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질투, 그 의심의 씨앗2022.01.16.
아리아드네와 알폰소는 둘 사이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아리아드네는 이폴리토, 이사벨라와 함께 일반석의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을 왕실 가족들이 스쳐 지나가 2층에 마련된 왕가 전용의 발코니석으로 향했다. 아리아드네는 행차하는 왕실 가족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레오 3세를 향해 예를 올렸으나, 알폰소의 방향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알폰소 역시 아리아드네의 방향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꼿꼿하게 정면만 바라보았다. 알폰소 왕자의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라리에사 대공녀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와 알폰소 왕자는 분명히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가면무도회에서 체자레 백작 때문에 곤경에 처한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를 알폰소 왕자가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도움을 받은 귀족 영애라면 예의상이라도 반가운 티를 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저 영애는 목석으로 빚은 인간인 양 왕자를 싹 무시하고 있다. 게다가 다정한 알폰소 왕자라면 비록 왕실 가족의 행차 중이라고 할지라도 먼저 눈인사 정도는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건 매달 반복되는 대미사로, 엄격한 의전을 지키는 종류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알폰소 왕자마저도 그런 영애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히 다른 곳을 주시하고 있다. 라리에사는 영민한 편이 아니어서 이 모든 것을 명쾌히 정리하거나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자의 촉,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는 싸한 느낌은 분명히 왔다. 그 느낌은 쉬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마음에서 오래 맴돌았다. * * * 아리아드네를 일부러 모르는 척해야 하는 남자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일부러 아는 척을 한 남자도 있었다. 바로 체자레 백작이었다.
“데 마레 영애!”
대미사가 끝나고 모두가 대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와중에 그는 굳이 출구로 가는 인파를 거슬러 올라와서 예배당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아리아드네에게 인사를 했다.
“그간 격조했소이다. 산 카를로로 돌아오자마자 봄꽃이 가득 날 맞이해주는데,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봄꽃이 영애라오!”
아리아드네는 입가에 약간의 비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그녀는 루크레치아를 추도하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있었다.
“요새 봄꽃은 검은색으로 피나요?”
체자레는 굴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툴뢰르 특산품인 검은 튤립이 올봄의 잇 아이템이지.”
그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씩 웃었다. 아리아드네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여전하시네요, 데 코모 백작님.”
“체자레. 말 놓기로 했었잖아.”
아리아드네는 인상을 쓰곤 답했다.
“성 대신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던 거지, 말을 놓기로 한 적은 없었는데요?”
“이런,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거 기억하면서도 일부러 거리감을 둔 거야?”
체자레 백작은 빙글빙글 웃으며 아리아드네를 비난했다.
“약속을 하셨으면 지키셔야지요, 데 마레 영애.”
끈질긴 남자다. 아리아드네는 눈알을 굴리고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체자레 백작님. 됐나요?”
“이야, 차갑다 차가워. 이렇게 튕기면서도 내가 준 선물은 하고 왔네.”
그는 그녀가 끼고 있는 사슴 가죽 장갑을 쳐다보더니, 그녀의 왼손을 잡아 우아하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리아드네는 팩 손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아서 그의 손등 키스를 꾹 눌러 참았다. 하지만 멈춘 건 왼손뿐이었고 그녀의 입은 맹렬하게 체자레를 공격했다.
“너무 많은 영애들에게 동시에 선물을 보내시다 보니 헷갈리셨나 봐요. 이건 백작님이 보내신 선물이 아니에요.”
“아. 그래. 내가 보낸 건 장갑이 아니라 흑단나무 로사리오였지. 돌려보냈더군.”
들켰다. 이 인간, 알면서 그랬던 거였다. 아리아드네는 잠시 흠칫 굳었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고 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체자레 백께서 보내신 선물이라면 저는 무조건 다 받아야 하나요?”
체자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리아드네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그 로사리오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아리아드네는 냉담하게 답했다.
“제 취향에 통달하셨나 보군요.”
“나는 모든 여성의 취향에 통달했지.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체자레는 아리아드네를 위아래로 유심히 살폈다.
“아가씨는 남이 보낸 선물을 거절하기엔 너무 착하다고.”
‘착하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적어도 회귀 후에는 많이 듣는 말이 아니었다. 아리아드네는 가볍게 웃으며 톡 쏘았다.
