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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새로 태어난 악녀 (524/733)

<제7화> 새로 태어난 악녀2020.12.27.

중앙 계단은 아찔하게 높았다. 아라벨라는 그 높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아리아드네만 밀쳐 떨굴 수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하지만 열다섯 살과 열 살은 아무래도 체급 차가 있었다. 아라벨라가 아무리 힘을 실어서 뛰어와도 아리아드네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사뿐하게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하필이면 아리아드네 옆에는 대각선으로 이사벨라가 서 있었다. 아리아드네가 길을 비킨 상황에서 아라벨라의 진로는 일직선으로 큰언니, 이사벨라를 향해 곧게 뻗었다.

16630314686215.jpg“어, 어어?”

1663031468622.jpg“응?!”

이사벨라는 뛰어드는 아라벨라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친동생과 정통으로 부딪힌 다음에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 우당탕탕!

1663031468622.jpg“꺄악!”

16630314686215.jpg“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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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벨라는 앞을 보고 정면으로 달려든 덕에 계단 근처에서 난간을 붙들고 가까스로 멈췄다. 하지만 계단을 등지고 서 있던 이사벨라는 마땅히 잡을 것도 없었고 힘을 받아내 줄 지지대도 없었다. 그녀는 중간의 층계참까지 약 한 층 높이를 제대로 굴러떨어져서 계단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에 쓰러졌다. - 털썩! 어찌나 호되게 굴렀는지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1663031468622.jpg“아야…….”

데 마레 추기경 관저의 중앙 계단은 기묘하게 높고 또 좁았다. 깎아지른 경사와 좁디좁은 계단 폭은 정말로 위험해 보였다. 천장이 높은 탓에 비명 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이사벨라의 단말마에 맞춰 데 마레 추기경의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16630314686244.jpg“이게 무슨 소리야!”

요란한 소리에 전용 응접실에서 뛰쳐나온 데 마레 추기경은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잔뜩 겁에 질린 아라벨라, 태연하게 서 있는 아리아드네를 눈으로 훑더니 계단 아래 층계참에 쓰러져있는 이사벨라를 발견하고는 노성을 질렀다.

16630314686244.jpg“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하녀에게 손짓을 해서 이사벨라를 부축하게 했다. 여기저기서 뛰어온 하녀들이 이사벨라를 일으켜 앉히고 주방에서 가져온 주머니로 얼음찜질을 하기 시작했다. 발목을 다친 이사벨라는 제대로 서지를 못 했고 계단참에 주저앉은 이사벨라를 보며 데 마레 추기경은 노호를 질렀다.

16630314686244.jpg“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

이사벨라는 영리하게도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러 보았자 체면만 깎일 뿐이다.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가 묵묵부답하자 아리아드네와 아라벨라를 번갈아 노려보며 추궁했다.

16630314686244.jpg“너희 둘 중 누구 짓이냐?”

아라벨라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더듬더듬 변명을 시도했다. 아리아드네는 저런 기세의 아버지 앞에선 열 살이면 울어버릴 법도 한데, 조리 있게 말도 하는 것을 보니 아라벨라가 꽤나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16630314686215.jpg“아버지, 제가 그런 게 아니고…… 아리아드네가, 아리아드네가……!”

제법인 것과 제법인 아이가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아라벨라의 타깃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은 데 마레 추기경에게 찰떡같이 입력이 되었다.

16630314686244.jpg“아리아드네! 베르가모 영지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런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냐!”

아라벨라는 희생양이 따로 생긴 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층계참에 모여 있던 하녀들은 아리아드네를 아주 신기한 이방인을 보듯이 쳐다보았다. 시골 농장에서 산 카를로 본성으로 복귀한 지 단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루크레치아의 금쪽같은 큰딸을 다치게 하고 데 마레 추기경의 진노를 샀으니 저 아가씨의 훗날은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안타깝다는 듯, 오해가 있다는 듯이 말을 시작했다. 다소곳하면서도 동시에 태연한 태도였다.

