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7화> 이사벨라 (534/733)

<제17화> 이사벨라2021.01.31.

16630315311234.jpg“아세레토에서 성인이 오셨다면서요.”

16630315311234.jpg“쉿! 아직 성인은 아니지! 성황청에서 공식으로 추봉한 적이 없잖소. 입조심해요.”

16630315311234.jpg“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세레토에서 온 사도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덕이 높은 학자라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대!”

아세레토는 에트루스칸 왕국의 하단에 있는 공국이자 거대한 섬이었다. 인종도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같은 도량형, 같은 화폐를 사용했지만 말씨도, 민족성도, 풍습도 에트루스칸 왕국과는 조금씩 달랐다. ‘아세레토의 사도’는 그 아세레토 공국에서 설교로 인망을 얻은 사제였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예사크의 곤’은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이고, 평범한 인간인 우리들도 노력하면 예사크의 곤처럼 훌륭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의 학파가 되어서 작금에 와서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구름떼처럼 많게 되었다. 기득권에게는 마땅치 않은 현상이었다. 루도비코 법황을 따르는 자들은 성부설과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며 트레베로에서 공의회를 열어서 예사크의 곤이 과연 신의 아들인지 사람의 아들인지 끝장 토론을 하여 결론을 내자고 했다.

16630315311234.jpg- "예사크의 곤께서 어떤 분이신지 신학적으로 정립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할 문제일세."

16630315311234.jpg- "자연스럽게 논의가 흘러가도록 두었다가는 아세레토 지방은 대륙 본토와 다른 내용의 종교를 믿게 될 거요."

16630315311234.jpg- "진정한 진리를 중앙대륙에도 알게 할 기회입니다!"

다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트레베로 공의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 대륙의 주교위 이상의 성직자는 원칙적으로 대륙 북부 성황청 직할령인 트레베로로 모여서 트레베로 공의회에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데 마레 추기경은 루도비코 법황의 계파에 속한 성직자가 아니었고, 루도비코 법황은 안정적인 득표수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계파가 아닌 자는 별의별 이유를 다 붙여서 트레베로로 오지 못하게 했다. 데 마레 추기경도 ‘소는 누가 치느냐’의 논리로 산 카를로에 남아 있게 되었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것은 이 모든 논란의 중심인 아세레토의 사도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주교가 아니라 평사제였기 때문에 트레베로 공의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대신 그래서 루도비코 법황의 주선으로 문명화된 속세간의 정수인 에트루스칸 왕국의 수도인 산 카를로에 초대받아, 루도비코 법황의 눈엣가시인 데 마레 추기경과 셋트로 묶여 추기경 대신 대미사의 설교를 맡게 된 것이 오늘의 전말이었다. * * * 밖에선 아세레토의 사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백성들이 뭉게뭉게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 앞 광장에 모여들고 있던 시간에, 데 마레 추기경의 식솔들은 대미사에 참석하기 위한 몸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1663031531126.jpg“좀 더 모아! 고무를 꽉 조이라고!”

이사벨라는 최근에 ‘가슴 주머니’라고 불리는 물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슴팍이 훌빈한 이사벨라가 어머니의 풍만한 데콜테를 보고 따라 하기 위해서 고안한 물건이었는데, 집에 도착한 보따리장사가 무어 왕국에서 생산된 제품이라고 내놓자마자 이사벨라가 가격조차 묻지 않고 잡아챈 이후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템이 되었다. 이사벨라는 가슴 주머니만으로는 가슴이 모이지 않아서, 가슴 주머니 안에 솜뭉치를 넣고 그 위를 넓은 광목으로 다시 한번 칭칭 동여맸다. 그 위에 비로소 데콜테가 깊게 파진 에트루스칸 왕국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으면 없는 것이 있는 듯한 완벽한 착시 현상을 만들어냈다.

16630315311264.jpg“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세요!”

아리아드네를 떠난 이후로 이사벨라 옆에 착 붙여서 목숨을 걸고 아부를 떠는 중인 말레타가 소리 높여 이사벨라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16630315311264.jpg“화장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1663031531126.jpg“타란토 산 진주 가루로. 볼연지와 입술연지는 가에타 산 장미수로.”

산 카를로에서 화장은 금기시되는 일이었지만 누구나 다 하는 일이었다. 민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를 최고의 미인으로 쳤지만 도대체 그 누가 이 산 카를로에서 공정 경쟁을 한단 말인가. 귀부인들은 예외 없이, 화장한 티가 나지 않게 조금씩 얼굴을 손봤다.

