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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그런 소리 계속하면 키스할거야 (503/733)

<제121화> 그런 소리 계속하면 키스할거야2022.01.30.

젊은 기사는 주군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베일 아래로 윤기 나는 피부와 미소를 띤 입매가 엿보였다. 몹시 우아한 웃음이었다. 그는 아리아드네를 무뚝뚝하게 올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고했다.

16600826693489.jpg“성은 없습니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주억였다.

16600826693494.jpg“그분의 기사들 중에 평민 출신이 몇 분 계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16600826693489.jpg“마차로. 마차는 제가 몰면 됩니다.”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마부 주세페를 쳐다보았다.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저었다.

16600826693494.jpg“제가 집으로 돌아올 때도 저를 바래다주시려고요?”

그녀는 웃으며 덧붙였다.

16600826693494.jpg“아니면 귀갓길에는 저더러 마차를 직접 몰라는 말씀인가요.”

기사 엘코는 얼굴을 붉히고는 더 이상 주세페의 동행에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엘코 경은 마차 안에 타는 것이 아니라 주세페의 옆자리에 앉아서 센트로 아니마로 가는 뒷골목을 기가 막히게 코치했다.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길을 모두 꿰고 있는 것 같았다.

16600826693511.jpg“기사님은 산 카를로 토박이이신가 봅니다.”

주세페는 엘코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하지만 회색 머리의 기사는 얼굴을 굳힌 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기사라는 치들이 콧대가 높은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이대도 또래이고 상대방 역시 귀족이 아니라고 하니 말을 붙여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주세페는 기분이 약간 상했지만, 모르는 척하고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16600826693489.jpg“저쪽, 뒷골목에 세우고 대기합시다.”

기사 엘코는 센트로 아니마의 정중앙에 있는 피에트로 광장 바로 뒤의 좁은 골목을 지정했다. 주세페는 엘코의 지시대로 능숙하게 마차를 골목의 벽면에 딱 붙여서 세웠고, 엘코 경은 마부석 옆자리에서 뛰어내려서 검을 들고 호위를 섰다. 아리아드네가 일부러 골라 타고 나온 평범한 검은 마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도(氣度)였다. 뒷골목에서 대기한 지 십여 분이 지나자 다른 검은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새로운 마차의 마부는 엘코와 눈인사를 하더니, 아주 잠깐 두 대의 마차를 교행시켜 세웠다. 엘코는 먼저 아리아드네의 마차 문을 열고,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내리게 한 다음 두 번째 마차의 문을 열었다.

16600826693519.jpg“아리!”

익숙한 목소리에 아리아드네는 앞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검은 마차 안에는 얼굴 가득 반가움을 담은 알폰소가 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아리아드네가 마차에 타는 것을 잡아주었고, 아리아드네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반대쪽 무릎을 세워 허벅지를 발판으로 제공해 준 엘코 경의 도움까지 받아 1초도 되지 않아 바로 새로운 마차로 옮겨탈 수 있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알폰소 왕자는 아리아드네를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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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0826693519.jpg“보고 싶었어!”

격정적으로 끌어안은 탓에 아리아드네의 머리 속싸개가 밀려서 뒤로 벗겨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모두 숨기고 있던 프렌치 후드가 벗겨지자, 아리아드네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와 가슴팍으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향이 훅 풍겨 나왔다. 예전에, 데뷔탕트 무도회 때 아리아드네의 침실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맡았던 그 향기였다. 알폰소는 너무 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차마 하지 못했던 것을 했다. 왕자의 입술이 소녀의 입술을 덮었다.

16600826693494.jpg“아.”

아리아드네는 짧은 신음과 함께 알폰소의 키스에 화답했다. 소년은 열정적으로 소녀의 체온에 반응했고 그녀 역시 기쁘게 그를 맞았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시각과 청각을 잊고 열기, 촉감, 냄새 같은 것들이 사람을 압도하는 경험이었다. 체온을 나눈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16600826693494.jpg“하아…….”

정신을 차렸을 땐 마차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마차의 유리창에 습기가 껴서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드네는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뽀드득 밀어 닦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16600826693494.jpg“우리,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숱 많은 검은 머리가 좌르르, 어깨와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알폰소는 껴안고 있던 아리아드네를 내려놓고 자기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깍지를 꼈다.

16600826693519.jpg“우리는 산 카를로 시내를 마차로 한 바퀴 도는 중이야. 40분 정도 시간을 빼 뒀어. ……뒀었어.”

그들은 반 시간은 족히 낭비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알폰소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16600826693519.jpg“……지금 카스텔 라비코의 경계를 지나고 있네. 피에트로 광장까지는 10여 분 정도 남은 것 같아.”