“제가 거절했던 체자레 백작님의 수많은 선물이 기억나지 않으시나 봐요?”
“그건 친해지기 전이었고. 그 뒤로 우리는 꽤 가까워졌잖아? 사냥터에서 고생도 같이해, 가면무도회에서 위기에서도 구해줘.”
아리아드네는 헛웃음을 지었다. 친해졌다니. 우리가 정말로 친했던 때는 먼 과거에 있었어. 그때야말로 친밀했지. 그에 비하면 사냥터나 무도회에서의 일은 어린애 장난이었다.
“착각 그만 하세요. 우리는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에요.”
“이런. 아가씨 변했어. 몇 달 떨어져 있었다고 다시 최초의 상태로 돌아왔나 보군.”
체자레는 입맛을 다셨다.
“냉기를 풀풀 날리는 얼음 아가씨라. 다시 훈풍이 불도록 친해지면 되지. 잘 알아가 봅시다, 데 마레 영애.”
“전혀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서 이름으로도 부르고 손등 키스도 하셨으니 오늘 아주 큰 진전이 있었군요.”
“그 정도는 아니야. 아직 좀 성에 차지 않아. 그렇지만 오랜만에 봤으니 오늘은 여기에서 만족하도록 하지.”
그는 잠시 멈췄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다음번에 만날 때에는 정말로 가까워지는 걸 각오해야 할 거야.”
아리아드네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오, 이런. 너무나 기대가 되어 오늘 밤에는 잠도 못 이루겠네요.”
“그거, 야한 얘긴가?”
“체자레 백!”
“장난이야, 장난!”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예배당의 출구로 향했다. 그런 아리아드네와 체자레의 뒷모습을 2층 발코니석에 있는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폰소 왕자였다. 그는 망부석처럼 서서 걸어 나가는 두 남녀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런 알폰소 왕자를 라리에사 대공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 * * 체자레 백작은 대미사에서의 짧은 만남을 마치며 여상스럽게 한마디를 던졌다.
“조만간 파트너 초대장을 보낼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봄의 축제 전야제로 열리는 왕실 무도회 이야기였다. 왕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했고, 체자레 백작은 사실 객관적으로 아주 좋은 파트너였다. 거절할 핑계도 없었다. 그녀가 체자레 백작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알폰소는 공식적으로는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매여 있을 테니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없다. 「……이러한 사정으로 체자레 백작이 파트너를 신청함. 어떻게 해야 하지? - 고민 중인, 당신의 아리.」 왕자의 답변은 단호했다. 「절대로 싫어.」 서로 마음을 확인한 이후의 알폰소는 그 전과는 사뭇 달랐다. 대책 없이 다정하고 온화하기만 했던 이전 모습에 비하면 고집도 있었고 소유욕도 있었다. 이제껏 보여주었던 외부적인 자아만이 아니라 내밀한 진심과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말이야…….’
자기는 라리에사 대공녀와 왕실 무도회에 파트너로 참석할 거면서, 나한테는 체자레 백작과 함께 가지 말라니.
‘불공평하잖아.’
아리아드네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알폰소는 자기의 호위기사들 중 한 명을 차출해서 아리아드네의 에스코트를 맡기겠으니 체자레 백작의 파트너 요청은 거절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면 누가 봐도 더 나은 선택인 체자레 백작을 거절하고 일면식도 없는 왕자의 호위기사와 파트너를 맺은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 알폰소의 호위기사에게 사실은 알폰소와 아리아드네가 비밀 연애 중이라는 사정 설명을 해야 한다는 부담은 덤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알폰소에게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라는 답변을 써서 부쳤다.
‘얼굴 보면 가만 안 둘 테야.’
* * * 아리아드네도 나름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진지했고, 스트레스도 받았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배가 처부른 고민이라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 다른 누군가는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인생 처음으로 파트너가 없어서 무도회에 못 갈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없어, 없어, 없다고!”