16630315311264.jpg“천재적이세요 아가씨. 장미수로 다들 목욕만 했지 입술을 물들일 생각은 아무도 못 했을 거예요.”

이사벨라는 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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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카를로 전체에서 몸단장 방면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을 한 명만 꼽자면 이는 단연코 이사벨라 데 마레였다. 이사벨라의 라틴어 교습이나 궁정 예법이 진도가 느리다고 탓할 것도 없었다. 이사벨라는 느리거나 아둔한 학생이 아니었다. 매우 영리하고 또 효율적인 공부를 추구하는 종류의 학생이었다. 다만 그녀는 온종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떤 볼연지가 자신의 보라색 눈동자에 가장 어울릴지, 어떻게 눈썹을 뽑아야 타고난 듯 고르게 난 아치가 생길지를 고심했기 때문에 라틴어, 신학, 역사나 궁정 예법 따위에 쓸 시간이 모자랐을 뿐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기 마련이다, 보통은.

1663031531126.jpg“드레스는 저번 달에 새로 맞춘 것으로 하자.”

하늘색 비단 드레스의 옷깃은 황금사 레이스로 장식했고, 깊게 파인 데콜테 위로는 굵은 알의 긴 진주 목걸이를 걸쳤다. 진주 목걸이에는 손바닥만 한 황금 십자가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가슴 주머니로 만들어낸 가슴골에 십자가 펜던트의 끝이 딱 닿았다. 이사벨라는 펜던트가 흔들거릴 때마다 시선이 닿는 거리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리란 사실을 매우 잘 알았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1층으로 내려가며 그녀는 남자들이 시선이 펜던트와 가슴골에 모일 때 어떻게 그 시선을 짐짓 모른 척할지를 고심했다.

1663031531126.jpg‘고개를 옆으로 돌릴까? 옆 사람과 대화를 할까? 누구랑 대화하지? 아리아드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이사벨라는 1층 현관에서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는 본인의 배다른 여동생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1663031531126.jpg‘쟤는 왜 저런 꼬락서니로 다닐까? 본판은 반반하니 손만 좀 보면 훨씬 괜찮을 텐데.’

화사한 하늘색 꽃다발 같은 이사벨라와 다르게, 아리아드네는 단출한 검은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얌전하게 하나로 땋아 올렸고, 민낯에 귀걸이는 아예 없었다. 장신구라고는 목에 걸친, 가느다란 줄에 걸린 은으로 만든 조그만 십자가 하나뿐이었다. 절대로, 무엇으로 보나 이 배다른 여동생이 그녀의 위치를 위협할 수는 없었다. 이사벨라는 그만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루크레치아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1663031531126.jpg“엄마, 저 애 꼬락서니를 보세요. 대미사에 가는데 저렇게 입혀서 가면 또 남들이 뭐라고 해요.”

루크레치아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녀는 늘 장녀에게 약했다.

16630315318952.jpg“지아다. 내 금귀걸이를 쟤한테 가져다줘라. 두 번째 상자 맨 아랫단에 넣어둔 것으로.”

‘금’이라는 이야기에 아리아드네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마지못해 하녀장을 시켜 아리아드네에게 줄 귀걸이를 가져와서 감정이 들어간 우악스러운 손놀림으로 아리아드네에게 채워준 루크레치아는 두 자녀들과 군식구 하나를 재촉해서 서둘러서 마차에 태웠다.

16630315318952.jpg“자자, 어서 타렴! 늦으면 큰일 난다!”

순은으로 치장한 화려한 마차를 타고 광장을 가득 메운 가난한 인파들 사이를 헤치며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으로 진입하는 것은 언제 해도 짜릿했다.

16630315311234.jpg“비켜라! 말에 치이고 싶지 않으면 모두 썩 비켜!”

16630315311234.jpg“아이고, 저건 뉘 댁 마차래!”

16630315311234.jpg“추기경의 마차이지 않소!”

마부가 채찍으로 빈민들을 후려치며 길을 뚫을 때 창문에 쳐진 투명한 커튼 사이로 빈민들의 당황하는 표정, 낭패스러운 얼굴들을 보는 것은 이사벨라의 가장 좋아하는 취미 중 하나였다.

1663031531126.jpg‘채찍에 맞을 뻔하니까 그제야 도망치는 것 좀 봐, 좀 일찍 일찍 비키지. 저 게으른 가난뱅이 같으니.’

