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5화> 부창부수 (542/733)

<제25화> 부창부수2021.02.28.

16630315756251.jpg“잠깐!”

3층으로 올라가려는 아리아드네의 발걸음을 루크레치아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계모의 목소리는 유독 상냥했다.

16630315756251.jpg“아리아드네. 장신구에 왕비 폐하의 각인이 모두 들어가 있다니 그것참 영광스러운 일이로구나. 하지만 그것 말고도 있지 않니.”

루크레치아가 아리아드네에게 내는 소리로는 드물게, 병아리의 솜털처럼 부들부들한 목소리였다.

16630315756251.jpg“좋은 일은 나눠야 하는데, 식구들에게 장신구를 나눠줄 수도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니. 아쉬운 대로 영예로운 상금을 받은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한턱 내는 건 어떠니?”

이사벨라의 목표물이 장신구였다면 루크레치아의 목표는 현금이었다.

16630315756251.jpg“이 엄마에게 왕비 폐하께 받아 온 금화를 맡기면 오늘 저녁에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오마.”

16630315756272.jpg“와! 신난다!”

아라벨라가 1층 현관을 빙글빙글 돌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루크레치아는 평소였다면 정신없다며 한 마디 소리를 지를 법도 한데 아라벨라를 무시하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아리아드네를 압박했다.

16630315756251.jpg“그리고 그 금화 주머니 이리 내련. 어린 영애가 그리 큰돈을 쓸 일이 뭐가 있다고. 엄마가 잘 맡아 두고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주마.”

1663031575628.jpg‘내 그럴 줄 알았지.’

16630315756251.jpg“자. 어서.”

루크레치아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아리아드네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루크레치아의 기대감 어린 시선이 애타게 아리아드네의 손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루크레치아가 기대한 묵직한 금화 주머니가 아니라 종이 한 장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얇은 양피지를 루크레치아에게 건넸다.

16630315756251.jpg“이게 뭐니?”

매끈하게 무두질한 양피지를 은박으로 장식한 종이였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금 50두카토를 정히 영수함. - 랑부예 구휼원을 대리하여, 마르그리트 왕비.’」 50두카토를 나중에 준다는 말인가? 라며 글씨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뭐가 더 없는지 종이를 앞뒤로 뒤집어보고 있는 루크레치아에게 아리아드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1663031575628.jpg“금 50두카토는 데 마레 가문의 차녀 이름으로 왕비 폐하께서 운영하시는 랑부예 구휼원에 모두 기부하였습니다.”

16630315756251.jpg“뭐라고?!”

1663031575628.jpg“이것은 왕비 폐하께서 그 증빙으로 주신 영수증입니다.”

아리아드네가 가져올 50두카토(약 5000만 원)으로 가계부 여기저기에 나 있는 구멍을 메꿀 생각에 들떠 있던 루크레치아는 흥분해서 왕비의 영수증을 ‘콰직’, 구겨버리고 말았다.

16630315756251.jpg“그 아까운 걸 대체 왜 기부를 해?! 너 정신이 있니 없니?!”

루크레치아는 아리아드네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렀다.

16630315756251.jpg“너 집에서 잘 먹이고 잘 입혀 주니 돈 아까운 줄을 모르지?! 어떻게 가족들한테 성의 표시 하나 할 줄도 모르고 그 큰돈을 홀라당 다 기부를 해서 치워버릴 수가 있어?”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숙였지만, 전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세레토의 사도 사건과 국왕 내외의 희사를 거치며 발언권이 생긴 것이다.

1663031575628.jpg“가문에서 아이의 역할은 이름을 갈고 닦아 집안의 이름을 빛내는 것입니다. 왕비 폐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잊지 않는 데 마레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치하하셨습니다.”

16630315756251.jpg“너어?! 지금 나한테 눈 똑바로 뜨고 말대답한 거니?”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데 마레 추기경이 들어왔다. 아리아드네를 왕궁에 데려다주고, 간단한 볼일을 본 후 금방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16630315769033.jpg“내가, 내가, 당신이 이러고 있을 줄 알고 있었어! 이래서 서둘러서 왔지!”

데 마레 추기경은 옷소매를 휘휘 저으며 루크레치아를 모기 쫓듯 내쫓았다.

16630315769033.jpg“어린애 용돈 낚아채려 들지 말고 당신은 손 떼시오!”

신경질을 내며 추기경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16630315769033.jpg“지금 우리 집을 주시하고 있는 눈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추기경의 정부가 투기를 해서 둘째를 굶긴다, 가둬둔다, 하녀들이랑 같이 키운다 아주 말들이 많아! 괜히 푼돈에 욕심냈다가 저번처럼 창피나 당하지 말고 얌전하게 있어요!”

