨에게 건네고 일어섰다. 순백색 장미는 존경, 겸양, 순수와 젊음을 뜻하는 조화(弔花)였다. 그녀는 두꺼운 로브를 걸치고 카스텔 라비코의 중산층 가옥을 나서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데 마레 추기경은 300 두카토(약 3억 원)에 만족한 유가족이 아니라 단호한 유가족과 성난 인파를 맞이하게 되었다.

16600826102649.jpg“우리는 핏값을 원하오!”

스캄파 씨와 두 지역협동조합의 대표들, 그리고 자경단원들은 데 마레 추기경 자택 앞에 몰려 들어와 분노를 터트렸다. 그들은 각종 고초를 겪은 게 틀림없는,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하녀 로레타를 끌고 왔다. 간밤에 문초의 실마리를 잡고 로레타를 몹시 괴롭힌 자경단원들은 쓸만한 진술을 받아낸 상태였다.

16600826102649.jpg- ‘파올라 스캄파와 함께 죽은 빨간 머리 하녀는 작은 주인 나리의 애를 뱄다.’

16600826102649.jpg- ‘루크레치아 마님은 그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16600826102649.jpg- ‘처음에는 쫓아내기만 하라고 하시더니, 마음을 바꿔 잡아 오라고 하셨다.’

진실은 여기까지였다. 두들겨 맞고 위협을 당한 로레타는 자기가 모르는 내용까지도 마구 주워섬겼다.

16600826102649.jpg- ‘말레타를 산 채로 잡았다면 죽이고도 남았을 것.’

16600826102649.jpg- ‘루크레치아는 이전에도 죽였던 하인과 하녀들이 아주 많다.’

16600826102649.jpg- ‘포악한 루크레치아는 머리를 모으는 취미가 있어.’

데 마레 추기경의 대저택은 사람들의 통행량이 많지 않은 호젓한 고급주택가에 있었지만 이 난리통이 소문 없이 넘어가기란 불가능했다. 일단, 카스텔 라비코의 중산층들과 코뮨 누오바의 빈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16600826102649.jpg- “이야기 들었어요?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가 사람을 죽였대요!”

16600826102649.jpg- “불쌍한 아가씨라던데!”

16600826102649.jpg- “성실하게 사는 친구네의 착한 딸이었지. 도대체 왜 죽인 겁니까?”

16600826102649.jpg- “추기경이 새 정부라도 들이려고 했대요?”

16600826102649.jpg- “그랬으면 억울하지라도 않게! 그 집 아들내미가 하녀를 건드렸는데, 그 하녀를 죽이려다가 사람을 잘못 봐서 봉사활동하고 돌아오던 그 아가씨를 죽였다지 뭐요!”

16600826102649.jpg- “세상에, 악독해라!”

16600826102649.jpg- “아무리 하녀라지만, 자기 아들 애를 밴 하녀를 죽여요?”

16600826102649.jpg- “정실부인이 아니라 첩이니까 행실이 그렇지!”

16600826102649.jpg- “자기도 그렇게 들어앉았으면서 자기 며느리는 그렇게 보기 싫었나 보지?”

16600826102649.jpg- “네? 데 마레 추기경의 정부도 그렇게 들어앉았어요?”

16600826102649.jpg- “자네는 젊은 데다 산 카를로 사람이라 모르나 보군! 이건 타란토 출신들만 아는 이야기인데, 루크레치아가 젊어서 배가 부른 채로 데 마레 추기경에게 시집을 갔어! 그때 낳은 자식이 지금 소문의 외아들인데, 자식 농사 잘못 지었네, 쯧쯧!”

16600826102649.jpg- “부모가 한 짓을 고스란히 했으니 자식 농사 잘못 지었다고 할 것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밭과 그 씨에 그 곡식인 거죠.”

16600826102649.jpg- “맞는 말일세, 에잉!”

그리고 이 이야기는 각 귀족 가문들에서 고용인으로 일하는 사람들과 귀족 가문과 거래하는 시장 상인들을 통해 상류 사회에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산 카를로에 남아 있는 하급 귀족들 및 상인들과 ‘봄의 축제’와 수태고지 미사 준비 때문에 만났다가, 그들이 자기에게 차마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의미심장하게 수군거리는 꼴을 당하고는 분통이 터져서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16600826124903.jpg“니콜로!”

