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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체자레 백작의 거절 (506/733)

<제124화> 체자레 백작의 거절2022.02.09.

16600826868769.jpg“뭐라고요?”

이사벨라의 뾰족한 비명이 바톨리니 백작가의 복도를 울렸다.

16600826868769.jpg“누구 좋으라고? 이게 나만 좋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체자레 백작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1660082686878.jpg“무슨 말씀. 큰 데 마레 영애는 지금 누구보다도 더 자기 안위만 챙기고 있다오.”

이사벨라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건, 누명이다. 체자레 백작은 이 일로 분명히 얻어갈 것이 있었다.

16600826868769.jpg“천만에요! 나와 함께 왕궁 무도회에 참석하시면 체자레 백작님은 내 동생의 관심을 얻게 되시죠. 이것만으로도 남는 장사 아닌가요?”

체자레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1660082686878.jpg“그리고 당신은 이 체자레 백작을 공식 행사에 끼고 들어감으로써 산 카를로 사교계에 ‘이사벨라 데 마레, 아직 안 죽었다’라고 널리 뽐낼 수 있지.”

이사벨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16600826868769.jpg“뭐,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뭐, 체자레 백작께서 언제는 타인의 악명에 신경을 쓰셨나요?”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1660082686878.jpg“그건 그렇긴 해.”

16600826868769.jpg“게다가.”

이사벨라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16600826868769.jpg“제가 캄파 후작의 내연녀라는 소문이 완전히 허위라는 사실은 체자레 백작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1660082686878.jpg“음? 그런가?”

그의 태연한 모른 척에 이사벨라는 약이 올랐다.

16600826868769.jpg“제가 캄파 후작의 루비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사교계에 그런 소문이 퍼진 거잖아요. 하지만 체자레 백작님이야말로 그 팔찌와 캄파 백작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가장 잘 알고 계시죠!”

1660082686878.jpg“음. 뭐. 그것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16600826868769.jpg“그러면 대체 당신이 잃는 건 뭐죠? 평판에 대한 비난은 원래 아무 관심 없으셨고.”

이사벨라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16600826868769.jpg“부도덕한 내연녀와 함께 어울리는 걸 싫어하시지도 않으실 것 같지만 저는 내연녀가 아니니 셈해보자면 그것도 아니고.”

이사벨라는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그녀는 투명하고 맑은 얼굴로 체자레 백작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16600826868769.jpg“잃는 것은 없고 얻는 것만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왜 싫으시다는 거죠?”

체자레 백작은 사슴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자신에게 몹시 가까이 다가와 있던 이사벨라의 이마를 멀리 밀어냈다.

16600826868769.jpg“뭐예요! 만지지 말아요!”

1660082686878.jpg“큰 데 마레 영애야말로 외간 남자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오신 것 아니오?”

그는 반걸음 옆으로 비켜나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비소를 지었다.

1660082686878.jpg“불쾌해.”

16600826868769.jpg“뭐라고요?”

1660082686878.jpg“그 조그맣고 예쁜 머리통 안에서 계획이 윙윙 돌고 있는 게 빤히 보이는데, 영애가 날 그 계획의 부품으로 쓰는 게 불쾌해.”

그는 고고하게 팔짱을 끼고 이사벨라를 내려다보았다.

1660082686878.jpg“이 체자레 백작이, 목표한 여자의 친자매에게 손을 대지 않는 이상 그 여자 하나 못 꼬실 것 같은 반푼이로 보인단 말이오? 나는 영애의 조력이 없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으니 우리 서로 갈 길 갑시다.”

체자레는 돌아섰다.

1660082686878.jpg“제의는 거절이요.”