이사벨라는 책상 위에 가득 쌓인 편지를 쓸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지금 이사벨라에게 도착하고 있는 것은 광고성 편지들밖에 없었다. 이사벨라는 사교계가 타란토에서 산 카를로로 돌아온 이후 신실한 천신의 종으로 거듭난 척을 하느라 이름난 수녀님들과 수사님들께 교리문답이라던가, 읽으면 좋은 책 같은 것을 문의하기 위해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돌아온 것들은 추천 도서 목록과 봉사활동 권유, 기부 종용 등의 내용이 담긴 편지 더미였다. 순전히 그런 편지들만 이사벨라의 책상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사벨라에게는 못해도 십여 통의 개인적인 편지들이 도착해 있었을 것이다. 대엿 통은 용기 있게 ‘이사벨라 데 마레 영애를 이번 무도회에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청약하는 내용의 편지였을 것이고, 서너 통은 그럴 용기조차 없어서 최근의 안부를 물으며 ‘무도회 날짜 언저리의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은근슬쩍 던져보는 편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사벨라를 왕실 무도회에 데려가고자 하는 편지는 단 하나도 오지 않았다.
“평판에 목매단 멍청이들!”
이사벨라는 거칠게 짜증을 냈다. 어떻게 된 사내라는 것들이, 어쩜 이렇게 세간의 평이 무서워 겁쟁이들처럼 몸을 사린단 말인가! 정녕 그녀를 구해 줄, 앞뒤 가리지 않고 사랑만을 추구하는 진짜 남자는 없단 말인가? 그나마 성당에서 보낸 종교 서적 카탈로그 꾸러미에 속해 있지 않은 편지는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타란토에서 산 카를로로 돌아오니 이사벨라 양 생각이 났다’며, 앞으로 기회가 닿을 때 사교계 행사에서 인사하자는 안부 인사를 보내왔다.
“‘기회가 닿을 때’ 언제!”
이사벨라는 수건으로 오타비오의 목이라도 졸라버리고 싶었다. 이사벨라가 그간 오타비오와 교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이사벨라가 오타비오의 약혼녀인 카멜리아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카멜리아를 동석해서 셋 혹은 그 이상이 볼 때만 만날 수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이사벨라와 카멜리아 사이는 되돌릴 수 없게 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사벨라는 근신에서 풀려난 이후 제일 먼저 그동안 자신에게 도착했지만 아버지가 열람을 막았던 서신 꾸러미를 풀어보았다. 별의별 편지들이 다 있었다. 처음에는 이사벨라와 교분 정도만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저열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어서 보낸 편지들(‘캄파 후작 얘기, 진짜예요?’)이 홍수를 이뤘고, 그 뒤로는 이사벨라의 안부를 묻는 편지들이 띄엄띄엄 왔다. 후자는 대부분 충실한 레티시아 데 레오나티의 편지였다. 하지만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의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이사벨라는 바로 감을 잡았다.
‘카멜리아 데 카스틸리오네는 캄파 후작과 관련해서 퍼진 내 뒷소문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거나.’
그녀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아니면 그 소문이 퍼지는 데에 일조를 하셨거나.’
전자일 리는 없었다. 설령 카멜리아가 갑자기 성불을 해서 사교계의 뒷소문에 귀를 닫기로 했다손 치더라도 이사벨라에게 끝내 안부 편지 한 통 안 보낸 것은 무언의 절교 선언이었다.
‘깜찍한 년.’
이사벨라는 손에 쥔 깃펜을 구겼다. 카멜리아와 더는 친구가 아닌 이상 오타비오를 만날 핑계는 영원히 없다고 보아야 했다. 하지만 잠깐, 그녀에게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패가 있지 않나?
“이렇게 쓰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이사벨라는 편지지를 한 장 꺼내 검은 잉크를 찍어 일필휘지로 내용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바톨리니 백작 부인, 아니, 클레멘테 언니께. 요즘 잘 지내시죠. 제 살신성인 덕에 가정이 평안하신 것 같아서 제가 다 뿌듯합니다. 새순이 움트고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봄이 왔어요. 새로운 이야기들이 끓어오르기 전에 구원(舊怨)은 모닥불에 넣어 불살라 버리는 것이 봄의 축제의 정신 아니겠어요. 조만간 차 한번 같이 마셔요. 날짜 하루 잡아주세요. - 언니가 잘됐으면 좋겠는, 이사벨라 데 마레 올림.」 바톨리니 백작 부인은 캄파 후작의 진짜 밀회 상대였다. 그리고 오타비오 데 콘타리니의 친누이이기도 했다.
“약혼녀에 끼어 다니는 것보다는, 누나랑 같이 다니는 편이 보기에도 좋잖아?”
이사벨라는 코 밑을 쓱 쓸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