집사 니콜로가 엄청난 저자세로 쭈뼛쭈뼛 기어 나왔다. 그는 책임지고 처리하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유가족 및 지역협동조합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못해서 몹시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는 눈치를 더럭더럭 보며 저기압인 데 마레 추기경을 맞이했다.

16600826102649.jpg“예, 추기경 예하.”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의 타깃은 집사 니콜로가 아니었다.

16600826124903.jpg“이폴리토더러 당장 내 서재로 올라오라고 해!”

16600826102649.jpg“예, 알겠습니다 예하.”

  * * * 이폴리토는 아버지가 자신을 부르자 잔뜩 긴장해서 2층 동쪽 날개에 위치한 데 마레 추기경의 서재로 향했다.

16600826124921.jpg‘내가 부랑자들과 접촉한 걸 알아채신 건가?!’

불길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6600826124921.jpg‘아니면 말레타가 내 애를 밴 걸 알게 되신 건가? 이건 내 애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야지. 걔가 누구랑 붙어먹었을지 어떻게 알아.’

이폴리토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따로 있었다.

16600826124921.jpg‘설마 내가 학위를 못 딴 걸 알게 되신 건 아니겠지?’

그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아버지의 서재에 노크했다. - 똑똑.  

16600826124903.jpg“들어와.”

데 마레 추기경의 짜증이 뚝뚝 묻어나는 음성이 이폴리토를 반겼다. 어찌나 퉁명스러운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이폴리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16600826124921.jpg‘설마 아버지께서 내가 자기 친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신 건가?!’

하지만 이폴리토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데 마레 추기경이 이폴리토에게 추궁한 것은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16600826124903.jpg“이폴리토 데 마레. 네가 네 엄마를 베르가모 농장에서 데려오면서 말했었지. ‘아버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이폴리토는 아버지가 자기를 성까지 다 붙여서 불렀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하느라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16600826124921.jpg“그, 그랬죠.”

16600826124903.jpg“네가 진다는 책임의 결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냐?”

16600826124921.jpg‘내가 언제 책임을 진다고 했지?’

어리둥절한 이폴리토를 앞에 앉혀놓은 채 데 마레 추기경은 날카롭게 이폴리토를 추궁했다.

16600826124903.jpg“나는 그때 네가 데 마레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과 책임에 대해 통감하고 네 어머니를 위해 희생한 줄 알았다!”

16600826124921.jpg‘내가?’

이폴리토는 당황했다.

16600826124903.jpg“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봐! 네 어머니는 또 통제 불능이 되어서 사고를 거하게 쳤다! 그걸 막겠다고 큰소리쳤던 너는 여기 앉아서 눈알이나 멀뚱멀뚱 굴리고 있고! 이 아비는 너에게 몹시 실망했다!”

데 마레 추기경의 ‘실망’이란 단어에 이폴리토는 자동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실망이라니, 이 나에게 실망이라니!

16600826124921.jpg“아닙니다 아버지! 제가 다 바로잡을 수 있어요!”

16600826124903.jpg“이놈이! 이 난리가 났는데도 입만 살아서는!”

사실 바로잡을 방도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이폴리토는 데 마레 추기경의 질타에 찔끔해서 고개만 숙였다.

16600826124903.jpg“차기 가주로서, 이 상황에 대해 낼 의견이 있으면 말해봐라.”

16600826124921.jpg“…….”

이폴리토는 지금 자기 앞가림도 어려운 상태였다. 지금 저잣거리에서 살인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당하고 있는 건 루크레치아였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살인을 저지른 부랑자들은 이폴리토가 마련한 자들이었다. 죽이라는 지시도 이폴리토가 내렸다. 루크레치아가 말레타를 죽이기로 결심한 이유도 모두 이폴리토 때문이었다. 이폴리토는 최소한 절반의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모친을 대중의 희생양으로 던져주고 자기는 발을 뺄 만큼 영리하거나 비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위해 나서서 희생할 만큼 효심이 지극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우유부단했다. 아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데 마레 추기경은 자기의 속내를 드러냈다.

16600826124903.jpg“이폴리토. 네 장래를 위해서라면 네 어미를 내어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비정하고 약삭빠른 것은 아들보다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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