알폰소는 손깍지를 끼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아리아드네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작게 웃으며 왕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스한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나른한 고양이처럼 몸을 기댄 그녀가 물었다. 언제나, 호기심이 평안보다 앞서는 성미였다.

16600826693494.jpg“오늘은 어떻게 왕궁 밖으로 나온 거야?”

알폰소 왕자는 오늘 원래 왕궁에서 센트로 아니마의 지역협동조합장의 알현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봄의 축제에서 알폰소 왕자가 왕실을 대표해 센트로 아니마의 중심인 피에트로 광장에서 축하 연설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인데, 지역협동조합장은 막판에 왕궁에서 뵙는 것도 좋지만 광장에 오셔서 연설하시게 될 수선화 제단을 왕자님께서 직접 한번 둘러보심이 어떠냐고 아뢰었다. 알폰소는 옳다구나 하고 나가겠다고 외쳤다. 물론 수선화 제단이 보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16600826693519.jpg“일정이 있었어. 너무 보고 싶었어.”

논리를 말하는 여자와 감정을 말하는 남자였다. 그에게는 그가 궁 밖으로 나오게 된 자세한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던 마음, 그것만이 핵심이었다.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웃으며 왕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스한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그래,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닿아 있는데 나오게 된 연유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그렇지만 알폰소도 꼭 전해야 하는 내용은 전달했다.

16600826693519.jpg“그분과 관련해서는, 어머니와는 이미 대화를 마쳤어.”

마지막으로 대화했을 때, 마르그리트 왕비는 본인과 협의하지 않은 채 레오 3세에게 이 화제를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알폰소 왕자는 모친에게 한 달 안에 결론을 내려 달라고 했었다.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직 가타부타 답이 없었지만 그들이 약속한 한 달의 기한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그녀의 결론을 물어보기는 할 작정이었지만, 그녀의 결론과 상관없이 아버지에게 파혼 이야기를 고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16600826693519.jpg“조만간 결실을 가져올게.”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턱을 들어 올려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16600826693519.jpg“다음 무도회에는, 절대로 싫어하는 남자의 파트너 신청을 거절하려고 전전긍긍하게 두지 않아.”

알폰소는 아리아드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16600826693519.jpg“조금만 더 기다려 줘.”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16600826693519.jpg“그때까진 어쩔 수 없이 라파엘 데 발데사르한테 신세를 져야 하겠지만.”

알폰소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리아드네를 꽉 껴안으며 조건을 걸었다.

16600826693519.jpg“맨손으로 손잡기 금지.”

16600826693494.jpg“뭐? 내가 그 사람이랑 손을 왜 잡아?”

16600826693519.jpg“에스코트할 때 손도 얹어야 하고, 왈츠 출 때 손도 잡아야 하잖아.”

16600826693494.jpg“그것도 안 돼?”

아리아드네는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그런 식의 기본적인 에스코트는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결혼한 귀부인도 사정이 있어 남편이 아닌 사람과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외간 남자와 스스럼없다’라는 묘사조차도 붙지 않았다. 무도회 파트너의 에스코트를 거절하면 무도회장에 있는 전원이 그쪽만 쳐다볼 것이다!

16600826693519.jpg“그러니까 장갑 끼고 잡아. 맨손은 절대로 안 돼.”

16600826693494.jpg“하하하…….”

16600826693519.jpg“플로어에서 춤출 때 말고는 둘만 있지 말고. 꼭 여러 명이 함께 동시에 있어. 단둘이 정원 산책 절대 안 돼.”

16600826693494.jpg“친구라며, 친구도 질투해?”

16600826693519.jpg“네 근처에 있는 수컷이라면 네 발 달린 것도 싫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다고.”

16600826693494.jpg“비약이야!”

16600826693519.jpg“쉿, 조용히 해.”

알폰소는 다시금 입술로 아리아드네의 반문을 막아 버렸다. * * * 오늘 아리아드네는 기분 좋은 깜짝 선물 같은 외출을 나갔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만 꿀 같은 외출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6600826711436.jpg‘이게 얼마 만의 초대냐.’

이사벨라는 머리에 쓴 흰 베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강하게 고정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봄을 맞아 평소에 입던 대로 잠자리 날개 같은 드레스를 입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음전한 검은 상복을 골랐다. 어차피 아리아드네 계집애가 집안 재정을 꽉 틀어쥐고 있어서 이사벨라는 새 옷을 맞출 수도 없는 처지였다.

16600826711436.jpg‘괜찮아. 언젠간 뒤집힐 거야.’

루크레치아는 이제 죽고 없고, 이사벨라로서는 아리아드네가 틀어쥐고 있는 금화 자루를 뺏어올 역량이 없었다. 새엄마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집안 살림 관리는 아리아드네가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자라면 시집을 가는 법이다. 그녀는 새로운 집의 안주인이 되어 그 집의 금화를 펑펑 쓸 작정이었다.