분통이 터진 이사벨라가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16600826868769.jpg“체자레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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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 * * 라리에사 드 발로아는 그날 오전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타국의 궁전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동포들은 다 아저씨들이었다. 적게는 스무 살, 많게는 마흔 살 연상인 수행원들은 라리에사의 성에 차게 그녀를 즐겁게 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언어가 불편한 타국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도 없었다. 반쯤은 언어 문제였고, 반쯤은 라리에사가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민망한 상황에 처하는 상황을 극도로 싫어했다. 라리에사 대공녀가 생각하기에, 에트루스칸에서 만날 수 있는 귀족 영애들은 신분상 다 그녀의 아랫사람이어야 했다. 하지만 에트루스칸은, 아니 산 카를로는 갈리코 왕국보다 눈부시게 융성한 문화를 지닌 유행 선도국이었고 갈리코의 것을 좀 낮추어 보는 경향이 있었다. 라리에사는 시골 영지에서 올라온 자신을 자기보다 천한 출신인 산 카를로 출신 영애들이 무시할까 봐 두려워서 그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에트루스칸 왕실에는 또래 공주도 없었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줄 수 있는 것은 알폰소 왕자뿐이었다. 하지만 그 알폰소 왕자를 만나지 못한 지도 3일이 넘었다.  

16600826878678.jpg“알폰소 왕자님은 어디에 가셨나요?”

  라리에사의 당당한 요구에, 왕자의 보좌관인 베르나르디노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가리며 미끄럽게 대답했다.  

16600826878682.jpg“대공녀님 오셨군요. 알폰소 왕자 전하께서는 ‘봄의 축제’ 준비를 위해 지역구 대표를 접견하고 계십니다.”

16600826878678.jpg“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오전 열 시 언저리에 있었던 일정이잖아요. 저는 알폰소 왕자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16600826878682.jpg“대공녀님. 왕자님의 오전 일정표에 사소한 변동이 있었습니다. 원래 왕궁 알현실에서 지역구 대표 접견을 하실 예정이었는데, 예정에 없던 현지 시찰이 일정에 추가되어 왕자 전하께옵서는 직접 지역구로 나가셨습니다. 아마 이동시간과 추가된 현지 시찰 시간만큼 뒤의 일정이 밀렸을 겁니다.”

  라리에사는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텁게 바른 입술연지가 지워지며 핏기없는 안색이 드러났다. 그녀는 오늘 점심 언저리에 알폰소 왕자의 시간이 조금 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최근 연달아 바쁜 스케줄을 핑계 삼아 그녀와 만나는 것을 거절해왔다. 알폰소 왕자의 일정표는 실제로도 빽빽했기 때문에 라리에사는 불만을 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알폰소 왕자의 일정표에 균열이 났다. 그녀는 이날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16600826878678.jpg“왜 저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주시지 않은 거죠?”

  라리에사는 분개했다. 나, 혼자서 바보같이 기다렸잖아……! 하지만 베르나르디노 경은 사과하는 대신에 낯빛을 굳히고 라리에사 드 발로아에게 반문했다.  

16600826878682.jpg“대공녀님. 왕자 전하의 일정표는 어디에서 입수하셨습니까?”

  라리에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베르나르디노를 노려보았다.

16600826878678.jpg‘감히, 감히……!’

그녀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 일정표를 몰래 본 것도 아니었다.  

16600826878678.jpg“왕비 폐하의 시녀이신 카를라 부인이 보여주셨어요! 곧 정혼할 사람들끼리 친해지려면 얼굴을 많이 봐야 한다면서요.”

  알폰소 왕자는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라리에사 대공녀와의 국혼을 무르겠다고 선언했지만, 마르그리트 왕비는 아직 아들의 의향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카를라 부인은 이 상황을 모두 알고는 있었지만 왕비의 침묵을 관조 내지 관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거부’라고 읽었다. 그녀는 라리에사 대공녀가 알폰소 왕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두 젊은이가 붙어 있을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카를라 부인의 판단이었을 뿐이고, 베르나르디노 경의 판단은 달랐다.  

16600826878682.jpg“대공녀님, 알폰소 왕자 전하의 일정표는 대공녀님께서 공식적으로 열람하실 수 없는 문서입니다.”

16600826878678.jpg“뭐라고요?!”

16600826878682.jpg“카를라 부인이 호의로 보여주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합당한 절차를 통한 일 처리가 아닙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분노로 파랗게 떨고 있었다. 베르나르디노는 그녀의 감정을 읽지 못한 척, 규칙과 절차에 대한 안내를 이어갔다.  

