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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왕궁으로의 첫 번째 초대 (528/733)

<제11화> 왕궁으로의 첫 번째 초대2021.01.10.

16630314933398.jpg“더러운 병이 옮았을지도 모르니 깨끗한 것을 확인할 때까지는 들어오지 못한다!”

  - 철컹. 루크레치아와 이사벨라는 본인들의 호언장담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그들은 방역을 빌미로 아리아드네가 랑부예 구휼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저택 외부의 마구간에 그녀를 가둬놓았다. 우스운 점은 아리아드네는 격리를 핑계로 삼아 가둬두었으면서 말레타와 산차는 바로 데려갔다는 점이었다.

16630314933398.jpg“이 아이는 뭐니?”

산차와 처음 마주친 루크레치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아리아드네가 담담히 대답했다.

16630314933406.jpg“구휼원에서 데려온 아이입니다.”

16630314933398.jpg“도대체 넌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대체 네가 뭐라고 바깥에서 사람을 마음대로 거둬와?”

루크레치아는 정말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16630314933398.jpg“너 정말 당돌하구나. 말로는 죄송하다, 잘못했다 하면서 어쩌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렇게 제멋대로니?”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는 산차에게 턱짓을 하며 소리쳤다.

16630314933398.jpg“나는 이 비렁뱅이 데리고 있을 수 없다. 뭐가 옮았을지도 모르겠고, 썩 내쫓거라!”

하인들이 산차를 끌어내려 다가가려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루크레치아에게 바쳤다.

16630314933406.jpg“어머니, 이것을 보아 주십시오.”

16630314933398.jpg“이게 뭐니?”

루크레치아가 손수건에는 손가락도 대지 않은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손수건을 훑어보았다. 손수건의 재질은 그 모서리에 레이스가 장식된 아사면 거즈였다. 아리아드네의 물건치고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

16630314933398.jpg“설마, 훔쳤니?”

16630314933406.jpg“그럴 리가요!”

루크레치아가 끝내 손수건을 받아 들지 않자 아리아드네는 ‘AFC’라고 금실 자수가 놓인 면을 앞으로 내밀어 루크레치아에게 보였다.

16630314933406.jpg“알폰소 데 카를로 왕자님의 것입니다.”

루크레치아의 눈썹이 대번에 올라갔다. 이사벨라의 눈빛도 달라졌다.

16630314933406.jpg“왕자님을 구휼원에서 우연히 뵈었습니다. 저는 이 아이를 구휼원에 있는 동안만 간호해 줄 생각이었는데, 왕자님께서 빈민을 거두는 데 마레 추기경의 은덕이 매우 높다며 치하를 하셨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루크레치아의 눈치를 살피며 마저 고했다.

16630314933406.jpg“알폰소 왕자님께서는 제가 이 아이를 데려가서 일자리를 주는 것처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차마 아니라고 고할 수가 없어서……. 추기경 예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루크레치아는 알폰소 왕자를 팔건 데 마레 추기경을 팔건 아리아드네가 치는 사고를 더는 받아줄 마음이 없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루크레치아가 친정 식구들에게 가정교사를 핑계 삼아 돈을 빼돌리던 일로 아직도 그녀의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차였다. 아리아드네 때문에 필요도 없는 추가 지출이 적힌 가계부를 데 마레 추기경에게 내밀고, 아리아드네 때문에 추기경의 화를 받아낼 생각을 하자 두통이 밀려오며 급작스레 짜증이 치솟았다.

16630314933398.jpg“입만 살아서! 말은 잘하지! 너희 둘 다 나가! 손잡고 구휼원에나 가 버려! 나를 뭐로 보고 그렇게 제멋대로야?”

루크레치아의 분노가 끓어오르는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이사벨라의 욕심이었다.

16630314941042.jpg“알폰소 왕자님……? 너 어떻게 그분을 만났어?”

이사벨라의 보라색 두 눈이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최대한 이사벨라를 자극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16630314933406.jpg“랑부예 구휼원이 왕비 폐하께서 관장하시는 기관이다 보니 시찰을 나오셨나 봐요. 알폰소 왕자님께서 구휼원 전체 배식에 나와 계셨어요.”

그 말을 들은 이사벨라는 대뜸 루크레치아를 쳐다보며 뒤돌아서 조르기 시작했다.

16630314941042.jpg“엄마! 다음 주엔 랑부예 구휼원에 저도 갈래요!”

16630314933398.jpg“이사벨라!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가!”

루크레치아는 이사벨라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16630314933398.jpg“왕자를 보려면 대미사도 있고 티파티도 있어! 구휼원은 안 돼!”

이사벨라는 약간 성이 난 것 같았지만 날숨을 푹 쉬더니 표정을 갈무리하고 루크레치아를 보면서 달콤하게 웃었다.

16630314941042.jpg“엄마, 그러면 구휼원은 안 갈 테니 대신 저 거지 아이는 거둬주세요.”

16630314933398.jpg“이젠 너까지 네 맘대로 구니? 아주 이 엄마가 만만하지?!”

