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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피의 분노 (514/733)

<제132화> 피의 분노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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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소 왕자와의 두 번째 왈츠를 끝낸 라리에사는 호흡이 가빠 죽을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 탓에 생긴 과호흡증인지, 아니면 템포가 빠른 산 카를로 왈츠를 두 곡이나 연달아 춰서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16600827869986.jpg“저런, 발로아 대공녀. 숨이 찬 모양이지요?”

  자리로 돌아가자 마르그리트 왕비가 아는 체를 해주었다.  

16600827869986.jpg“우리 아들 녀석도 참, 댄스의 템포가 빠르면 레이디를 모시고 자리로 돌아올 것이지 뭘 그렇게 굳이 춤을 추겠다고.”

  알폰소 왕자는 라리에사를 왕족과 귀빈들이 앉은 상석으로 데려다주더니 무심한 표정으로 바로 자리를 떠 버렸다. 필시 그녀와 함께 앉아 있기조차 싫은 것이리라.  

16600827869996.jpg“아니, 아니에요. 춤은 제가 추자고 했어요. 배려 감사합니다 왕비 폐하…….”

  라리에사는 알폰소에게서 들은 차가운 축객령 이후로 자신에게 따듯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있자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품 안에 기어 들어가서 안기고 싶었다. 그 옆에서 역시 동향 사람인 카를라 부인이 라리에사에게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었다.  

16600827870002.jpg“대공녀님, 왈츠를 두 곡이나 연달아 추시는 모양새가 너무 귀여운 커플 같았답니다.”

  카를라 부인은 팔라지오 카를로 내에서 라리에사의 가장 큰 우군이었다. 카를라 부인은 라리에사 대공녀에게 알폰소 왕자의 스케줄이나 왕자님이 좋아하는 디저트, 손수건 모양 같은 소소한 것을 귀띔해주는 장본인이었다. 라리에사는 허탈하게 웃었다. 남의 눈에라도 그렇게 보였다니 다행이지만,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16600827869996.jpg“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16600827870002.jpg“아참, 대공녀님께서는 왕자님께서 준비하신 ‘시뇨라 오페르타’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시지요?”

  ‘시뇨라 오페르타’는 왕궁 무도회가 시작할 때나 파할 때 남성이 자신의 파트너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이었다. 일상적인 사이에서는 조그만 카드나, 약간의 과자, 꽃 한 송이 정도를 건네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관계가 깊은 커플이라면 화려한 보석이나 귀금속을 선물하기도 했다. 라리에사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16600827869996.jpg“글쎄요, 그런 게 있을까요.”

16600827870002.jpg“어머나, 대공녀님.”

  카를라 부인은 정색하며 답했다.  

16600827870002.jpg“우리 알폰소 왕자님은 훌륭하게 교육받은, 둘도 없는 신사랍니다. 숙녀에게 ‘시뇨라 오페르타’를 생략하실 리가 없잖아요.”

  라리에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16600827869996.jpg‘신사이기는 하지. 신사답게 나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어.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아직 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에 카를라 부인이 기름을 부었다.  

16600827870002.jpg“오늘 무도회 오프닝의 웰컴 기프트는 받으셨나요?”

  왕궁 무도회에서는 신사들의 불만—영애들과 귀부인들의 취향을 맞춘 선물을 마련하기가 너무나 어렵다는 다소 투박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웰컴 기프트를 만들어 무도회에 입장할 때 모든 여성 손님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내가 ‘내 ’시뇨라 오페르타‘는 어디에 있느냐’고 따질 때 ‘왕궁에서 이미 받았잖아’라고 변명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16600827869996.jpg“아, 아뇨.”

  라리에사 대공녀는 무도회장에 입장할 때 귀빈 통로를 통해 들어왔으므로, 다른 영애들이 모두 받은 웰컴 기프트를 받지 못했다.  

16600827870002.jpg“제가 하나 따로 챙겨 놓으라고 일러두었어요, 시종을 불러 가져다드릴게요.”

16600827869996.jpg“감사합니다…….”

  라리에사는 거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무도회의 웰컴 기프트는 보통 꽃 한 송이나, 가벼운 과자, 공예 카드 등이다. 왕궁 무도회에 올 기회가 거의 없는 하급 귀족 아가씨라면 모를까 발로아의 대공녀가 목을 맬 정도의 물건은 아니다.  

16600827870002.jpg“이번 웰컴 기프트는 알폰소 왕자님이 직접 고르신 것, 아시나요?”

16600827869996.jpg“예?”

  라리에사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놀란 라리에사 대공녀를 앞에 앉혀 두고, 카를라 부인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보아온 황금의 왕자님의 찬사를 아주 뿌듯하게 늘어놓았다.  