16600826878682.jpg“대공녀께서 왕자 전하를 뵙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저에게 미리 언질을 넣어 주십시오. 왕자 전하의 일정표상 비어 있는 날짜를 확인하고 가장 빨리 회신을 드리겠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라리에사가 베르나르디노에게 알폰소 왕자와의 접견을 요청하면 그는 다다음 주 월요일 같은 날짜를 읊다가 ‘그보다는 공식 행사에서 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따위의 형편없는 제의만 건네고는 했다.  

16600826878678.jpg“흥!”

  라리에사 대공녀는 분을 못 이겨 크게 콧방귀만 뀌고는 거친 발걸음으로 왕자궁의 초입에서 돌아서고야 말았다.

16600826878678.jpg‘뭔가 있어……. 뭔가 달라졌어……. 용납 못 해……. 반드시 전처럼 되돌려놓고야 말 거야!’

  * * * 같은 날, 줄리아 데 발데사르는 그날 왜 자기가 외출을 하고 싶었는지가 의문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집에만 처박혀 있는 오라버니 보란 듯 외출의 모범을 보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다음 주에 거리 축제가 시작하면 그때 나가라는 어머니의 잔소리도 무시했다. 줄리아는 그때가 되면 인파도 많고 위험하니까 지금 살짝 나가서 수선화 제단을 보고 오겠다며 하녀 하나와 마부 하나만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16600826882639.jpg“여기서 내려줘.”

16600826878682.jpg“제 시야에 닿는 곳에 계셔야 합니다.”

16600826882639.jpg“알았어.”

호위도 겸한 마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 줄리아는 피에트로 광장 중앙에 있는 수선화 제단을 감탄하면서 감상했다. 라틴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던 대리석 분수대 주변을 만 송이에 가까울 샛노란 수선화가 가득 덮고 있었다. 인부들은 목조 아치를 설치하는 중이었는데, 그 아치 또한 완성된 이후에는 수천 개의 꽃송이로 풍성하게 덮이리라.

16600826882639.jpg“이거, 카놀리*를 먹으면서 보면 정말 장관이겠다.”

16600826878682.jpg“아가씨, 바로 저기 가게가 있는데 제가 사 올까요?”

16600826882639.jpg“응, 빨리 다녀와.”

어차피 마부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잠시 혼자 남는 것 정도로는 위험하지 않다. 줄리아는 분수대 옆에 앉아 눈부신 초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16600826882639.jpg‘수선화……?’

정확히는 수선화만큼이나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인파 사이에 끼어 종종걸음을 걷고 있었다. 줄리아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잊기에는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16600826882639.jpg‘프랑수아……! 레오나티 가문의 일 도메스티코……!’

그는 심부름을 나왔는지, 큰 바구니를 들고 그 안에 식료품으로 보이는 몇 가지 식자재들을 넣어 나르는 중이었다. 줄리아는 잠시 그에게 말을 걸지 말지 고민했다. 그를 불러서 무슨 말을 할지, 후작 영애와 남의 집 하인이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눌지 아무것도 생각해 놓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를 그냥 보낸다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16600826882639.jpg“저기요!”

레오나티 가문의 일 도메스티코는 줄리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이 무심하게 자기가 걷던 방향으로 그냥 걷고 있었다. 줄리아는 다시 한번 목청을 높여 불렀다.

16600826882639.jpg“프랑수아!”

역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에라이, 이판사판이다. 줄리아는 크게 외쳤다.

16600826882639.jpg“프랑수아!”

그간 배운 갈리코 어의 억양을 적확하게 살린 외국어 발음이었다. 그제야 키 큰 젊은 남자가 휙 뒤를 바라보았다. 줄리아는 크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차가운 첫인상이 따스한 웃음에 묻혔다. 하지만 저벅저벅 다가간 그녀가 상대방에게 건넨 첫 마디는 이랬다.

16600826882639.jpg“레오나티 자작가에서 급료로 얼마 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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