16630314690098.jpg“아버지, 영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집 안에서 큰 소리를 나게 해서 송구할 뿐입니다. 거기다가 이사벨라 언니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친 것뿐인데…….”

1663031468622.jpg‘도와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사벨라가 의구심에 찬 눈으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았다.

1663031468622.jpg‘저게 무슨 속셈이지?’

아라벨라는 인상을 찡그리고 아리아드네를 째려봤다. 아리아드네는 자매들의 시선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16630314690098.jpg“이사벨라 언니는, 영지에 있을 때에도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정말로 상냥합니다. 역시 산 카를로 성에서 가장 이름이 드높은 영애입니다. 전 갓 도착했을 뿐인데, 이사벨라 언니에게는 저를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어준 점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를 쓱 쳐다보았다.

16630314690098.jpg“아라벨라는 좀 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라벨라가 장난을 치다가 저를 떠밀었는데, 이사벨라 언니가 절 도와주려다가 계단에서 넘어졌어요. 열 살이면 이제 아이도 아니고 처녀로서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할 때입니다.”

아라벨라는 귀뿌리부터 얼굴이 새빨개졌다. 무서운 데 마레 추기경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시골에서 갓 올라온 어리숙한 계집애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리아드네는 혓바닥에 참기름이라도 발랐는지 겁이라고는 없이 추기경 앞에서 내용을 술술 불어버렸다.

16630314686215.jpg“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라벨라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자신의 아비가 화가 나면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큰언니를 다치게 한 막내딸이 될 수는 없었다.

16630314686215.jpg“이사벨라 언니가 쟤를 도와주려던 게 아니고 옆에 있다가 쟤가 저를 언니 쪽으로 밀었단 말이에요! 쟤가 이사벨라 언니를 다치게 한 거라고요!”

아리아드네는 아라벨라의 대담한 거짓말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객관적인 증거는 없고, 있는 것은 증인 한 명뿐이다.

16630314690098.jpg“제가 비록 시골 영지에서 올라왔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아리아드네는 아래층에 쓰러져 있는 이사벨라를 손으로 가리켰다.

16630314690098.jpg“제가 배움이 짧고 낯설어 믿지 못하시겠으면 이사벨라 언니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아라벨라는 혼란에 빠졌다.

16630314686215.jpg‘이게 무슨 수작이지?’

반면 지난 생애에 에트루스칸 왕국의 궁정을 쥐고 뒤흔들었던 악녀, 이사벨라는 새싹일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이사벨라는 숨 한 번 들이쉴 시간에 정신을 차리고는 곧바로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드라마틱하게 고개를 떨궜다.

1663031468622.jpg“아버지…….”

이사벨라의 결정은 간명했다.

1663031468622.jpg“저는 아리아드네를 도와주려다가 그만…….”

이사벨라는 본인이 착한 사람이 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끝까지 가증을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1663031468622.jpg“아라벨라는 장난을 쳤을 뿐이에요, 아버지. 너무 혼내지 말아 주세요.”

순식간에 우애 있는 큰언니와는 다르게 착한 이복자매를 괴롭히는 못된 아이가 된 아라벨라는 입을 떡 벌리고 이사벨라를 쳐다보았다. 이사벨라는 수줍게 고개를 떨궜고, 아리아드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16630314690098.jpg‘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네가 그러면 그렇지, 이사벨라.’

친동생이건 뭐건, 이사벨라는 본인의 이득을 절대로 놓칠 위인이 아니었다. * * *

16630314686244.jpg“아라벨라! 넌 2주간 방에서 나오지 말고 마른 빵과 물만 먹으면서 기도를 해라!”

16630314686215.jpg“아버지! 전 정말 안 그랬어요!”

16630314686244.jpg“예하라고 불러! 버릇없게 아버지가 뭐냐! 거짓말이 들켰으면 반성이라도 해야지, 뭐? 정말 안 그래? 말대답 한 벌로 일주일 더! 3주간 기도를 해라!”