16630314941042.jpg“아이, 참 엄마. 티파티에서 왕자님을 뵈면 나눌 대화거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이사벨라는 루크레치아를 타박하며 도리어 성을 냈다.

16630314941042.jpg“아빠가 알폰소 왕자님이랑 아무것도 다리를 안 놔 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고 있잖아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루크레치아가 적반하장인 이사벨라의 생떼에 당황한 사이에, 이사벨라는 아리아드네에게로 다가가서 손수건을 잡아당겼다.

16630314941042.jpg“이건 내가 챙겨둘게.”

아리아드네는 무의식중에 든 반감에 손수건을 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손수건을 안 내줄 방도가 없어서 약간 버티다가 내주고 말았다. 이사벨라는 손에 알폰소 왕자의 손수건을 쥔 채로 아리아드네를 쳐다보며 생긋 웃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찰랑 흔들리며 그녀의 작은 이목구비가 요정같이 빛났다.

16630314941042.jpg“수고했어.”

아랫사람을 부리는 듯한 이사벨라의 말투에 아리아드네는 어금니를 깨물며 표정 관리를 했다. 이사벨라의 시종 노릇. 전생에 이어 현생에도 여전하다.

16630314933406.jpg“아니에요 언니.”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를 바깥 마구간에 데려다 놓을 것을 명하고 이사벨라와 나머지 식솔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레타와 산차는 엉거주춤하게 그 무리의 끝을 따라갔다. 루크레치아가 뒷모습을 보이고 나머지 식솔들도 그녀를 따라가며 좌중이 부산해지자 그 틈을 타서 산차가 잠시 아리아드네 곁으로 다가왔다. 작고 마른 소녀가 가만히 속삭였다.

1663031494363.jpg“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가씨.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 * *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화창한 날씨에 엉성한 널빤지를 벽으로 삼고 지푸라기를 매트리스 삼아 마구간 생활을 하고 있던 아리아드네는 뜻밖의 기별을 받았다.

16630314943633.jpg“아리아드네 아가씨, 마님께서 나오셔서 씻고 준비하시랍니다.”

말레타가 아직 견습인 산차를 데리고 와서 감금 해제를 알린 것이다. 감금 열흘째였다.

16630314933406.jpg“한 달은 각오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지?”

말레타가 대답을 하기 전에 총기 있는 산차가 대뜸 앞서서 대답을 했다.

1663031494363.jpg“왕궁에서 마차가 왔어요! 아리아드네 아가씨를 특별히 모셔오라고 하셨대요!”

아리아드네는 씨익 웃었다. 루크레치아에게 마구간 열흘의 빚을 갚아줄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였다. 아리아드네는 하녀들의 뒤를 따라 3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조그만 다락방 안에는 단정한 상아색 실크 원피스 한 벌과 속에 받쳐 입을 귀족 영애의 순백색 슈미즈 한 벌이 놓여 있었다. 별달리 비싼 옷은 아니었다. 하지만 회귀 후 이제껏 손을 대어 본 것들 중에서는 가장 예쁜 옷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는 옷에 욕심을 내는 대신에 빙그레 웃으며 산차를 돌아보았다.

16630314933406.jpg“얘, 나랑 옷 바꿔 입기 놀이하자.”

1663031494363.jpg“네?”

16630314933406.jpg“슈미즈. 네가 저걸 입어. 내가 네가 지금 입고 있는 걸 입을게.”

하녀들도 놀랐다. 그에 더해서, 아리아드네가 자신이 아닌 산차를 지목하자 말레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산차는 아가씨가 시키시니까 어리벙벙하게 입고 있던 제 옷을 벗어 아리아드네에게 건네주었다. 아리아드네는 속에 걸친 슈미즈를 하녀 산차의 것과 바꿔 입고, 그 위에 데 마레 가문에서 내준 원피스를 입었다. 슈미즈의 하얀 레이스가 드러나야 할 부분에 누런 면 속옷이 대신 보였다. 아리아드네는 머리를 단정히 빗어 외출 복장의 구색만 갖추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 *

16630314941042.jpg“엄마, 엄마! 마르그리트 왕비님께서 왜 갑자기 우리를 미사에 초대하신 걸까요?”

16630314933398.jpg“우리 예쁜 이사벨라의 이름을 듣고 얼굴이 궁금하셨나 보지!”

마차 안에서는 들뜬 모녀의 ‘도끼병’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던 참이었다.

16630314941042.jpg“왕자님도 오시겠죠? 혹시나 해서 손수건도 챙겨 왔어요.”