추기경은 계속 투덜댔다.

16630315769033.jpg“왕궁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도 마차 한 대가 계속 따라오더라니……. 맘 편하게 살 수가 없어!”

추기경은 겉옷을 벗어 그를 따라 들어온 집사에게 건네고는, 아리아드네에게 말했다.

16630315769033.jpg“‘푸른 심해의 심장’을 받아 왔다지? 그래, 어디 한번 열어보자.”

그는 현관 정중앙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푸른 심해의 심장’의 흑단나무 보석함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화려한 붉은 벨벳 안감의 정중앙에 눈부시게 빛나는 군청색 사파이어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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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0315769033.jpg“오오!”

데 마레 추기경은 보석을 꺼내지는 않고, 상자에 넣은 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16630315769033.jpg“이것이 ‘푸른 심해의 심장’이로군⋯⋯!”

온 식구들이 현관 중앙 테이블에 몰려들어 ‘푸른 심해의 심장’을 구경했다. 그것은 성인 남자의 엄지손톱 두 개 반을 붙여 놓은 것만 했다. 보석치고는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거대한 크기 덕에 부피감이 있어서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반짝임이 폭발적으로 반사되어 올라왔다.

16630315756272.jpg“진짜 신비로와요!”

아라벨라가 외쳤다. 데 마레 추기경은 그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16630315769033.jpg“‘푸른 심해의 심장’은 광산에서 난 게 아니라 바다에서 돌고래가 가지고 올라왔다는 전설이 있단다.”

1663031577287.jpg“우리 집안 문장도 돌고래잖아요?”

16630315769033.jpg“그렇지, 이사벨라. 결국엔 귀보석이 꼭 와야 하는 곳에 도착한 것 같지 않니?”

이사벨라가 아리아드네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1663031577287.jpg“우리 가문의 가보가 되기 딱 맞네요! 이폴리토 오빠의 잿빛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겠어요.”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의 말을 굳이 제지하지 않고, ‘푸른 심해의 심장’을 담은 흑단나무 상자의 뚜껑을 탁 닫으며 아리아드네에게 말했다.

16630315769033.jpg“아리아드네, 네 목걸이는 너에게 별도로 금고가 없으니 이 애비가 대신 서재 금고에 보관을 해 줄까 하는데, 어떠냐?”

1663031575628.jpg“아버지, 그것이⋯⋯.”

아리아드네는 초조하게 드레스 자락을 뜯었다. 금방 보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아직도 도착을 안 하는 거지?

16630315776524.jpg“추기경 예하!”

현관문이 덜컹 열리며 하인 하나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별을 전했다.

16630315776524.jpg“손님이 오셨습니다.”

하인을 뒤따라 들어온 것은 금으로 만든 휘장으로 성장을 한 왕비의 관리였다. 데 마레 추기경이 ‘따라온다’고 불안해했던 마차의 정체였다.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지가 같았다.

16630315776524.jpg“마르그리트 왕비 폐하의 명을 전합니다!”

칙서를 꺼내 든 왕비의 관리는 목례를 한 데 마레 추기경과 꿇어앉은 나머지 식솔들 앞에서 칙서의 내용을 읊었다.

16630315776524.jpg“오늘 데 마레 가문의 차녀에게 과분한 국왕 폐하의 하사품이 내려졌다. 보관의 용이를 위해 왕비의 명으로 금고를 함께 내린다. 설치는 차녀의 거소에 하도록 한다.”

관리는 데 마레 추기경에게 다가가 계약서 한 장을 건넸다.

16630315776524.jpg“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금고 장인과의 설치 계약서입니다. 값은 왕비 폐하께서 모두 치르셨습니다.”

추기경은 얼떨결에 계약서에 사인을 해 버리고 말았다. 관리의 뒤로 허리까지 올라오는 책장만 한 금고를 지고 올라오는 인부들 넷이 낑낑대며 현관 문턱을 넘었다.

16630315776524.jpg“추기경 예하, 설치는 어디에다가 할까요?”

아리아드네가 대답했다.

1663031575628.jpg“제 방은 3층 다락방…….”

데 마레 추기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둘째를 박대한다고 말이 돌고 있는 판에, 왕비의 관리에게 둘째의 방이 3층 구석의 다락방인 걸 보여서는 안 됐다. 티라도 안 나면 모를까, 그 방까지 가는 길에는 주변에 하인들의 처소가 너무 많았다.

16630315769033.jpg“아니! 아니! 2층 제일 서쪽 방이오!”

이번에는 루크레치아가 놀랄 차례였다.