16600827870002.jpg“왕자님께서 이번 웰컴 기프트는 수선화로 하자고 마르그리트 왕비 폐하께 건의를 하셨답니다. 왕비 폐하께서는 ‘백합의 방’에서 열리는 무도회이니만큼 원래는 백합을 고려하고 계셨었거든요.”

  그녀는 시종을 손짓으로 불러 웰컴 기프트를 가져오도록 했다. 노란 겹꽃이 풍성한, 건강한 녹색 수선화 한 대와 약간의 쿠키였다.  

16600827869996.jpg“수선화…….”

16600827870002.jpg“왕자님께서 그날 말씀하시길, ‘약속’을 생각나게 하는 꽃이라고 하시더군요.”

16600827869996.jpg“약속……?”

16600827870002.jpg“제가 모르는 수선화의 꽃말이라도 있었으려나요?”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 ‘외로움’, ‘고결함’으로, ‘약속’과 관계된 내용은 전혀 없었다. 사실 알폰소가 생각했던 것은 아리아드네와 ‘봄의 축제’ 첫날, 피에트로 광장의 수선화 제단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왕궁 무도회에서는 아리아드네와 아는 척을 할 수 없었으나, 알폰소는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못내 미안했던 나머지 어떻게든 꽃 한 송이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백합을 고려 중이던 어머니에게 건의해 웰컴 기프트의 꽃을 수선화로 바꿨던 것이다. 하지만 라리에사의 귀에 이 ‘수선화’와 ‘약속’은 발화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들렸다.

16600827869996.jpg‘산 카를로로 돌아가면 단둘이 수선화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던 그 약속……!’

알폰소 왕자가 아라벨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타란토를 비운 사이에, 라리에사 대공녀가 대필을 맡은 베르나르디노 경과 했던 약속이었다. 라리에사가 타란토 별궁의 복도에서 알폰소에게 ‘갈리코 왕국을 대표하는 나에게 잘하라’고 화를 낸 날을 기점으로 알폰소 왕자와 라리에사 대공녀의 사이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산 카를로로 돌아온 이후로는 라리에사는 알폰소 왕자와 단둘이 독대하는 자리조차 거의 가지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라리에사는 알폰소에게 ‘수선화 정원의 약속’을 지키라고 이야기를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16600827869996.jpg‘알폰소 왕자님은,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던 거야……!’

한 번 돌기 시작한 행복회로는 정신없이 돌아갔다.

16600827869996.jpg‘국혼을 무르겠다고 레오 3세 폐하께 말씀드리겠다고 하셨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돼? 이건 나라 대 나라의 협상이라고! 우리 아버지는 에트루스칸이 이번 제의를 절대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어!’

라리에사 대공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16600827869996.jpg‘그리고 나한테 ‘보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잖아. 죄책감은 있다는 거네. 나한테 감정이 없는 게 아니야. 사랑이 별거야? 미안한 마음이 고마운 마음이 되는 거고 그렇게 눈에 들어오고 또 부부가 되면 언젠가는 사랑하게 되는 거지!’

때마침 카를라 부인이 라리에사의 착각에 불을 지폈다.  

16600827870002.jpg“아이 참, 우리 왕자 전하께선 대공녀님을 여기에 두고 어디에 가셨을까요.”

  그녀는 시종을 불러 혹시 왕자 전하를 본 적이 없는지 수소문했다.

16600827870002.jpg“남쪽 출구로 나가시는 걸 보기는 했습니다.”

무도회장인 ‘백합의 방’에서 남쪽 출구로 나가면 발코니와 맞닿은 수선화 정원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16600827870002.jpg“잠시 산책이라도 나가셨나? ‘수선화 정원’은 밤에 가면 볼거리가 딱히 없는데.”

16600827869996.jpg“수선화 정원이요?”

16600827870002.jpg“호호, 설마 정말 밤에 왕자 전하께서 수선화 정원에 가 계시기라도 하겠어요? 거기는 키우는 식물들이 키가 다 낮아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밤에 등을 밝혀 놓는 곳은 아니라서 야간에는 딱히 갈만한 곳이 아니에요. 대공녀님, 왕자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낮에 한 번 데려다 달라고 하세요. 꽃이 만발해서 정말로 아름답답니다.”

  라리에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6600827869996.jpg“네, 꼭.”

  그리고 그녀는 기이한 확신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16600827869996.jpg“저, 잠시 파우더룸에 다녀올게요.”

16600827870002.jpg“어머, 대공녀님. 혼자 가시게요? 제가 동행해 드릴게요.”

  수선화 정원에 가 볼 요량이었다. 라리에사는 알폰소 왕자가 지금 수선화 정원에 있을 거라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이 느낌에 걸기로 했다. 만약 ‘수선화 정원’으로 가서 알폰소 왕자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건 운명이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수선화 정원’에 정말로 꽃만 가득 피어 있다면, 그녀도 순순히 갈리코로 돌아가 처분을 기다릴 것이다.  