아라벨라는 바들바들 떨면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사벨라는 동생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발목만 연신 문질렀다.

16630314686244.jpg“이사벨라는 의사를 불러줘라. 루크레치아 이 여자는 어디에 있어!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한 거야!”

집 안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복귀한 첫날부터 데 마레 추기경 관저에 불화의 씨앗을 톡톡하게 뿌린 아리아드네는 홀로 웃었다.

16630314690098.jpg‘하니까……. 이게 되네?’

층계참을 울리는 큰 소리에 아리아드네를 제외한 온 집안 식구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데 마레 추기경은 그마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발을 굴렀다.

16630314686244.jpg“뭐 볼 게 있다고 줄줄이 서서 구경하고 있어! 다 맘에 안 들어, 에잉!”

그는 흰 로브 자락을 떨치며 응접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이사벨라는 발목의 상처에 맞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서 착해 보일 기회가 썩 만족스러웠는지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저택 2층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아라벨라는 하녀장에게 끌려가기 직전에, 표독한 눈초리로 아리아드네를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16630314686215.jpg“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아리아드네는 빙긋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16630314690098.jpg“너, 가엾구나.”

16630314686215.jpg“뭐?”

16630314690098.jpg“아버지 어머니는 이사벨라 언니만 좋아하네.”

아라벨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16630314686215.jpg“너 같은 게 뭘 알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16630314686215.jpg“작은 아가씨, 가시죠. 여기서 큰 소리 내시다가는 추기경 예하께 또 한 소리 들으십니다.”

하녀장 지아다의 만류에 아라벨라는 버티지 못하고 끌려갔다. 아라벨라가 끌려가면서 외치는 천한 것, 못생긴 것, 촌스러운 것 같은 각종 욕설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아리아드네는 드레스 자락을 탁탁 털며 몸가짐을 재정비했다. 모두가 떠나버린 자리에는 분주하게 뒷정리를 하는 이름 모를 하녀들과 계속 추기경의 응접실 문 앞에서 시립하던 빨강 머리 하녀 말레타가 남아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아까보다 더 태도가 깍듯해진 말레타를 쳐다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16630314690098.jpg“자, 갈까?”

  * * *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에게 나머지 두 딸들과 같은 교육을 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이사벨라는 발목이 접질려서 앓아누웠고, 아라벨라는 3주간 감금을 당한 터라 공부를 할 아이는 아리아드네밖에 남지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에게 가정교사 비용을 지출하는 게 아까웠던지, 평소에 오던 가정교사에게 한 달간 휴가를 가라고 일러놓고 다른 가정교사를 데려왔다. 지난 생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이사벨라가 다치고 아라벨라가 근신을 당해서 인과가 바뀐 모양이었다. 그때는 다른 둘의 가정교육 수업에 끼여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진도의 수업에서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었다.

16630314686215.jpg“조반니 선생님이다. 라틴어와 산수를 가르치실 거다. 말 잘 듣거라.”

조반니 선생은 30대의 나이에 건강이 좀 안 좋아 보이는 남자였다. 포도주에 절어 사는 듯 딸기코에 모공이 두드러졌다. 주정뱅이의 체취가 코를 찔렀다. 아리아드네는 조반니 선생을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딱 봐도 멀쩡한 선생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왜 성씨가 아니라 이름을 가르쳐 주는 거지?

16630314690098.jpg“어머니, 선생님을 어떻게 감히 이름으로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조반니 선생님의 성은 어떻게 되시나요?”

루크레치아는 발칵 성을 냈다.

16630314686215.jpg“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조반니라면 조반니인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루크레치아는 뭔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별것 아닌 질문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조반니 선생이란 사람은 실실 웃는 꼬락서니가 더더욱 수상했다. 본인에 대한 호칭을 높이지 말고 편하게 이름을 부르라는 데도 불쾌한 티 하나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16630314690098.jpg‘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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