16630315756251.jpg“여보! 그 방은 이폴리토 방이잖아요?”

16630315769033.jpg“호칭 주의하시오!”

데 마레 추기경의 호통에 루크레치아가 거북이처럼 머리를 어깨 안쪽으로 우그려 넣었다. 데 마레 추기경은 신경질은 많을지 몰라도 최소한 남들 앞에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장난 없게 화가 난 듯했다.

16630315769033.jpg“여자아이 침실에 바로 쇠붙이를 둘 수는 없지 않소! 서재라도 있어야 금고를 둘 것 아니야!”

그는 루크레치아의 바로 옆으로 가서 귓속말로 화를 냈다.

16630315769033.jpg- “당신이 애초에 일 처리를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 않소! 집안 살림은 당신 영역이라 존중하여 믿고 맡겼더니 결론이 이거요?”

16630315756251.jpg- “예하…….”

16630315769033.jpg- “이미 여러 번 기회를 줬어. 그런데도 전혀 정정이 안 되고 지금 바깥사람들 앞에서 내 체면에 몇 번이나 먹칠을 하는 거요! 내 조치를 취할 것이니 그런 줄 아시오!”

아리아드네는 두 부부가 설왕설래하고 인부들이 금고를 설치하는 난장판 속에서 루크레치아가 구겨서 던진 왕비의 영수증을 주워서 탁탁 편 후에 다시 품속에 넣었다. ‘푸른 심해의 심장’ 보석함을 꽉 안아 든 후에 왕비의 장신구 상자를 위층에서 내려온 산차에게 들게 하니 철수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1663031575628.jpg“우리는 이 틈에 얼른 올라가 있자. 새 방으로 가면 되겠네. 잘됐다.”

  * * *

1663031575628.jpg“왕비 폐하, 50 두카토의 희사금을 랑부예 구휼원에 제가 기부하였다고 영수증을 써 주십시오. 다만 제가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 가겠습니다. 집에 가지고 가면 그 돈은 제 돈이 아니게 됩니다. 그 돈의 첫 번째 용처는 제 전용 금고를 구매하여 제 방에 설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왕비 폐하께서는 그 금고를 설치하도록 하였다고 명만 내려 주십시오.”

아리아드네가 마르그리트 왕비에게 올렸던 청은 위와 같았다. 랑부예 구휼원을 은행처럼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왕비를 믿었기에 할 수 있었던 부탁이었다. 금고 설치를 할 필요까지 있을지는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다. 15 두카토나 들었을 뿐더러, ‘푸른 심해의 심장’을 데 마레 추기경에게 떠넘겨 버리면 도리어 부담이 덜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예 그 물건의 지배권이 데 마레 추기경에 있다면, ‘푸른 심해의 심장’을 노리는 타인이 추기경을 노리거나 추기경을 접촉하겠지 아리아드네를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제아무리 ‘푸른 심해의 심장’이 데 마레 추기경의 금고 안에 들어가 있더라도 이는 결국 레오 3세가 아리아드네 개인에게 내린 물건이었다. 명목상 그녀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완벽하게 분리되어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데 마레 추기경은 아리아드네를 결혼시키면서 혼수품 목록에는 ‘푸른 심해의 심장’을 포함시켜 놓은 채로 흥정을 하고, 막상 진짜로 신부를 보낼 때는 ‘푸른 심해의 심장’을 혼수품 목록에서 누락시키는 장난질 정도는 충분히 칠 수 있는 위인이었다. 빈손으로 가서 온갖 구박을 다 받을 아리아드네에 대한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정말로 귀애한다고 생각한 이사벨라를 원망하고 질투했다. 그리고 약간은 열등감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핵심적인 이익과 관련된다면 데 마레 추기경은 이사벨라조차도 칼 같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왕 손에 들어온 물건이라면 잘 이용할 것이었다. 어렵고 까다로워서 그렇지, 이것은 훌륭한 패였다. 전생과는, 바람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리아드네는 왕궁으로부터 온 우편물 하나를 받았다. 왕궁 시종이 직접 가지고 온 물건이었다.

1663031575628.jpg‘왕궁에서 보낸 물건이면, 왜 낮에 같이 가지고 오지 않은 거지?’

아리아드네가 가지고 있던 의문은 보퉁이를 풀고 그 안의 상자를 열자 풀렸다. 약 3캐럿 정도 되는 마퀴즈 컷의 진한 분홍색 투어멀린 십여 개로만든, 커다란 꽃 모양의 황금 머리핀이었다. 각인을 보니 티베리 강가의 고급 보석점에서 판매한 물건이었다. 물건을 보낸 출처는 왕자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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