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왕자님과의 첫 만남2021.01.06.
전생에서 말레타의 여동생은 랑부예 구휼원에서 굶어 죽었다고 들었다. 아리아드네는 말레타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으면 널 여기다 두고 갈 거라고. 네 동생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에……, 병자의 목욕 봉사는 있습니다만…….”
“그럼 그것으로 하겠습니다.”
* * * 관리가 말끝을 흐린 이유가 있었다. 말이 좋아 목욕 봉사지 실상은 참혹했다. 외따로 떨어진 기다란 회랑 안에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병자들이 더러운 지푸라기를 깔고 가득 뉘어 있었다. 가시같이 마른 그들의 몸 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을 제대로 돌볼 시설도, 물자도, 사람도 없었다. 제아무리 왕비의 예산만으로 운영되는 구휼원이라서 재정이 부실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악의적으로 겉껍데기만을 세워 놓고 빈민을 일부러 굶겨 죽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그 양상은 끔찍했다.
‘이래서 관리 양반이 날 보내고 싶지 않아 했구나.’
여유 있게 생각에 잠겨 있는 아리아드네와는 달리 말레타의 표정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이 난장판 안에 있다가 이사벨라가 건져준 것이 겨우 2년 전 일이었다. 굶주림, 추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기억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말레타는 정신없이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병자를 찾아 주변을 훑었다. 2년 전, 자기가 버리고 떠난 여동생을 찾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병자를 찾는 것은 아리아드네도 마찬가지였다.
‘저 아이인가.’
아리아드네가 병자들 사이에 작은 소녀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말레타는 깜짝 놀랐다.
“아가씨, 잠깐만요……!”
동생과 마주치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 말레타가 새파랗게 질려서 아리아드네의 팔목을 잡았다. 옷 밖으로 드러낸 팔목과 말레타의 손, 그러니까 맨살과 맨살이 맞닿았다. - 파지직! * * * 강렬한 어지럼증이 몰려왔고, 번쩍이는 번개와 혼몽한 구름이 머릿속을 순간 스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리아드네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보였다’.
- ‘난 한 명밖에 데려갈 수가 없어. 내가 둘 중에 누구를 데려가야 하겠니?’
이사벨라였다. 이사벨라가 랑부예 구휼원의 바깥쪽, 그러니까 아프지 않은 빈민들이 수용된 곳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리고 더 꾀죄죄한 말레타와, 말레타와 똑같은 붉은 머리를 한 말라비틀어진 주근깨 소녀가 서 있었다.
- ‘둘 중 누가 더 똑똑하고, 누가 더 열심히 일하니?’
말라깽이 소녀는 이사벨라에게 애원을 했다.
- ‘아가씨, 저희 자매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왔습니다. 열심히 일할 테니 제발 같이 거둬 주셔요!’
이사벨라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 ‘자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내가 왜 너희를 둘 다 데려가야 하는지가 아니라 내가 왜 ‘너’를 뽑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라고.‘
어린 말레타는 옆의 말라깽이 소녀를 밀치고 이사벨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하고 두 손을 모아 쥔 말레타는 이사벨라에게 간곡하게 외쳤다.
- ’고귀하신 아가씨! 산차는 손버릇이 나쁘고 불치의 기침병이 있습니다!‘
산차는 경악한 표정으로 말레타를 돌아보았다. 말레타는 이를 악물고 산차 쪽을 외면했다.
- ’한 명만 데려가신다면 단연코 저입니다! 쟤는 너무 어려서 일손에도 도움이 안 될 거고 어린 쥐처럼 약하고 비실비실해요! 소처럼 일하겠습니다! 데려가 주십시오 아가씨!‘
이사벨라는 흥미롭다는 눈초리였다.
- ’너, 야심이 있구나?‘
-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가씨!‘
- ’그래, 너로 하자.‘
이사벨라는 느릿하게 말레타를 데리고 방향을 돌려 랑부예 구휼원의 후원을 떠나기 시작했다. 산차는 정말로 말레타가 자신을 두고 나가버린다는 사실에 경악해서 발악하듯이 외쳤다.
- ’언니! 언니!‘
그 뒤로 말레타가 급하게 어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쉿! 가만히 있어! 내가 저 집에 가서 급여를 타면 너한테 보내줄게! 돈을 모아서 너를 구휼원에서 데리고 나올게. 가족 중의 한 명이라도 잘 되어야지 전부가 다 잘 되는 거야. 알았지?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
* * *
“아가씨, 아가씨?”