16600827869996.jpg“아니에요. 잠깐 숨도 돌리고 싶어서요. 금방 혼자 다녀올게요.”

  라리에사 대공녀는 지금 막 받은 수선화 줄기를 손에 들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 * * 그리고 라리에사 대공녀가 맞부닥친 것은 이 꼴이었다. 달빛 아래서 입맞춤을 나누는 젊은 연인. 알폰소 왕자와, 그녀가 아닌 검은 머리칼의 여자.  

16600827869996.jpg“으아아아악!”

  라리에사는 궁전 쪽으로 돌아오며 비명을 질렀다. 너무, 너무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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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0827869996.jpg“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형제가 한통속이 돼서 나를 속였어! 그리고 더러운 계집애!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

  라리에사 대공녀는 가면무도회 당시 알폰소 왕자와 함께 있었다던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를 생각하며 두 배로 분노했다.  

16600827869996.jpg“내가 머저리 천치 같아 보였겠지! 뒤에서 배를 잡고 비웃었겠지! 저 바보 같은 여자는 자기 남자의 여자를 그 형의 짝이라고 생각해서 잘 대해 준다고!”

  인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레오 3세 앞에서 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가 체자레 백작의 정혼녀라고 이야기했던 것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이런 기분으로는, 이런 표정과 이런 애티튜드로는 도저히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라리에사 대공녀는 ‘백합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팔라지오 카를로에 마련된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 쿵! 무도회에 참석했던 대공녀가 파트너의 에스코트도, 하다못해 수행원도 없이 돌아오자 라리에사 대공녀의 하녀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공녀의 수발을 들기 위해 달라붙었다. 손에 든 시든 수선화를 하녀가 받아가려고 하자, 그제야 자기 손에 아직도 그 수선화가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리에사는 수선화를 냅다 바닥에 던지고는 구둣발로 자근자근 짓밟았다.  

16600827869996.jpg“으이익!!”

  신선했던 굵은 줄기가 으깨지며 하얀 진액이 무어 제국에서 수입해 온 붉은 카페트를 검게 물들이며 스며들었다. 녹색 줄기뿐만이 아니라 노란 꽃 부분도 형태를 알 수 없게 갈아버린 라리에사 대공녀는 아직도 분이 덜 풀렸는지 하녀에게 외쳤다.  

16600827869996.jpg“르비엥 백작을 찾아서 데려와! 당장!”

  * * * 허구한 날 협상장에만 앉아 있다가 모처럼 무도회에 참석하게 된 르비엥 백작은 오늘 기분이 좋았다. 그 좋았던 기분은 라리에사 대공녀가 보낸 수행원이 그를 호출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16600827870002.jpg- “뭐라고? 대공녀님께서 난동을 부리고 계시다고?”

  그는 귀빈석에 앉은 다른 사람들의 귀에 수행원의 전언이 들어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게 깔아 속삭였다.  

16600827870002.jpg- “이유가 뭔지는 아나?”

16600827870002.jpg- “그것까지는 잘……. 대로하여 무도회장에서 돌아오시더니 지금 당장 백작님을 불러오라고만 하셨습니다.”

  부르면 가는 것이 키우는 개의 운명이다. 르비엥 백작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6600827870002.jpg“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아뇨, 아뇨. 금방 돌아옵니다. 조금 이따가 뵙지요.”

금방 돌아온다는 것은 자신의 희망사항일 뿐이었지만. 그렇게라도 말을 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었다. 함께 대화를 나누던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난 르비엥 백작은 종종걸음으로 라리에사 대공녀의 숙소로 향했다. 치렁치렁하게 드리워진 휘장과 태피스트리 사이로 산발을 한 갈색 머리 여자가 울부짖는 모양새가 보였다. 르비엥 백작은 깜짝 놀라 한달음에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16600827870002.jpg“대공녀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라리에사는 그 사이에 온 방 안의 집기를 죄다 부숴놓은 상태였다. 그릇, 촛대, 책같이 작은 물건들은 죄다 산산조각이 나서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협탁이나 일인용 윙체어 같은 작은 가구들도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대공녀의 눈알은 붉었고 손톱은 기물 파손을 하느라 긁히고 다쳐 새빨갛게 피가 맺혀 있는 상태였다.  

16600827869996.jpg“르비엥!”

  라리에사는 백작을 보자 원통함을 숨기지 못하고 외쳤다.  

16600827869996.jpg“그년을, 그년을 가만히 두면 안 돼!”

16600827870002.jpg“‘그년’이 대체 누굽니까?”

16600827869996.jpg“데 마레 추기경의 차녀! 아리아드네 데 마레!”

  라리에사는 흡사 광기마저 느껴지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르비엥 백작을 노려보았다.  

16600827869996.jpg“죽여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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