광장에서 비둘기를 쫓는 것과 똑같은 짓이었지만 비둘기보다는 사람을 쫓는 것이 훨씬 신났다. 늘 공허하고 지루한 그녀의 일상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비로소 이사벨라는 정신이 번쩍 들며 살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산 에르콜레 대성황당에 진입한 다음의 상황도 언제나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 철커덩! 배랑에 위치한 중앙 문이 요란하게 양옆으로 젖혀졌다. 그들은 남들이 다 옆에 난 쪽문으로 들어갈 때 대성황당의 맨 앞에 있는 거대한 정문으로 입장해서,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가 버진로드를 걷듯이 중앙의 통로를 따라 걸어가 제단의 코앞까지 의기양양하게 행진했다. 제단에 다다라서야 왼쪽으로 빠져 2층으로 올라가 발코니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들 가족 외에 발코니석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왕실 가족과 체자레 백작 및 루비나 백작 부인뿐이었다.

16630315311234.jpg- ‘왔다. 이사벨라 데 마레야!’

16630315311234.jpg- ‘오늘은 파란 드레스네.’

16630315311234.jpg- ‘저 황금 십자가, 루카 보석상에서 맞춘 것 아니야?’

오늘도 여느 때와 똑같았다. 중랑을 가로지르는 중앙 통로를 사뿐사뿐 걷노라면 여자들은 선망 반 질투 반의 눈길로 그녀가 무엇을 입고 무엇을 발랐는지를 샅샅이 훑어보았고 양쪽의 장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십중팔구는 고개를 길게 빼고 이사벨라의 방향을 돌아보았다. 옆에 부인이 있건 말건 상관없었다.

16630315311234.jpg- "여보! 체통을 지켜요!"

16630315311234.jpg- "에헴!"

중랑뿐만이 아니라 멀리 측랑에 앉아 있는 남자들마저 고개를 내미는 꼴이 시야각 바깥쪽으로 슬쩍 보였다. 이사벨라는 유쾌해서 소리 내서 웃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오늘은 체자레 백이 먼저 도착해서 오른쪽, 왕실 식구들이 앉는 방향의 발코니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대미사에서 이사벨라를 핥듯이 바라보는 남자들 중 우두머리 같은 자였다. 그의 시선은 항상 좋지만 동시에 싫었다.

1663031531126.jpg‘계속 나만 바라봐서 남들이 그와 같이 나를 갈망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체자레 백작이랑 사귀기는 싫고, 체자레 백작이 나에게 매달리는 꼴을 보고 알폰소 왕자가 질투했으면 좋겠다. 알폰소 왕자가 나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완벽하게 자기 본유적인 소망이었다. 중랑을 거의 끝까지 걸었을 때 체자레 백작과 이사벨라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사벨라는 당신과 사귀지는 않을 거지만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한다는 마음으로 체자레에게 눈을 맞춘 채 자기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 * * 아리아드네는 이사벨라의 등 뒤를 한 걸음 떨어져서 따라가면서 욕망에 찬 시선들을 구경했다. 그녀로서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저런 시선들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남자들은 어려서는 볼품이 없어서 아리아드네를 저렇게 바라보지 않았고 커서는 이미 체자레의 것이 된 이후여서 아무도 감히 그녀를 저런 욕망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못했다. 여자들은 그녀를 가엾게 여기거나 무시했을 따름이었지 이렇게까지 분노를 함축한 눈빛을 발사한 사람은 없었다. 조금은 역겹고 조금은 부러운 마음으로 그 시선들의 목적물인 이사벨라를 함께 따라갔다. 그때였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람의 시선과 마주친 것이. 이십여 세, 갓 청년기에 들어선 대리석 조각상 같은 차가운 인상의 미남이 오른쪽 낮은 발코니 위에 팔짱을 끼고 서서 오연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층 높은 곳에서 자신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였다. 어리지만 선이 굵은 알폰소와 다르게, 그는 섬세한 이목구비와 갸름한 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훌쩍 컸지만 전체적인 체형은 호리호리했다. 검은색에 가깝게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대성황당 안에 가득 켜져 있는 양초들의 불빛에 반사되어 붉은빛을 띠었고, 두 푸른 눈은, 아리아드네가 거기에 떠오르는 온기를 간절하게 갈구했던 그 푸른 눈은 미동도 없이 아리아드네의 바로 앞에서 화사한 빛을 뿜으며 걸어가는 아름다운 자수정 빛 이사벨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진녹색 두 눈에 아픔일지, 아쉬움일지, 아니면 분노일지 모를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다시는 저자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프기는 아팠다. 14년간 쌓아왔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단호한 이성과 별개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체자레 따위 때문에 거사를 망칠 수는 없었다.

16630315323193.jpg'제발, 전생과 똑같은 일이 그대로 일어나기를, 계획이 성공하기를.'

아리아드네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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