말레타가 놀라서 아리아드네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말레타가 허락도 없이 몸에 손을 댄 것이 기분이 나빠서 말레타의 손을 '탁' 쳐서 떨궜다. 말레타는 멋쩍어서 손을 내리고는 아리아드네에게 재차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갑자기 꼼짝도 안 하시고 굳으시기에 깜짝 놀랐어요.”
“내가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느냐?”
“엄청 짧았습니다, 한 2-3초?”
“그럼 됐다.”
내가 본 것이 무얼까? 과거 회상? 진실일까, 아닐까?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말레타를 모르는 척하고 빈민들 사이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붉은 머리 소녀에게 다가가 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짐짓 다정하게 소녀의 이마를 젖은 헝겊으로 쓸어 준 아리아드네는 나직하게 물었다.
“상태는 좀 어떠니?”
돌아 눕힌 얼굴은 열 두세 살 남짓인 어린애였다. 아직은 젖살이 올라 있을 나이인데도 뺨이 움푹 들어갔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주근깨 소녀는 연한 녹색 눈을 떠서 아리아드네와 말레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랑부예 구휼원에 들어온 이후에 너희 가족이 너에게 도움을 보내준 적이 있느냐?”
주근깨 소녀는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쳤다. 말레타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불치의 기침병이 있느냐?”
소녀의 도리질이 더욱 강렬해졌다. 말레타의 얼굴색은 이제 숫제 저승사자가 자신을 만나러 온 것처럼 창백했다.
“말레타? 이 아이를 아니?”
“저기……, 그것이…….”
고갯짓을 할 힘도 간신히 짜낸 주제에 당황한 말레타를 향해 증오와 원한이 어마어마하게 쌓인 눈빛을 쏘아 보낸 주근깨 소녀는 죽을힘을 다해 아리아드네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가씨……!”
* * *
“아무리 추기경 예하의 따님이라도 특별대우는 불가합니다.”
관리는 고개를 저었다. 주근깨 소녀 산차의 구명을 부탁하자 나온 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산 카를로에서 두 번째로 권력 있는 남자의 딸이었지만 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었다. 권력 있는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를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 외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인 명의의 돈도, 권력도 없었다. 돈이 없으니 하다못해 의사를 불러줄 수도 없었다. 죽음까지 딛고 돌아왔으나 여전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새장 안의 새였다.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치 제 몫의 먹을거리는 그 소녀에게 양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아드네 몫으로 나온 식량이라고 해 봤자 마른 빵 반 덩이와 깨끗한 물이 전부였다. 아리아드네는 말레타를 시켜 마른 빵을 팔팔 끓인 물에 이겨서 미음처럼 만들어서 산차에게 먹였다. 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암울한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산차는 정말로 굶은 것에 불과했는지, 약간의 음식만으로도 하루 이틀 뒤에는 길에서 주워온 새끼고양이가 때깔이 피듯이 점차 왕성해졌다.
"말레타. 이리 좀 와 보렴."
아리아드네는 수녀의 숙소에서 머물면서 일전의 '환상'에 대해서 거듭 생각을 해 보았다. 산차에게 환상에서 보았던 대로 질문을 하니 아귀가 맞아 들어갔던 것과, 말레타의 기겁하는 반응을 보면 '환상'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까처럼 내 손목 한 번 잡아봐."
말레타는 머뭇거리면서 아리아드네의 손목을 한 번 더 잡았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다고 항상 환상이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 * * 자기 몫의 음식을 산차에게 밀어주고 나니 아리아드네는 금방 핼쑥해져 갔다. 산차를 돌봐줘야겠다고 우기니 관리는 아리아드네를 다시 배식줄로 돌려보냈다. 대회랑에서 계속 목욕 봉사를 시키다 동정심 많은 귀한 영애가 또 다른 불쌍한 병자에게 꽂힐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아, 배고프다.’
아리아드네는 배식줄에 서서 배식용 국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였다면 줘도 안 먹을 멀건 국이었지만 지금은 표면에 자르르 떠 있는 기름기마저 너무 유혹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국에는 다 임자가 있었고 구휼원의 빈민들은 음식에 대해서는 매우 진지했다. 국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채 오전 배식을 마친 아리아드네는 그 전전날 저녁부터 한 끼도 먹지 못한 참이었다. 그녀는 구휼원의 나무 그늘에 기대어 잠시 주린 배를 잊으려 했다. 그때, 사과 하나가 아리아드네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누구?’