이사벨라는 AFC라는 이니셜이 있는 손수건을 팔랑여 보였다. 이사벨라는 그 손수건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향수를 뿌려 간직하던 참이었다. 이사벨라 본인도 도자기 인형같이 꾸미고 있었다. 발그레하게 사랑스러운 피부에는 연지를 덧발라 홍조를 띄웠고, 속눈썹은 석탄가루를 기름에 개어 발라 진하고 두껍게 돋웠으며, 아마빛 머리카락은 포르토 공화국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반만 묶고 나머지는 웨이브지게 내린 채였다. 입은 옷은 아리아드네의 것과 같은 상아색 외출용 드레스였지만 그 고급스러움이 비교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소녀가 심혈을 기울여 꾸미니 주변의 모든 것은 광원이 꺼지고 이사벨라 혼자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에트루스칸 왕국의 관습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영애는 색조 화장품을 사용할 수 없었다. 민낯의 초라한 아리아드네는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이사벨라와 비교되지 않도록 최대한 마차의 구석 쪽에 앉아서 저 대환장 모녀를 버텼다. - 히힝! 말의 투레질과 함께 마차가 산 카를로 중심부에 있는 팔라지오 카를로에 도착했다. 궁전의 외부 입구를 지나 내부 정문에서 멈춘 마차에서 내린 다정한 모녀와 그 뒤를 따르는 아리아드네를 궁의 관리가 맞이했다.

1663031494363.jpg“데 마레 추기경의 일가를 환영합니다.”

관리는 세련되게 루크레치아를 ‘부인’이라고 부른다거나, 성직자의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피해갔다. 대신 말끔한 궁정 에티켓으로 세 명을 마르그리트 왕비의 소미사용으로 사용되는 외부 응접실로 에스코트했다. 검소하지만 고상한 작은 미사당이었다. 소미사당의 제단에는 흰 법복을 입은 사제가 막 입을 열고 있었고, 머리에 미사포를 쓴 마흔 언저리의 기품 있는 부인이 맨 앞줄에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시녀 두어 명이 함께 기도를 올리려던 참이었다. 사제는 갈리코 왕국어로 미사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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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0314933406.jpg‘마르그리트 왕비다.’

아리아드네는 전생에서 마르그리트 왕비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초상화에서의 모습으로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실 초상화를 보지 못했더라도 한눈에 알아챘을 것이었다. 왕비의 기상과 차림새로 보아 고귀한 부인인 것이 대번에 티가 났다.

16630314933398.jpg- “어, 어떻게 해야 하지?”

왕족을 알현해 본 경험이 전무한 루크레치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서 이사벨라에게 귓속말을 했다. 왕비 폐하를 알현하면 제일 먼저 인사를 올리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기도 중인 왕비에게 말을 걸자니 큰 결례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아드네는 우왕좌왕하는 두 모녀를 흘긋 쳐다본 뒤, 침착하게 마르그리트 왕비에게서 서너 줄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서 따라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16630314941042.jpg- “엄마!”

이사벨라는 과연 눈치가 빨랐다. 이사벨라는 루크레치아의 옆구리를 찔러 아리아드네 쪽을 보게 하고는 얼른 아리아드네의 옆자리에 앉아 같이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아리아드네가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한 것이 짜증이 나서 눈알을 한 번 굴리기는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큰딸이 자리를 잡자 루크레치아도 쭈뼛쭈뼛 그 옆에 앉아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And therefore the Gon of Jesarche sacrificed himself and saved the sinners, for they are imperfect yet still his children.”  

1663031494363.jpg[“-그리하여 예사크의 곤께서는 본인을 희생하여 불완전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사제의 기도가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We can only ponder what went through Gon of Jesarche’s mind when he sacrificed himself for the immoral, selfish, dundering ones under his wings. The noble, rich, witful or spiritual ones must care for the others first before saving themselves in order to replicate Gon of Jesarche’s way of living. Amen.”  

1663031494363.jpg[“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이고, 똑똑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자기 한 몸을 바치면서 예사크의 곤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가진 자들은, 그것이 재물이건 지위이건 영성이건,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타고나지 못하였으나 항상 추구하여야 하는 선함일 것입니다. 아멘.”]

16630314948942.jpg“아멘.”

소미사당에 있는 여인들의 목소리가 다 함께 울렸다. 왕비의 눈에 띄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이사벨라의 ‘아멘’ 소리가 유독 높고 낭랑했다. 이사벨라는 미사의 내용을 한 마디라도 알아듣기는 했을까? 아리아드네는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다가, 본인이 동요하는 것을 깨닫고 미간 주름을 예쁘게 잘 폈다. 저렇게 억지로 눈에 띄고 싶어서 나대는 것은 사실 멍청한 짓이었다. 이사벨라 본인도 지금보다 열 살만 더 먹었으면 저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걸쳐서 아리아드네를 교묘히 괴롭혔고 결국에는 서쪽 탑에 처박아 넣는 데에 성공한 그녀의 잔인한 숙적도 지금은 열일곱 살짜리 사춘기 소녀일 뿐이었다. 유독 높은 ‘아멘’ 소리에 미사포의 귀부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아들과 똑같이 찬란한 금발이었다. 마침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온화한 이목구비를 감싸 안았다. 왕비의 표정은 인자하되 그녀의 청회색 눈은 차가웠다. 그녀의 시선이 이사벨라에게서 멈췄다. 왕비의 눈길을 보고, 이사벨라의 옆자리에 앉은 아리아드네는 공손히 고개를 한 번 더 숙여 보였다. 마르그리트 왕비의 눈길이 본인에게 쏠려 있는 것을 깨달은 이사벨라는 관심을 받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입을 열었다.

16630314941042.jpg“어머나 세상에……!”

모두의 눈길이 이사벨라에게 확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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