16600826711436.jpg“마차를 대령해. 바톨리니 백작가로 갈 거야.”

그녀는 나온 마차를 보며 놀랐다. 마부들이 추기경과 아리아드네가 주로 타는 은마차를 대령했기 때문이다.

16600826711436.jpg‘아버지야 오늘 집에 계시지만, 아리아드네가 집에 없는데 이 마차를 안 타고 갔다고?’

이사벨라는 평소와 조금 다른 상황에 미간을 조금 찌푸렸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뭐, 좋은 마차를 타고 가면 좋지. 잘된 일이다. 바톨리니 백작 부인에게 자신이 집안에서 팽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데 마레 가문의 은마차를 타고 바톨리니 백작가에 도착한 이사벨라는 일 도메스티코의 정중한 안내와 함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부인의 작은 응접실이 아니라, 가주가 사용하는 메인 응접실이었다.

16600826711436.jpg‘본격적인데?’

그녀는 슬슬 오늘 이 약속이 정말로 백작 부인을 보러 온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16600826711436.jpg‘아니면…….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집안 살림을 모두 총괄하나? 남편이 쓰러지기라도 해서 집안을 다 먹은 거야?’

그런 경우라면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 외간 남자—그 상대방으로 캄파 후작을 선택한 것은 참 취향이 고약했지만—와 만날 법도 했다. 남편이 병석에 누워 있으면 외로울 것이고, 그의 눈을 피해 불륜을 하기도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예상은 빗나갔다.

16600826693511.jpg“큰 데 마레 영애 아니신가!”

백발의 호호 할아버지가 실내복 위에 느슨한 가운을 걸치고 응접실로 총총 들어왔다.

16600826711436.jpg“바톨리니 백작님.”

바톨리니 백작 부인보다 거의 40여 세 연상인 바톨리니 백작이었다. 그가 금실이 좋았던 전처와 사별한 이후에 만난 것이 클레멘테 데 콘타리니, 현 바톨리니 백작 부인이었다.

16600826693511.jpg“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그는 사지가 마비되어 병상 위에 누워있지도 않았고, 아내의 부정을 눈치채고 뭔가를 캐내려 이사벨라를 부른 것도 아니었다. 인상 좋은 동글동글한 노인인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이사벨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16600826693511.jpg“좀 앉아요. 안사람은 곧 나올 거요.”

이사벨라는 적지않이 당황했지만, 열두 살 소년부터 아버지뻘 노인을 막론하고 남자의 호감을 사는 것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해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권유에 따랐다.

16600826693511.jpg“클레멘테가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잘 없는데 오늘 이렇게 방문객이 찾아오니 참 좋아요.”

그는 인자하게 말을 이었다.

16600826693511.jpg“클레멘테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하신 귀부인들이 많지요. 항상 미안해요. 노인네와 결혼해서 젊음의 특권을 잃은 것 같아서.”

이사벨라는 ‘아니오, 부인께선 젊음의 특권을 아주 잘 만끽하고 계십니다만’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16600826693511.jpg“또래 아가씨가 어울려주는 게 참 고마워요.”

이사벨라는 눈웃음을 치며 웃었다.

16600826711436.jpg“별말씀을요. 클레멘테 언니는 참 귀감이 되시는 귀부인이라 항상 존경하고 내심 따르고 있었답니다.”

불륜계의 샛별이지만 뭐 립서비스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사벨라는 사람 좋은 늙은 남편이 좋아할 만한 미사여구를 모두 붙여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의 칭찬을 퍼부어 주었다.

16600826693511.jpg“……아.”

당사자가 들으면 얼굴을 붉히고도 남을 만한 칭찬 세례였다. 응접실에 뒤늦게 도착한 클레멘테 데 바톨리니는 뭐라고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16600826693511.jpg“오, 여보. 내려왔어요? 내 당신의 손님을 잠깐 새치기하고 있었소.”

바톨리니 백작은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젊은 아내를 자리에 앉혔다.

16600826693511.jpg“젊은이들끼리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어서 이야기하세요. 내 자리를 이만 피해주리다.”

그는 정말로 응접실 문을 닫고, 하녀를 들여보냈다. 지옥 같은 침묵이 응접실을 지배하는 가운데 백작가의 하녀가 차를 따르고, 티푸드 몇 가지를 간단하게 테이블 위에 놓은 뒤 자리를 떴다. 형형색색의 튤립을 무어 제국 산 청자 화병에 꽃아 대리석 테이블 위에 장식한, 호화로운 응접실이었다. 이사벨라가 침묵을 깼다.

16600826711436.jpg“와.”

그 이사벨라의 얼굴에조차도, 비난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16600826711436.jpg‘저런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워? 니가 사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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