손의 주인을 쳐다보니 눈부신 금발과 우윳빛 이목구비를 가진 잘생긴 소년이었다. 그는 공단으로 만든 궁정 복식을 입고 사과를 내밀고 있었다.
“먹을래?”
알폰소 왕자였다. 아리아드네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보다 훨씬 어린, 아직 자라는 중의 풋풋한 버드나무 가지 같은 소년이었다. 어딘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는 이미 체자레의 손에 죽었는데. 아리아드네는 손을 뻗어 그가 건넨 사과를 받아들었다. 사과를 쥔 손과 사과를 받는 손가락 끝이 서로 닿았고, 그 온기를 느끼고서야 아리아드네는 전율했다. 과거가 정말로 돌아왔다. 그녀의 죄가 아직 저질러지기 전의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배가 고파 보이길래…….”
그는 약간 쑥스러운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큰 입 사이로 정갈한 흰 치아가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눈앞의 소년이 왕자임을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평대어로 대답을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서른 즈음의 여자로서의 본능이었다.
“고마워.”
소맷자락에 사과를 쓱 닦은 그녀는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 와삭! 사과는 꿀맛이었다. 삼 일째 굶는 와중에 혀끝에서 단맛이 느껴지니 왕자고 뭐고 참기가 힘들었다. 과즙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한 입 들어가고 두 입 들어가니 사과는 순식간에 뼈대만 남았다. 아리아드네는 그제야 눈앞에 왕자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황한 그녀는 쑥스러워하며 급하게 변명을 댔다.
“사흘이나 굶었는데 덕분에 요기했네.”
민망함을 덮어보기 위해서 사흘이나, 에 방점을 두어 강조를 한 것이었는데, 알폰소 왕자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량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픈 아이에게 음식을 양보하고 있다며.”
“아……. 어쩌다 보니.”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는 먹을 건 양보 못 하겠던데.”
아리아드네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본인은 몰랐지만 배꽃같이 해사한 미소였다.
“나도 그래.”
왜인지 알폰소 왕자 앞에서는 착한 척을 하기가 민망했다. 그녀는 자기가 죽여버린 남자 앞에서 가녀린 척을 할 만큼 대담하지는 못했다.
“구휼원 빵이 맛이 없어서 양보했지, 맛있는 음식이었으면 양보 못 했을걸?”
대신 나온 건 센 척이었다. 알폰소 왕자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리아드네에게 반문했다.
“구휼원 빵이 맛이 없어?”
“완전 퍽퍽해. 우유나 버터는 아예 안 들어갔고 그냥 밀이랑 소금 맛이야.”
“그랬구나…….”
알폰소 왕자는 쓰게 웃었다. 아마 구휼원 측에서 그에게는 진짜 구휼원 음식을 안 내주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굳이 그가 왕자라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고, 잠시 침묵이 깔렸다. 죽여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행히 왕자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넌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
“내일.”
이사벨라가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리아드네는 삼 일째 되던 날인 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터이니, 오늘 알폰소 왕자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왕자는 상냥하게 물었다.
“그때까지 계속 먹을 거 양보할 거야?”
“음, 오늘까지만 하고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누가 사과를 준 덕분에 이틀 더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리아드네는 씩 웃었다. 알폰소 왕자는 약간 고민이 되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머니 안에서 손수건에 싼 쿠키를 꺼내 내밀었다.
“좀 더 끼니를 때울 만한 거였으면 좋겠지만……, 가진 게 이것밖에 없어.”
아리아드네는 손수건에 싸인 쿠키를 받아들었다. 손수건 모서리에 금실로 조그맣게 ‘AFC’라고 자수가 놓여있었다. Alfonso de Carlo의 이니셜이었다.
“잘 먹을게. 고마워.”
손수건 채로 먹을 것을 받아가는 훌쩍 큰 키의 깡마른 소녀를 보며 황금빛 머리칼의 소년이 물었다. 오후의 해가 절정에서 떨어져 가며 내뿜는 햇빛이 찬란하게 소년과 소녀를 비췄다.
“너는 이름이 뭐야?”
“아리아드네. 아리아드네 데 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